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법한 문건 작성 지시했는데 왜 직권남용죄 적용 못할까

2019.07.01 21:48 입력 2019.07.01 21:50 수정

세월호 특조위 방해 사건…권한 없는 일 시켜야 성립

‘장관 말씀자료’ 문건 성격

법원 “의무 없는 일 아냐”

지난달 25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방해로 기소된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 등 박근혜 정부 인사들에게 1심 판결을 선고하기 직전 서울동부지법 형사12부 민철기 재판장은 법리 적용의 한계를 밝혔다. 민 재판장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면서도 “이 사건은 형법상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는지가 쟁점이고 정치적·도덕적 책임을 묻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검찰은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특조위 방해 행위 자체가 아니라 방해 공작을 담은 문건을 작성하도록 시킨 행위에 직권남용죄를 적용했다. 판결은 이 문건의 부적절성을 인정하면서도 직권남용죄를 적용하기 어렵고, 공모관계를 입증하기 어려워 많은 부분 무죄를 선고했다.

형법 123조는 직권남용죄에 대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를 방해한 때”라고 규정한다. 이번 판결에서 직권남용죄 법리에 어긋나 무죄가 나온 대표적인 혐의는 김 전 장관이 특조위의 여당 추천위원들과 만날 때 사용할 ‘말씀자료’를 해수부 공무원들에게 만들라고 지시한 행위다.

‘장관 말씀자료’라는 문건의 성격이 발목을 잡았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하급공무원이 고유의 권한을 갖고 있고, 그 권한을 상급공무원이 위법·부당한 지시로 침해해야 한다. 재판부는 문건 내용이 위법·부당하다고 볼 여지는 있다면서도, 말씀자료 작성은 장관의 단순한 보조자로서의 행위에 불과해 의무 없는 일을 시켰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장관이 외부인과 실시하는 면담·간담회는 다소 비정형적인 직무집행에 해당하고, 이때 실무자들이 참고자료나 말씀자료를 작성하는 것은 관행인 것으로 보이므로 직무집행의 절차나 기준이 마련돼 있다거나 실무자들에게 고유한 권한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공모관계가 인정되지 않은 혐의도 많다. 재판부는 2015년 1월19일 서울 중구 소공동 플라자호텔 회의 때 청와대와 해수부 등 사이에 특조위 방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도 문건 작성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권남용을 공모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특조위에 파견된 해수부 공무원들을 일괄 복귀하게 한 조치도 조 전 수석과의 공모가 인정되지 않아 김 전 장관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지어졌다. 재판부 판단대로라면 청와대 지시 없이 하급공무원들이 스스로 문건을 만들어 특조위 방해 활동을 한 셈이다.

세월호특별법 43조는 “누구든지 직무를 집행하는 위원·직원 또는 자문기구의 구성원이나 감정인에 대하여 폭행 또는 협박하거나 위계로써 그 직무수행을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돼 있지만, 문언 그대로 ‘폭행 또는 협박’, ‘위계’가 입증돼야 한다. 박근혜 정부 인사들처럼 조직적이고 은밀한 개입을 하면 처벌이 어렵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세월호 태스크포스(TF)는 “불충분한 사실 인정과 지나치게 낮은 양형을 통해 피고인들의 범행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고 유가족들에게 좌절을 느끼게 한 판결에 유감을 표한다”고 논평했다. 검찰과 조 전 수석, 김 전 장관 등 피고인들 모두 항소했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