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이력서 아닌 ‘뜨거운 스토리’를 가진 대법관을 보고 싶다

2019.01.25 16:49 입력 2019.02.13 15:55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마셜 - 감독 레지날드 허들린 | 2017년 미국

서굿 마셜 변호사(가운데·채드윅 보즈먼)가 다른 주(州) 변호사라는 이유로 변론을 제한한 판사에게 항의하고 있다. 마셜은 관할 코네티컷주 변호사 샘 프리드먼(왼쪽·조시 게드)과 함께 강간 혐의를 받는 조지프 스펠(스털링 브라운)을 변호한다.

서굿 마셜 변호사(가운데·채드윅 보즈먼)가 다른 주(州) 변호사라는 이유로 변론을 제한한 판사에게 항의하고 있다. 마셜은 관할 코네티컷주 변호사 샘 프리드먼(왼쪽·조시 게드)과 함께 강간 혐의를 받는 조지프 스펠(스털링 브라운)을 변호한다.

페미니즘과 나치즘을 조합한 페미나치(Feminazi)라는 단어를 만들어 여성들을 공격해온 미국의 극우논객이 러시 림보다. 걸핏하면 여성을 창녀로 비유하는 그는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을 자주 한다. 그의 이름은 <뉴스룸> 같은 미국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림보 때문에 보수가 공격받는다는 대사다. 림보의 결혼식 주례를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했는데 흑인인 클래런스 토머스다. 림보와 가까운 토머스는 연방대법원의 대표적인 보수 대법관이다. 소수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에 반대하는 의견을 여러 판결에서 내놨다. 역사상 두 번째 흑인 대법관인 그는 진보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보수 중에서도 치우친 보수다.

우리나라에서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을 뽑을 시기가 되면 여성이나 변호사 출신, 비서울대 출신을 뽑으라는 기사까지 나온다. 이유도 균형이 필요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들이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해고한 박보영 전 대법관은 여성이고, 사형제도가 합헌이라고 강하게 주장한 송두환 전 재판관은 민변 회장 출신이다. 오히려 불법체류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허용하는 등 기존 판례를 뒤집어 역사를 진전시킨 사람은 정통 법관으로 오래 일한 이른바 서오남(서울대·오십대·남성) 대법관이다. 여성과 변호사를 요구하는 주장도 출신으로 사람을 단정하고 구별하는 셈이다.

하지만 미국과 우리나라는 다르다. 1990년 클래런스 토머스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대법관에 임명할 때부터 성향이 알려져 있었다. 그의 동의안이 상원에서 52 대 48로 아슬아슬하게 통과된 것도 민주당의 반대 때문이다. 진보진영에서도 반대운동을 강하게 벌였다. 반면 한국에서는 여성이라거나, 변호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부추기고 기대를 건다. 박보영 전 대법관이 취임식에서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었다며 ‘대법원 관례 파괴…판결서도 소수자 대변 예상’이라고 보도한 언론도 있다. 그러다가 박보영 전 대법관이 임기를 마치고 나서야 왜 그런 판결을 내렸냐고 뒤늦게 항의한다.

백인 여성 강간 혐의로 법정에 선 흑인 남성과 그의 변호인
‘합의 성관계 후 흑인 애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가 투신했다’는
실토를 받아내 흑인에 대한 편견에 맞서 결국 무죄를 이끌어 내는데…

미국 첫 흑인 대법관 서굿 마셜의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를 보며
조직의 명함에 가리워진 우리나라 대법관들의 면면을 생각해 본다
무엇이 정의이고 인권인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운 자가 있었는가?

영화 <마셜>은 미국 첫 흑인 대법관 서굿 마셜의 이야기다. 마셜은 변호사로서 미국 흑인 인권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주로 제도권 밖에서 움직이던 인권운동을 법정으로 가져와 실질적으로 사회를 바꾸었다.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송무팀장으로 수행한 32건 가운데 29건을 승소로 이끌었고, 이 가운데 그 유명한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도 있다. 이 판결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한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 판례가 58년 만에 뒤집혔다. 마셜 변호사가 제출한 광범위한 사회과학 연구를 얼 워런 대법원장이 인용했고 이것이 헌법교과서에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나오는 11번 각주(footnote 11)이다.

<마셜>은 1940년 일어난 흑인 남성의 백인 여성 강간 사건을 다룬다. 조지프 스펠은 자신이 운전사로 일하던 집안의 백인 여성을 성폭행하고 강물에 던진 혐의로 기소된다. 스펠은 자신을 찾아온 마셜 변호사에게 여성의 털끝 하나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을 믿고 마셜은 변론에 착수하지만 재판을 하면서 스펠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마셜은 스펠을 추궁했고, 백인 여성의 유혹으로 두 사람이 합의해 두 차례 성관계를 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백인 여성은 성관계가 끝나고 자신이 흑인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며 불안해하다가 갑자기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스펠은 발언을 뒤집었고 신빙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검사는 스펠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공격한다. 실제로 그는 군대에서는 불명예 제대했고, 전 직장에서는 절도로 해고됐으며, 고향에는 처와 자식을 남겨두고 떠나 왔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요? 좋은 집안 출신에 흠 없는 배경의 여성일까요? 아니면 부패하고 도덕이라고는 없는 상습 범죄자에 일생이 거짓말로 점철된 사람일까요? 예의 바르고 신앙이 있으며, 지적이고 최고 학부를 졸업한 여성이 흑인 하인과 합의한 성관계를 맺고 물에 뛰어들었다고요? 무엇 때문에요? 스펠은 범죄의 유일한 목격자를 죽이려 다리 너머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런 자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면 표범을 우리 속에 풀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마셜 변호사는 사건이 시작되기 전부터 스펠이 교육받은 변호사들처럼 깨끗한 시민은 아니라고 동료 변호사에게 말한다. 형사 피고인들이 그런 이력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에서도 유죄일 수는 없다고 한다. 마셜 변호사는 피고인 스펠이 변호사의 방어신문이 아니라 검사의 추궁신문에서 말하게 만든다.

검사는 추궁한다. “피고인이 결백하다면 왜 거짓말을 합니까?” 말이 없던 스펠은 말한다. “제 고향 루이지애나에서 백인 여자와 그렇게 있었다면 저를 어떻게 했을지 아십니까?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사람들이 날 끌고 다니다가 묶어서 성기를 자를 겁니다. 그러고는 나무에 매답니다. 왜 거짓말을 하냐고요? 진실을 말하면 죽으니까요.”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은 마셜 변호사가 맡은 사례 가운데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 판례로서 가치도 거의 없어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와 같은 사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스펠 사건은 마셜의 깊이와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마셜은 이 사건에서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검사의 유죄협상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던 피고인 스펠이 끝까지 버텨 무죄를 받게 만든다. 돈벌이가 안되는 형사사건에는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던 동료 변호사를 진실의 법정에서 싸우게 만든다. 무엇보다 흑인에 대한 편견과 의심을 가지고 있던 판사와 배심원을 변화시킨다. 마셜은 이런 치열한 인생을 거쳐 1967년 연방대법관이 됐다.

기자는 스티븐 브라이어 미국 연방대법관을 인터뷰하기 위해 이번 겨울 워싱턴에 머물렀다. 인터뷰를 앞두고 연방대법원 변론을 방청하면서 내가 연방대법관 9명의 이력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순간 남의 나라 대법관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이력이 아니라 삶의 스토리였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어떤 로스쿨 시절을 보냈는지,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 대법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누가 판사 출신이고 누가 교수 출신이라는 정도가 전부다. 우리는 대법관 후보는 물론 현직 대법관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른다. 대법관 13명의 이름을 아는 변호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대법관 후보들도 어디 법원장과 법원행정처 무슨 실장을 거쳤다고 밝힌다. 변호사 출신도 다르지 않아 무슨 단체 회장이었다고들 적는다. 다들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다. 한 줄 더 적으면 야간대학을 졸업했다거나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철 지난 얘기다. 하지만 외국은 다르다. 당장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은 재판의 성격을 뒤집는 변론으로 유명한 변호사였다. 39개 연방대법원 사건을 맡아 25개에서 승소했다. 이런 차이가 다른 제도 탓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변호사 중에 판사를 뽑는 법조일원화 제도를 도입했지만 사정은 여전하다. 어느 로스쿨을 나왔다거나 아니면 로펌에서 일한 뒤에 판사가 됐다는 얘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마셜 변호사는 스펠의 형사재판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헌법은 우리를 위해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흑인)에게도 적용되게 할 것입니다.(The Constitution was not written for us. We know that. But no matter what, we’re gonna make it work for us.)” 무엇이 정의이고 인권인지 이렇게 치열하게 발언한 대법관과 재판관이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궁극적으로는 법원도 그리고 사회도 정체된 조직이 아닌 뜨거운 개인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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