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대법관 주심 ‘성인지 감수성’ 판결 3697회 인용됐다

2023.10.27 06:00 입력 2023.10.27 06:49 수정

④여성 대법관 왜 필요한가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

형사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처음 언급한 대법원 판례가 5년간 하급심 판결에서 총 3697회 인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판결의 주심은 여성인 박정화 전 대법관이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여성 대법관이 주도해 내놓은 선진적인 젠더 판례가 3000명 넘는 시민의 삶에 영향을 줬다는 뜻이다.

이처럼 여성 대법관들이 만들어낸 의미있는 대법원 판례는 하급심 법원의 판단 기준으로 활용되며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한 여성 대법관이 세운 판례는 다른 여성 대법관에 의해 심화하고 확장됐다. 여성 대법관이 두 명이던 시절 남긴 소수의견은 이후 여성 대법관이 네 명인 대법원에서 다수의견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26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대법관들의 주요 판결을 분석했다.

3697개 사건의 기준이 된 한 판결

2018년 대법원에 한 사건이 올라왔다. 강간과 폭행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 박모씨가 1심에서 무죄를 받자 피해자와 피해자 남편이 억울하다며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다. 2017년 한 모텔에서 피해자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과 자녀들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협박해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씨는 1·2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당시 1·2심 법원은 모텔 주차장 폐쇄회로(CC)TV 영상에 찍힌 피해자의 모습이 “강간 피해자 모습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자연스럽다” 등 이유를 들어 피해자의 진술을 배척했다. 또 “박씨가 피해자를 폭행·협박했고 이로 인해 피해자가 항거가 불가능하게 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돼 간음에 이른 것인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박정화 당시 대법관이 이 사건 주심을 맡았다. 그는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판결”이라며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박 대법관은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개인의 성정이나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개별적·구체적 사건에서 성폭행 등 피해자가 처해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해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법원이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다움’이란 통념, 즉 ‘진정한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러했을 것’이란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성인지 감수성’이란 용어를 형사사건 판결에 원용한 첫 대법원 판결로 꼽힌다. 강간죄에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한 최초의 사례다. 박 전 대법관은 판결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성폭력 전반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했는데, 이에 따라 적용 범위가 넓어졌다는 평가받는다.

경향신문이 판결문 검색시스템을 통해 확인한 결과 이 판결이 선고된 2018년 10월 이후 2023년 10월까지 하급심 판결문 총 3697건이 이 판결을 인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매년 700건이 넘는 사건에서 박 전 대법관 판결이 판단 기준이 된 것이다. 법원이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박 전 대법관의 판결이 확실한 선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 성폭행 사건, 곰탕집 성추행 사건 등 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건에서도 박 전 대법관 판결이 주요 판단 기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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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박정화→노정희…확장하는 젠더판례

박 전 대법관의 ‘성인지 감수성’ 판결의 토대를 놓은 것은 김영란 전 대법관의 판결이었다. 첫 여성 대법관인 김 전 대법관은 ‘진정한 피해자’라는 통념에 제동을 건 판결을 2005년 처음 내놨다. 노래방 강간사건 주심을 맡았을 때였다.

이 사건은 피고인이 운영하던 노래방에 속칭 ‘도우미’ 여성을 불러 힘으로 제압하고 강간한 일이었다. 당시 피해 여성은 “사람 살려” 소리를 지르는 등 반항했는데도 1·2심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이 방 밖에 나갔을 때도 피해자가 방에 머물러 있었고, 피해자를 때리거나 협박한 사실이 없고,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는 강간죄 성립요건인 폭행과 협박을 가장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이른바 ‘최협의설’에 따른 전형적 판단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저항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거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행사한 것이 입증될 때만 강간죄 성립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최협의설은 좁디좁은 ‘진정한 피해자’ 상을 상정하고, 이를 조금이라도 빗겨나는 숱한 피해자를 법의 보호 밖으로 내몬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김 전 대법관은 경직된 기존 판례를 따르는 대신 새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는 모든 사정을 종합해 피해자가 당시 처했던 구체적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사후적으로 보아 피해자가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해선 안 된다”고 했다.

판사들에게 기계적 판단을 내리지 말고 ‘피해자다움’이라는 통념을 배제하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최초로 제시한 것이다. 이 판결은 성범죄 심리에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를 선구적으로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5년 선고 이후 현재까지 하급심에서 참조 판결로 921차례 인용되기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퇴임 후 2011년 한 강연에서 당시 젠더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재판에 임했으며, 특히 비판을 받아 온 최협의설을 바꿀 수 없을지 고민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전원합의체를 통해 판례를 변경하는 방법도 고려했지만 ‘항거의 현저한 곤란’을 유연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우회로를 택했다고 했다. 최협의설을 폐기하는 일보다 판사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 전 대법관이 남긴 과제는 2023년 노정희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사건에서 매듭지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9월 강제추행죄의 수단이 되는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일 것을 요구하는 종래의 판례 법리(최협의설)를 폐기했다. 그러면서 판단 기준의 초점을 ‘피해자의 상태’에서 ‘가해자의 행위’로 옮겨놓았다.

노 대법관은 한발 더 나아간 의견을 남겼다. 그는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해석할 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본질이 ‘동의 부재’에 있다는 점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보충의견을 남겼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내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내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성 대법관 소수의견이 남긴 ‘씨앗’들

성범죄가 아닌 사건에서도 여성 대법관들은 눈에 띄는 목소리를 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제사주재자 결정 방법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반대의견을 냈다. 당시 대법원은 ‘공동상속인들끼리 협의해 제사주재자를 정하라’는 새 기준을 제시하면서 장남이 아닌 차남과 딸도 제사를 주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다만 상속인들끼리 합의하지 못하는 경우 장남 또는 장손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했다. 김 전 대법관은 이때 “다수의견은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부계혈족 중심의 가계 계승을 이유로 종래의 관습 및 판례법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있다”며 “장남이 아닌 다른 아들들이나 딸들도 엄연히 부계혈족이란 점을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보충의견을 남겼다.

김 전 대법관이 남긴 소수의견은 15년이 지난 202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다수의견이 됐다. 대법원은 지난 5월 2008년 대법원 판례를 깨고 ‘제사주자재를 정할 때 상속인 간 협의가 되지 않으면 직계비속 가운데 최연장자가 맡는다’는 새 기준을 제시했다. 아들이냐 딸이냐, 적자냐 서자냐를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김 전 대법관의 소수의견이 새 판례의 씨앗이 된 셈이다.

이 판결에서도 민유숙·노정희 두 여성 대법관은 별개의견으로 목소리를 더했다. 유교적 가부장제에 뿌리를 둔 제사관습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지적하면서 사회가 나아갈 길을 또 한 번 제시했다. 이들 대법관은 “다수의견은 종래 남성 위주던 제사주재자 결정 방법이 헌법상 평등원칙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경하면서, 전통과의 조화를 명목으로 연장자 기준에 따르는 것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며 “연장자가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 역시 부계혈족 중심의 가계 계승 잔재에 불과하다”고 했다.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이토록 XY한 대법원]의 XY는 남성의 성염색체를 말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 탄생한 지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대법원은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대법관 다양화와 관련한 더 많은 기사를 읽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로 들어오세요.
링크: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s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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