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가 출시한 ‘벤테이가 EWB’

2024.01.12 06:00 입력 2024.01.12 06:03 수정
정우성

SUV가 4억원?! 탐미

▲ 벤틀리가 출시한 스포츠유틸리차량(SUV) 벤테이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조차 이 브랜드가 선물한 차를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진다.

▲ 벤틀리가 출시한 스포츠유틸리차량(SUV) 벤테이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조차 이 브랜드가 선물한 차를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진다.

좀 허무한 일일 수 있다. 평생 아끼고 모아도 집 한 채 갖기 어려운 게 현실인데 4억원 짜리 스포츠유틸리차량(SUV) 한 대를 세밀하게 엿보는 순간은. 당장 다음달 카드값을 걱정하는 와중에 시트 바느질의 촘촘함과 단정함, 기가 막힌 촉감에 대해 논하는 일은. 평생 탈 일이 없을 것 같은 초호화 전세기 의자에서 영감을 받은 SUV 뒷좌석의 승차감에 대해 상상하는 아침은…. 하지만 좋은 물건의 묘미는 취(取)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취하기 전에는 탐(貪)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 취하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탐하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고, 그 자체로도 어떤 즐거움과 배움에 닿아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떨까.

누구나 벤틀리를 살 수는 없다. 압도적으로 귀하고 호화로우니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꿈꾸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지난 12월에 벤틀리가 출시한 벤테이가 EWB의 가격은 3억4000만원 근처에서 시작한다. 원한다면 더 큰돈을 쓸 수 있다. 내 취향을 매우 구체적으로 풍경화처럼 구현해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는 단 한 대의 차를 만들 수도 있다. 벤틀리는 말한다. 한계는 당신의 상상력, 그리고 안전뿐이라고. 2022년 9월 서거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조차 이 브랜드가 선물한 차를 각별히 아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벤테이가 EWB는 이렇게 비싼 이유는 뭘까? EWB는 익스텐디드 휠 베이스(Extended Wheelbase)라는 뜻이다.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거리를 휠베이스라고 한다. 주로 자동차의 실내공간을 가늠할 때 읽는 수치. 휠베이스가 3m면 이미 광활한 수준인데, 벤테이가 EWB의 휠베이스는 3m20㎝에 가깝다. 기존의 벤테이가보다 무려 18㎝나 넓다. 광활하지만 허하지 않다. 시트를 감싼 가죽은 이제 막 보습제를 바른 피부 같다.

현실과 실용의 영역에 발을 붙인 채
‘세상 꼭대기’의 취향을 알아가는 일은
어쩐지 은밀하고도 아찔한…

릴렉스 모드를 작동시키면 뒷좌석은 40도까지 뒤로 눕는다(왼쪽 사진). 바늘땀의 간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스티치. 차를 이야기하면서 바느질을 강조하는 이유다.

릴렉스 모드를 작동시키면 뒷좌석은 40도까지 뒤로 눕는다(왼쪽 사진). 바늘땀의 간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스티치. 차를 이야기하면서 바느질을 강조하는 이유다.

바느질은 더 특별하다. 벤테이가 EWB의 헤드레스트나 등받이에는 벤틀리가 평소에 쓰던 실보다 더 얇은 실을 썼다. 시트 바느질하는 실은 두꺼워야 튼튼한 거 아닐까? 머리와 등이 닿는 부분. 피부가 닿거나 가장 먼저 시선이 닿는 부분의 벤틀리 시트는 ‘바느질’이 아니라 ‘자수’ 개념으로 봐야 한다. 좌우 대칭이 완벽한 다이아몬드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벤틀리는 특별히 만든 타공 기계로 먼저 길을 낸 후 수를 놓는다. 이 부분의 바느질 간격은 다른 벤틀리 스티칭의 절반 정도. 눈으로 봐도 확실히 정교하다. 심플하게 선으로 이어져 있다. 손으로 쓸어보면 바늘땀의 간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훨씬 부드럽다. 손등으로 쓸어도 ‘스르륵’ 기분 좋게 스쳐 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굳이 얇은 실을 쓰는 것도, 특별히 제작한 타공 기계와 자수 기계를 쓰는 것도 다 이 찰나의 느낌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도톰한 가죽 스티칭, 이를테면 스티어링 휠을 감싼 가죽은 한 땀 한 땀 사람이 손으로 꿴다. 실의 굵기와 관계없이 장인의 손과 눈으로 꼼꼼히 작업한다는 뜻이다. 벤틀리 공장은 영국 체셔주 크루의 조용한 마을에 있다. 그 고즈넉한 공간에서 장인들이 손에 바늘과 실을 들고 각자의 자리에 앉아 가죽을 여미는 장면은 봐도 봐도 질리거나 지치지 않는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신할 거라는 목소리가 어떤 공포를 조장하는 시대, 산업혁명의 중심에서도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일을 오래도록 해온 장인들의 손끝은 빈틈없이 여물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오래 일하지 않으면 벤틀리처럼 공예에 가까운 자동차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보다 벤틀리가 잘 알고 있다. 벤틀리는 우수고용협회가 선정한 ‘영국 최고의 직장’에 12년째 이름을 올리고 있다.

벤테이가 EWB의 뒷좌석에 앉아서 릴렉스 모드를 작동시키면 뒷좌석이 40도까지 뒤로 눕는다. 조수석에서 전개되는 풋레스트에는 발을 얹어 놓을 수 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뭐랄까, 한국이 좀 좁게 느껴지는 순간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4시간을 이동해 왔는데 앞으로 5시간은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한국은 왜 3면이 바다일까, 그중에 한 면이라도 육로로 이어져 있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까 상상하게 되는 편안함. 집에 있는 어떤 소파나 리클라이너보다 자동차 뒷좌석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낯선 아이러니.

하지만 아무리 편해도 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몸이 곱게 마련. 벤테이가 EWB는 그마저 배려했다. 시트 표면의 압력을 감지해 3시간에 177가지 자세 변화를 제공하는 기능이 있다. 마사지 시트에 쓰는 에어포켓을 활용해 승객의 자세를 미세하게 변화시키는 기능이다. 허리, 허벅지, 옆구리 근육이 경직되기 전에 조금씩 조금씩 자세를 바꿔준다. 벤틀리는 프라이빗 제트, 매우 호사스러운 전용기 좌석에서 영감을 받아 뒷좌석을 설계했다고 말했다.

EWB 뜻은 ‘익스텐디드 휠 베이스’
광활하지만 허하지 않은 뒷좌석
등받이 등 얇은 실로 ‘자수’ 스티칭
바늘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끈
전세기 좌석에서 영감받은 만큼
표면 압력 감지, 177개로 자세 변화

벤테이가 EWB의 가격은 트림에 따라 아주르 3억4030만원, 퍼스트 에디션 3억8140만원, 뮬리너 3억9390만원이다. 아주르는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침착한 디테일을 강조한 버전, 퍼스트 에디션은 한국 시장이 선호하는 옵션들을 알차게 챙겨넣은 버전, 뮬리너는 극도로 호사스러운 버전이다. 이 세 가지 트림 중에 취향대로 고르면 되고, 거기에 더해 원하는 옵션들은 또 한없이 개인화해 주문할 수 있다. 각각의 가격은 그야말로 시작가인 셈이다. 취득세, 등록세에 개인화 옵션까지 상상해보면 이 차의 가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 천정부지일 수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 4억원에 가까운 돈을 자동차에 쓸 수 있는 사람의 유니콘 같은 인생은 어떨까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합리적인 자동차 소비의 기준은, 매우 보수적인 경제전문가의 추천에 따르면 월급의 4배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좀 후하게 쓰면 연봉의 60% 정도일까? 그래서 벤테이가 EWB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경제전문가 기준 약 1억원 정도의 월급쟁이거나 약 6억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텐데…. 현실적으로 월급이나 연봉을 계산하면서 벤틀리를 사는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내가 1년에 얼마를 버는지 잘 모르는 사람’ 정도로 ‘퉁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근사한 자동차니까, 덥석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갖지 않으면 또 어떤가. 꼭 가져야 행복할까? 못 가지면 불행한가? 몇 해 전 레바논에서 만난 어떤 귀족은 대대로 벤틀리를 수집하는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출퇴근용 자동차로 푸조 208을 타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현대 캐스퍼나 아반떼 정도 될까.

그는 “벤틀리는 너무 아름다운 차지만 매일 타는 건 다소 불편한 일”이라고 말했다. 붐비는 시내에선 경제적으로 잽싸게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차가 최고라는 말도 함께.

그날 이후 내내 생각했다. 꼭 비싸야 호사일까?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개인적 행복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건강이야말로 진짜 럭셔리 아닐까? 벤틀리를 수집하는 행복도 있는 거지만 푸조 208 운전석에서 느끼는 행복도 있다는 뜻이다. 그 대화를 나누던 2011년 당시, 나는 수동기어 경차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 현실과 실용의 영역에 단단히 발을 붙인 채, 이 흥미로운 세상 꼭대기 언저리의 취향에 대해 알아가는 일에는 어쩐지 은밀하고 아찔한 구석이 있다. 치솟는 호기심과 욕심, 시기와 질투, 끝없는 막연함, 다소의 절망과 통장 잔고의 냉정함 사이로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는 취향과 심미안의 영역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가질 수 없지만 끝내 아름답다 느끼고 마는 것이다.

가질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이미 가진 것들 사이에서도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려는, 정말이지 섬세하고 복잡한 목표를 세우게도 되는 것이다.

▶ 정우성

[정우성의 일상과 호사]벤틀리가 출시한 ‘벤테이가 EWB’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처럼 가볍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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