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 아니라 강철천장”···보이지 않지만 차별은 있다

2023.10.24 06:00 입력 2023.10.24 09:48 수정

③여성을 옭아매는 굴레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내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내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법원을 피상적으로만 보면 여성 법관에 대한 차별이 없는 것 같다. 여성 법관이 출산·육아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제도가 개선됐고, 성평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돼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성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경향신문은 그 답을 얻고자 지난 8월부터 여성 판사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판사들은 직접적인 차별은 줄었을지 몰라도 간접적인 차별은 여전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 법원 특유의 관료주의, 장시간 노동과 많은 업무량 속에 여성 법관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쟁에서 뒤쳐지거나 경쟁을 스스로 포기하곤 한다고 했다. 법원 내 차별의 방정식은 과거보다 더 복합적이고 미묘하게 얽혀있다. 여성 대법관 수가 좀체 늘지 않는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고 판사들은 말했다.

출산·육아 부담 결국 여성에게 가중

최근 법원에선 여성 판사뿐 아니라 남성 판사도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출산·육아휴직에 따른 경력단절이나 불이익이 여성 판사에게 전가되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판사들은 출산·육아, 가사 노동에 대한 여성의 부담이 남성보다 여전히 큰 것이 현실이고, 이는 여성 판사의 ‘커리어(경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법원에선 매년 100명 이상의 법관이 육아휴직을 하는데, 여성 법관이 남성 법관의 2~3배다. 육아기 노동시간 단축제도는 남성 법관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여성 법관은 매년 20명 이상 사용한다.

여성 법관들은 대법관을 보좌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같은 선발성 보직의 지원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1·2심 판사들은 법리를 심리하는 법률심이자 최종심인 대법원에서 재판연구관을 하는 게 좋은 경험이라고 여긴다. 많이 배울 수 있고 경력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 재판연구관의 업무강도는 매우 높다. 대법원에 쌓이는 사건 수도 워낙 많고, 쟁점도 복잡하다. 여성 법관들은 센 노동강도와 육아·가사 부담 때문에 재판연구관에 아예 지원하지 않거나, 재판연구관에 발탁되더라도 고된 업무와 육아·가사라는 이중의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A판사의 말이다. “1.5인분을 요구하는 곳이라 가정생활을 포기한다는 각오로 지원해야 해요. 남성 법관들은 배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원을 하지만 여성 법관들은 그러기를 주저하죠. ‘내가 이 자리에 가면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예요. 엄마가 해야 될 몫이 너무 많고,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여성의 커리어 중 일부로 여겨지잖아요.” B판사는 “법관의 업무가 기본적으로 육아와 병행하기 어려운 구조로 돼 있다”며 “유능한 여성 판사이지만 대법원 재판연구관의 업무강도가 세기 때문에 육아를 한다는 이유로 지원을 못하는 경우를 봤다. 남성도 그런 경우가 있겠지만 보통 여성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이나 형사합의부 재판장과 같은 자리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C판사는 “요즘 남성 법관들이 육아에 많이 신경을 쓴다고는 하지만 여성 법관들은 정신적인 노동까지 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큰 부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며 “부장일 때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인데 학업적으로 엄마 입장에서 신경이 쓰이고 부담되는 게 많다”고 했다. 2018년 서울고법의 한 여성 판사가 주말 야근을 한 뒤 자택에서 숨진 일이 있다. 고인은 여성 판사들의 인터넷 카페에 ‘예전엔 밤새는 것도 괜찮았는데 이제 새벽 3시가 넘어가면 몸이 힘들다. 이러다가 내가 쓰러지면 누가 날 발견할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글을 남겼다.

지난달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위해 착석해 있다. 한수빈 기자

지난달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위해 착석해 있다. 한수빈 기자

법관 증원은 판사 업무량 조정, 충실한 재판 구현에 관한 문제이자 ‘성평등 법원’이 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연구자료들을 보면 외국 법원들은 법관이 성별로 평등하게 구성될 뿐 아니라 장시간 노동 제한, 장거리 이동 근무시 가족 상황 고려 등 일과 생활의 균형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정책을 편다.

‘여성은 힘든 일을 꺼릴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보직 배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있다. D판사는 “처음에 여성 법관이 형사합의부 배석으로 가지 못하면 그 후부터는 그 자리에 안 가봤다는 이유로 계속 배치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여성 법관은 힘든 자리를 꺼린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물어보지도 않고 특정 업무에서 배제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E판사는 “여성 법관과 일을 해봤더니 육아와 일의 양립을 잘 못하더라는 평가를 한다거나, 여성 법관에게는 일을 함부로 시키기 어렵고 눈치가 보인다는 점을 들어 여성 법관을 안 뽑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F판사가 말했다. “사실은 유리천장이 아니라 강철천장이 있는 것이죠. 개인이 화살을 쏴도 잘 깨지지 않는 강철천장이요. 옛날에는 여성 판사가 배석이면 부장님들이 ‘합의할 때 문을 열어놓고 하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합의는 밖에서 못 듣게 문을 닫고 해야 하는 건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의심받을 수 있으니 문을 열어놓아야 된다는 거예요. 같은 인간으로 봐야 하는데 여성이라는 성이 먼저 보이는거죠. 여성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여성은 가정을 먼저 챙겨야 하고 일터에서 중요한 일은 남성들이 하겠다는 고정관념도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아요. 좀더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역할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보수·관료제적 문화 속 소외되는 여성

각급 법원의 법원장이 매기는 ‘평정’이 여성 판사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말도 나왔다. 법원조직법은 사건 처리율·처리기간·상소율·파기율 등을 고려해 법관의 근무성적 평정을 매기고, 성실성·청렴성·친절성 등을 토대로 자질을 평가하라고 규정한다. 여기에 더해 법원장이 개별 법관을 주관적으로 판단하게 돼 있다.

여성 판사들 사이에서는 평정 결과를 불신하는 기류가 있다. 평정에 관여하는 법원장과 수석부장판사는 대부분 남성이다. 이들과 접점이 많은 남성 법관들이 좋은 평정을 받는 데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의심하는 것이다. G판사는 “누군가는 A를 줘야 하고, 누군가는 C를 줘야 하는 상황인데 회식이나 행사에서 자꾸 얼굴에 보인 사람이냐, 일과는 열심히 하지만 그 외에는 아이를 봐야 된다며 안 보이는 사람이냐고 하면 법원장 입장에서는 전자를 더 챙긴다는 것”이라고 했다. H판사는 “술자리를 안 빼고 윗분들에게 잘 하고 분위기를 잘 맞추는 분들이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한다. 남성들은 사회생활이라는 이유로 그런 자리에 나가지만 양육 부담이 큰 여성들은 배제될 수 있다”며 “이런 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평정에 반영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출산·육아휴직을 사용한 경우 근무평정을 높게 받기 어렵기 때문에 해외연수와 같은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의견도 있다. 한 판사는 “출산휴가를 가면 당연히 열심히 일한 사람보다 성적이 나쁠 수밖에 없다거나, 출산휴가를 쓰면 C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고 했다.

[이토록 XY한 대법원]“유리천장 아니라 강철천장”···보이지 않지만 차별은 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취임 이후 대법관 다양화를 강조하고 여성 대법관 4명 시대를 열었지만 여성 대법관을 고깝게 여기는 시선은 여전히 있다. 여성 대법관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고, 하급심 판사들이 여성 대법관 판결을 수용하는 정도도 남성 대법관과 다르다는 게 판사들의 말이다. 대법원에서 최근 여성 대법관 주도하에 성범죄 가해자에 대해 엄격한 판단을 내놓자 일부 남성 법관들이 반발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 한 판사는 “다른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여성 대법관이 한 성범죄 판결에 대해 반발하는 것을 보고 여성이 아직도 열악한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여성 대법관이 왜 이렇게 적으냐는 질문에 흔히 법조인들은 “인재 풀이 없다”고 한다. 대법관 후보에 오르려면 일단 당사자가 후보 심사에 동의해야 하는데, 여성 법조인들은 동의를 안 한다는 것이다. 여성 대법관에 대한 보수적인 분위기가 심사 동의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라는 분석이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여성들이 커리어를 키우거나 무엇인가를 주도한 경험,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에 비해 고위직으로 가려는 욕구가 적은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가족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남성의 경우 그냥 심사에 동의하겠지만 여성은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 포기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여성도 남성과 비슷하게 고위직 진출에 대한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발현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이 문제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오히려 ‘여성 법관 35% 시대’에 접어들면서 성차별을 문제제기하기 어려워졌다는 시각도 있다. 과거처럼 차별이 노골적이지 않다거나, ‘여성이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지적을 받을 것이 우려돼 그냥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한 판사는 “육아휴직이나 단축근무 같은 제도가 많이 생겼고, 출산에 대한 불이익도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며 “외관만 보면 차별이 없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니 여성 법관의 권리를 어떤 식으로 더 보장해달라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다른 판사는 “신임 법관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며 “여성이 법원 내 소수니까 그에 대한 어드밴티지(이점)를 달라는 말을 하기는 부담스러운 분위기”라고 했다.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이토록 XY한 대법원]의 XY는 남성의 성염색체를 말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 탄생한 지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대법원은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대법관 다양화와 관련한 더 많은 기사를 읽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로 들어오세요.
링크: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s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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