동네가 다르고 평형이 다르고 사는 사람이 달라도 ‘올 화이트’로 대동단결했던 인테리어의 메가 히트 트렌드가 저물고 있다. 간결함과 세련미의 대명사로 도배되던 말끔한 흰색집의 유효기간이 임박해진 모양새다. 다음 인테리어 트렌드는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소셜미디어와 전문가들이 남긴 힌트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따뜻함’과 ‘자연스러움’이다.
■취향을 넘어 휴식의 공간으로
‘포브스’가 꼽은 2023년의 인테리어 키워드는 ‘컴포트코어(Comfortcore)’다. 포브스는 “농가의 생활과 스타일을 추구하는 ‘코티지코어(Cottagecore)’와 취향에 따라 공간을 잡동사니로 빼곡하게 꾸미는 ‘클러터코어(cluttercore)’의 뒤를 잇는 새로운 흐름”으로 컴포트코어를 소개했다.
영국의 패션 매거진 ‘스타일리스트’ 또한 컴포트코어에 집중하며 “코로나19부터 경제위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몇 년간 이어진 격동의 시간은 우리를 흔들었다. 이는 안정과 편안함을 갈망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테리어를 변화시키는 배후가 됐다”고 설명했다.
컴포트코어, 우리말로 직역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공간을 지향하는 움직임’ 정도가 되겠다. 국내에서도 안락함을 표방하는 인테리어가 트렌드에 민감한 이들을 중심으로 퍼지는 중이다. 박용준 인테리어 전문가는 “팬데믹 시대에는 취향을 반영하는 집이 인기였지만 최근에는 여기에 안락함까지 더해진 공간이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다양한 역할을 해오던 집의 기능 중 휴식의 비중이 커진 셈이다. 전윤슬 디자이너 역시 “지금의 트렌드를 단순하게 미니멀과 맥시멈으로 분류하기에는 애매하다. 편안하다는 기준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라며 “다만 대대적인 공사보다는 자연스러움을 모토로 컬러와 소품 위주의 변화를 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기업들도 대세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대표적으로 LX 지인(Z:IN)은 ‘2023 트렌드’로 ‘코지 스타일’을 꼽았다. 이 브랜드는 ‘햇살이 잘 드는 베란다에 나만의 홈 카페를 만들어 마음에 드는 소품으로 진열하기’, ‘나뭇결을 살린 듯한 우드 질감 인테리어에 뉴트럴 톤 가구와 소품을 매치하기’ 등의 방법을 제안하며 해당 콘셉트의 연출 팁을 공개하기도 했다.
■자연의 색으로 물들이다
변화를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색상이다. ‘매기 그리핀 디자인’의 디자이너 그레이스 브랙맨은 “모든 것이 흰색인 것에 지친 사람들이 더욱 흥미로운 것을 찾아 나섰다”고 말했다. ‘데코레이트 인테리어’의 창립자인 말라 스튜어트 또한 “생기와 문화로 다시 집 안을 채우길 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디자인 요소와 색상을 추가해야 한다. 올 화이트의 주방은 대담한 색상들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대담한’ 색 또한 자연에 기인한다는 공통점을 품고 있다. 시각적으로 편안함을 주고 심리적으로 긴장감을 덜어주는 데 효과가 있는 초록은 지난해에 이어 꾸준한 인기가 예상되는 색상이다. 특히 온화한 느낌을 주는 ‘웜 그린 톤’이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식물을 활용한 ‘플랜테리어’와 식물이 그려진 패브릭으로 재조명되는 분위기다.
초록에 대비되는 빨강 역시 2023년을 대표할 색에 포함됐다. 미국의 색채 연구소 팬톤은 올해의 컬러로 태양처럼 뜨겁고 활기가 넘치는 ‘비바 마젠타’를 선정하며 “따뜻함과 차가움 사이의 자연스러운 균형이 돋보이는 색”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흐름에 따라 LG전자는 대형 생활가전 최초로 ‘디오스 오브제컬렉션 무드업’에 비바 마젠타 색을 추가하기도 했다.
보색의 경쟁에 중재자로 나선 색상은 나무에서 영감을 얻은 브라운이다. 영국의 페인트 회사 듀럭스는 ‘2023년의 컬러’로 은은함이 느껴지는 ‘와일드 원더’를 선정했다. 듀럭스 측은 옅은 노란색의 페인트 색상인 와일드 원더를 “신선한 씨앗 꼬투리와 곡물 수확에서 영감을 받은 부드러운 금색”이라고 묘사했다.
화이트를 향한 욕망의 불씨도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쨍하게 밝은 화이트보다는 중성 톤이 가미된 크림 화이트와 흙, 나무, 모래 등을 연상시키는 ‘얼시(earthy) 뉴트럴’ 색상이 사랑받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친환경 페인트 회사 베어 역시 은은한 베이지 계열의 ‘블랭크 캔버스’를 올해의 색으로 추천했다. 브랜드 측은 “자체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응답자가 이상적인 집으로 ‘긴장을 풀 수 있는 공간’을 꼽았다”며 블랭크 캔버스가 그 바람을 채워줄 것이라 내다봤다.
색상과 함께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소재와 소품들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라이프스타일 및 인테리어 디자인 기업 ‘아파트먼트테라피’는 올해 “삶의 흐름이 실외에서 실내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업체는 “다수의 전문가가 집 내부를 외부의 재료로 채워가는 중”이라며 “인테리어에 생명을 불어넣을 재료로 자연을 비롯해 석재, 목재 등 전통적인 야외 마감재가 약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부드럽게 그려본 곡선
디자인 면에서는 직선에 반기를 든 곡선의 활약을 기대해봐도 좋겠다. 정확함과 모던함을 상징하는 직선과 달리 곡선은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으로 차분함을 연출한다. 또한 삭막한 도시, 외부 풍경과 대비된 곡선은 안정감을 선사한다.
곡선 디자인을 대표하는 것은 활과 같은 형태의 아치다. 주로 상업공간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최근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아치형 구조물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에서 복도, 공간과 공간이 구분되는 경계부는 아치 구조의 인테리어를 포인트로 응용하기에 좋다.
박시형 인테리어 컨설턴트는 “거실 벽을 타원형과 기하학적인 느낌으로 디자인해 마치 파도가 이는 듯한 느낌을 주면 자연의 한가운데 머무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파우더룸, 날개벽 등도 곡선 인테리어를 활용해 수납공간을 마련하면 이질감 없이 하나의 가구처럼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대공사가 어렵다면 곡선형 가구를 통해 보완하는 것도 방법이다. 주성희 인테리어 전문가는 “곡선의 가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지만 특유의 부드러움이 기존의 각진 가구들과 잘 어우러져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곡선형 소파나 끝이 둥근 형태의 타원형 티테이블을 활용하거나 침대 헤드보드에 곡선형 패널을 추가하는 방식도 소소하지만 손쉽게 곡선 인테리어를 실행하는 아이디어다.
■욕실에서 소소한 사치를
휴식의 끝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욕실 브랜드 ‘이누스’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부터 차분하고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상품들이 두각을 보이고 있다. 브랜드 측은 “팬데믹 이후 인테리어 패러다임이 개인화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사적 공간인 집 안에 나만의 힐링 공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형성됐다”며 “이에 따라 욕실을 안락하게 꾸미고자 하는 소비자가 늘었다”고 풀이했다.
욕실 타일에서도 자연의 향연은 목격된다. 유럽을 시작으로 흙, 나무 등의 질감을 구현한 타일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은은한 꽃무늬, 체크무늬 등 자연에서 기인한 유기적인 패턴이 톤 다운된 원색과 함께 뉴트로 바람을 타고 돌아오는 중이다.
빠듯해진 주머니 사정만큼 어느 때보다 ‘가성비 인테리어’도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고하은 욕실 인테리어 전문가는 “경기 침체와 부동산시장 악화 등 현실적인 이유로 작은 변화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들이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마이크로 럭셔리 인테리어’를 언급했다. 덧붙여 그는 “고급스러운 무늬의 대리석, 금색 수전, 고풍스러운 거울 등의 소품으로 개성을 살리고 온기가 발산되는 조명으로 전체적인 톤을 잡아주는 방법 등이 좋은 예시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