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방음터널 방재기준, 의무 아니라 고작 “검토해야”

2023.01.04 06:00 입력 2023.01.04 16:53 수정

강화유리 교체하면 오히려 연기에 갇혀

소방설비 많을수록 하중 부담, 지진 취약

“상층부 개방 의무화 등 근본 대책 마련해야”

경기 과천시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 사고로 4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정부가 정한 방음터널 설치 기준에는 방재 시설 설치가 의무가 아니라 ‘검토’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국내 방음터널 중 상당수는 비상대피로·제연시설 등 방재 시설이 없는 실정이다. 화재 이후 플라스틱 천정판 대신 강화유리가 대안으로 제시됐으나 오히려 구조물 하중에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화재 시 연기가 빠져나가지 않아 피해를 키울 수 있어 근본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기 과천시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방음터널 화재 현장에서 지난달 30일 경찰과 소방, 국과수 등 관계자들이 합동감식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기 과천시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방음터널 화재 현장에서 지난달 30일 경찰과 소방, 국과수 등 관계자들이 합동감식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방음터널에 대한 법적 근거는 환경부 고시인 ‘방음벽의 성능 및 설치기준(설치기준)’과 국토교통부 예규인 ‘도로터널 방재·환기시설 설치 및 관리지침(관리지침)’ 2가지다. 환경부는 설치기준 9조에서 ‘방음벽에 사용되는 재료는 발암물질등 인체에 유해한 물질을 함유하지 아니한 것으로서 내구성이 있어야 한다’라고만 명시했다. 소음만 차단된다면 재료는 화재에 취약한 것을 사용해도 별다른 제약이 없다는 의미다. 실제 과천 방음터널의 경우 철제 뼈대 위에 불이 잘 번지는 아크릴 소재인 폴리메타크릴산메틸(PMMA) 재질의 반투명 방음판을 덮어 피해를 키우기도 했다.

국토교통부는 ‘도로터널 방재·환기시설 설치 및 관리지침’을 만들면서 방음터널의 경우 방재시설의 설치를 ‘검토하여야 한다’(노란색 실선)로 정해 놓고 있다. 이미지 크게 보기

국토교통부는 ‘도로터널 방재·환기시설 설치 및 관리지침’을 만들면서 방음터널의 경우 방재시설의 설치를 ‘검토하여야 한다’(노란색 실선)로 정해 놓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관리지침은 방음터널의 경우 방재 시설의 설치에 대해 ‘검토하여야 한다’고 정했다. 방음터널의 재질·성능은 환경부 고시를 따르도록 해 방음터널의 화재 대책에 대해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도로공사 도로교통연구원이 2018년 발표한 ‘고속도로 터널형 방음시설의 화재안전 및 방재대책 수립 연구’를 보면 수도권외곽순환고속도로와 순천완주고속도로의 일부 (상부)밀폐형 방음터널의 경우 소화설비나 환기 및 제연설비가 아예 없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토교통부 관리지침 상 방재 시설 설치가 의무가 아니라 ‘검토’ 대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 터널은 방재 시설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다. 최근 건설된 지하터널 등에는 첨단 설비가 설치되기도 한다. 2021년 4월 개통된 서울제물포터널의 경우 벽면에는 소방용 스프링클러 분사구가 5m마다 1개씩 설치돼 있다. 천장에는 화재 시 자동으로 열려 연기를 빨아들일 수 있는 흡입구가 50m마다 1곳씩 만들어져 있다. 비상시 반대편 차선으로 우회할 수 있는 대피로가 차량용은 600m마다, 운전자·승객용은 200m마다 만들어졌다. 운전자와 승객이 지상 구간으로 대피할 수 있는 피난계단도 있다.

한국도로공사 도로교통연구원의 ‘고속도로 터널형 방음시설의 화재안전 및 방재대책 수립 연구’ 자료를 보면 일부 (상부)밀폐형 방음터널의 경우 소화설비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도로공사 도로교통연구원의 ‘고속도로 터널형 방음시설의 화재안전 및 방재대책 수립 연구’ 자료를 보면 일부 (상부)밀폐형 방음터널의 경우 소화설비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과천 방음터널 화재 이후 정부는 물론 국회, 지방의회 등에서 각종 보완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각종 소방시설 설치나 방음터널 덮개를 방화유리로 하자는 수준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서울지방국토관리청에서 열린 사고 대책회의에서 “국가에서 관리하는 55개 방음터널과 지자체가 관리하는 방음터널의 안전성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공사가 진행 중인 방음터널은 덮개 소재를 강화유리 등 불연소재로 교체하고, 기존 방음터널은 화재를 방지할 수 있도록 조치할 계획이다.

국민의힘 최춘식 의원(경기 포천·가평)은 지난 2일 보도자료를 내고 “방음터널을 설치할 때 그 재질을 불연성으로 하는 등 ‘방음터널의 화재안전기준’을 ‘법률적’으로 정하는 동시에, ‘특정소방대상물’에 포함시켜 소방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하는 내용의 ‘도로법’과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시의회 도시안전건설위원회(위원장 송도호)도 “서울시는 정부 관계부처와 협의해 방음터널에 불연 소재를 사용하도록 기준을 마련해 달라”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방음터널은 대부분 교량 구간에 설치되어 있어 무거운 강화유리를 비롯해 스크링클러, 제연 닥트 등을 설치하면 구조물 하중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덮개 재질을 바꾸더라도 화재 시 유독가스 배출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조성일 르네방재정책연구원장은 “각종 소방시설을 설치하면 오히려 교량에 하중이 가해지기 때문에 구조물 안전은 물론이고 지진에 취약해진다”면서 “방음터널을 설치할 경우 상부를 의무적으로 개방하는 방안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 도심 내 교량 구간의 경우 저소음 포장도로로 시공해 소음을 줄이거나 저소음 타이어를 도입하는 방안 등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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