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판결이 한국·일본에 던진 물음, ‘국가란 무엇인가’

2018.11.23 16:27 입력 2018.11.23 17:56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그라운드의 이방인 - 감독 김명준 | 2015년 한국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 2006년 미국·일본

1909년 “한·일 양국이 합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진회 합방 성명서’를 써서 순종, 통감부, 내각에 보내고 전국에 배포한 일진회 핵심 멤버가 이용구다. 1905년에는 일본에 외교권을 넘겨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해 조선의 식민지화를 재촉한 것도 그다. 친일파로 불리는 이용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북접 계통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농민군 수천을 모아 관아를 습격했고, 남북접이 연합한 공주전투에서는 손병희의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을 때 이용구도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을 당하며 사형집행을 기다렸다. 이때 이용구의 희생을 기억하는 동학교도들이 감옥을 습격해 그를 구출했다. 반외세 반봉건을 내세운 동학운동은 최시형의 죽음으로 해체되고, 반외세파가 주류인 천도교와 반봉건파가 주류인 일진회로 갈라진다. “낡고 부패한 조선왕조의 수탈에 다시 시달리느니, 어쩌면 세련된 착취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에 기대를 걸어보려는 심정 아니었겠나.” 양반의 노예로 죽도록 일해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던 이용구 같은 사람에게는 조선과 일본, 조국과 외세가 다를 리 없었다고 어느 정치학자는 말했다.

재일동포 고교 야구선수를 그린 다큐멘터리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한 장면. 소년들이 중년이 되어 한국의 야구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있다. | 인디스토리 제공

재일동포 고교 야구선수를 그린 다큐멘터리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한 장면. 소년들이 중년이 되어 한국의 야구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있다. | 인디스토리 제공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가 광복한 다음에도 일본에 남아 삶을 이어온 재일동포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김명준 감독은 1956년부터 1997년까지 한국 고등학교 야구대회에 참가한 재일동포 야구소년들을 찾아 나선다. 재일동포팀 덕에 선진기술이 들어오고 야구장비가 발전했다는 전문가 얘기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런데 야구소년들은 인터뷰를 거절한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야구는 재미있게 했지만. 가보니 내 모국도 아닌 것 같고. 도리어 거기 다녀오는 바람에 한국인이라는 사실만 주변에 알려졌다. 프로 진출도 취직도 길이 막혔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것 같다.)” 고등학교 야구대회를 계기로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도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시국사건이라도 터지면 수사기관에 불려갔고 마음의 병을 얻어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이렇게 끌려가 조사받은 사람 가운데 야신으로 불리던 김성근 감독도 있다.

영화는 1982년 봉황대기에 출전한 야구소년들을 찾아내 그들이 준우승을 했던 잠실야구장에 다시 세운다. 50대 중년인 야구소년들은 재일동포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고 어느 프로야구 경기의 인기 없는 시구인으로 나선다. 드문드문 나오는 박수소리에도 가슴이 먹먹해진 그들은 털어놓는다. “쪽발이 같은 한국 사람, 왜 한국말도 못하느냐. … 우리를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들어갔고, 공 하나하나에 혼을 담아 던졌던 것 같다.” 교가가 없는 재일동포팀이 이기면 주최 측은 ‘고향의 봄’을 틀었다. 재일동포 선수들은 모르는 노래였다. 그러고 보면 사실 이들에게 한국은 조국이라기보다 고향에 가까웠다.

방한한 ‘재일동포’ 야구소년들
“선진 기술 유입” 환영 받았지만
적의에 찬 시선에 좋은 기억 없어
한국, 고향에 가까울 뿐 조국 아냐

이오지마에서 패전 맞이한 일본
죽음 앞둔 병사가 그리워한 것은
고향의 가족과 공동체일 뿐
국가는 두려움과 저주의 대상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노역에 동원된 사람들이 그 시절 일본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에서 대법원이 최종적인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민사재판에서 이기면 판결문을 근거로 상대에게서 돈을 받아낸다. 만약 패소한 쪽에서 주지 않겠다고 버티면 재산을 강제로 팔아 현금화한다. 하지만 이 판결은 그러기 쉽지 않다. 상대 회사들이 한국에는 재산이 없는 데다(설령 있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일본에서는 이 판결문이 소용없다. 한국 판결이 일본에서 힘을 쓰려면 일본 재판소가 승인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는 대법원과 정반대 판결을 해왔다. 그렇다면 일본 회사들의 미국 재산에 딱지를 붙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 편을 들어주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유는 일본과 한국이 겪는 똑같은 분쟁을 미국과 일본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을 거칠게 요약하면 한일청구권협정이 있었다고 해도 국가가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있었다고 해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소송이 미국에서도 있었다. 한국의 판결을 승인하면 미국 역시 일본 국민이 제기하는 소송에 시달릴 수도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일본의 무명 병사에게도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워너브러더스 제공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일본의 무명 병사에게도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워너브러더스 제공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이 피해자로서 벌인 소송에서 개인의 청구권은 남아 있다는 입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맺은 패전국이지만 일본 국민의 권리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1963년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샌프란시스코협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청구권은 남았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시베리아에 억류된 일본인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1956년 일소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소련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일본 행정부는 이런 입장을 1990년대까지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이 제기하는 위안부·징용자 소송은 막아냈다. 일본 정부의 ‘이중 플레이’지만,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독특한 한일청구권협정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2000년대 들어 개인 청구권도 사라진다고 입장을 바꾼다.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잇따라 패소하자 관련 기업이 있는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는데 관할이 인정되며 소송이 시작된 것이 영향을 줬다. 일본군 포로이던 미국인이 캘리포니아주 북부지구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양국의 외교적 보호권만 포기한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바꿔 개인 청구권도 소멸됐다고 주장을 전환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가 일본인이 제기하는 소송과 외국인이 제기하는 소송에서 다른 입장을 보인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외교적 보호권, 재판 청구권, 실체적 권리와 같은 개념이 이런 문제에는 등장하는데, 쉽게 말하면 나라가 대신 나설 권리, 재판으로 받아낼 권리, 돈을 받아낼 권리 등이다. 이에 더해 정부 입장과 법원 입장이 또 갈린다. 당장 한국이 그렇다. 외교부와 대법원의 입장이 갈라졌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한 단계 발전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읽자면 기존 이론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찬반이 엇갈리는 판결문은 이론의 전시장 수준으로 복잡하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외교적 보호권만 없앤 것이라는 의견, 외교적 보호권은 물론 청구권도 없어졌다는 의견, 재산 청구권과 위자료 청구권을 나눠야 한다는 의견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 판결이 두 나라에 미칠 영향은 가늠하기 어렵다. 1965년 두 나라 정부가 서명한 한일협정도 50년 넘게 분쟁상태이니, 아무런 정치적 정당성이 없는 법원 판결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간다고 해도 끝나지는 않는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그렇다.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사는 이탈리아는 2012년 ICJ에서 내린 패소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현재로서는 한국 정부가 ICJ 재판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당초 정부가 일본에서 돈을 받아오고도 피해자들에게는 쥐꼬리 배상을 한 것부터 문제다. 그러니 이 사건을 가지고 있던 대법원이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했다는 얘기가 난망하다. 외교적인 해결이 되도록 선고를 미뤘다고 보기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일본 사이가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대법원이 애국적인 여론을 넘어 원고 승소 결론을 뒤집을 리도 없었다. 어쩌면 대법원은 자신의 괴로움을 오히려 청와대에 고가에 팔아넘기려 접근한 지능적인 사기범일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지난 세기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일본의 침략전쟁이 일본인들에게도 괴로움이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 남동쪽 작은 섬 이오지마는 본토 방어 한계선이었다. 실제로 1945년 3월 일본이 이오지마 전투에서 패하면서 패전을 맞이한다. 미군은 이오지마를 B-29 폭격기 등의 최전방 기지로 삼아 본토 공습을 시작한다. 영화에서 일본군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전쟁을 벌이는 국가를 저주한다. 징집되기 전에 고향에서 운영하던 빵집은 군인들의 공짜식당이었고 나중에는 전투에 필요하다며 조리기구까지 쓸어갔다. 패색이 짙어지자 병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탈영해 항복하지만 아침까지 감시하기 귀찮다는 미군의 총에 사살된다. 일본에서 사람을 비난하는 말 가운데 ‘비국민(非國民)’이 있다. 영화에서도 전투를 지휘하는 군인들은 “비국민”이라는 말로 회의하는 병사들을 윽박지른다. 죽음을 앞둔 병사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고향의 공동체이고, 국가는 두려움과 미움의 대상이다. 동학의 이용구에게, 바다를 건넌 야구소년에게,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그리고 이오지마 병사들에게 조국은 아니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