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경험에서 더 나은 판결이 나온다

2023.10.27 06:00 입력 2023.10.27 08:47 수정

④여성 대법관 왜 필요한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대법정과  로비. 대법관 퇴임식을 위해  미리 행사장을 준비해  놓은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대법정과 로비. 대법관 퇴임식을 위해 미리 행사장을 준비해 놓은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법관 다양화가 필요한 이유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특성을 가진 법관이 사건 심리에 관여할 때 꼭 그 집단을 옹호하는 판단을 내놓기 때문만은 아니다. 법조인들은 다양한 특성과 경험을 가진 법관이 사건을 심리할 때 더 세밀하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다.

법원 안팎에는 성범죄 사건 심리에 여성 법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있다. 지난해 기준 강간 피해자의 97.1%, 강제추행 피해자의 89.5%가 여성이지만 남성적 시선에 기반한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은 제대로 된 실체적 진실 규명과 책임 추궁을 방해해왔다.

한 판사 출신 여성 변호사는 “여성 피해자가 성폭력 상황에 처했을 때 얼어붙어서 도망도 못 가겠다는 느낌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 부장판사를 봤다”며 “‘빨리 도망치거나 신고하면 되지, 왜 저항을 안 했다가 지금 와서 싫었다고 말하는지 이상하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술집에 다니는 여성에 대한 편견도 심하다”며 “여성들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강간죄에 있어서 더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남성 판사들은 ‘술집은 원래 돈 내고 그러라고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성 법관들이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고,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는 시각을 제시할 때 명료한 실체 규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범죄 재판 경험이 있는 한 여성 판사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남성 판사들에게 여성 판사가 말을 하면 그때서야 파악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지적을 해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다른 판사는 “인간이 간접 경험을 통해 여러 지식을 쌓고, 대화하고, 책을 보며 배우는 것도 있지만 경험한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다”면서 “여성 판사는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을 벗어나는 게 자연스럽지만 남성 판사는 학습해서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여러 가치관 부딪치고 조율되며 ‘다수의 편향’ 점점 벗어나는 것”

법관 다양화 필요성은 성범죄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법원에서 다루는 여러 분쟁들이 젠더와 관련되어 있고, 그 영역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성희롱·성차별이 쟁점인 민사·행정사건, 이혼·재산 분할·상속·양육자 지정과 같은 가사사건도 있다. 법관들은 고부 갈등이 얽힌 사건을 심리할 때 여성 법관과 남성 법관의 인식 차이가 크다고 말한다. 한 판사는 “가사사건에서 아이를 주 양육자로 키워봤는지 아닌지에 따라서도 시각 차이가 크다”며 “이혼이나 양육 등은 어떤 사람에게 닥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가사사건과 여성 법관의 중요성은 더 인정돼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법원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 사건들이 온다”며 “당연히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지만 어느 순간 개인의 가치관과 경험이 스며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법원에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이어 “1·2·3심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부딪히고 조율되면서 어떤 것이 이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올바른 기준인지가 도출돼야 하는 것”이라며 “너무 획일적인 사람들만 들어오면 특정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만 대변되게 되고, 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결론인지에 대해 법원도 자신감을 잃게 된다”고 했다.

한 판사는 “사람들이 AI(인공지능) 판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법전엔 추상적인 개념들로 가득차 있다”면서 “그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는 법관이 하는 법 해석에 좌우되는데, 여성으로서의 삶은 여성밖에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여성 법관이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위해 착석해 있다. 한수빈 기자

지난달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를 위해 착석해 있다. 한수빈 기자

개별 사건에 대한 재판을 넘어 법 해석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대법원은 더욱 사회의 다원성을 반영해야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논문에서 “사회의 다원성이 최고법원 구성에 반영돼야 사회에 존재하는 다원적 견해와 가치관이 재판과정에서 녹아들면서 경쟁하고 재판에서 오류나 독단이나 편견이 극복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재판의 질도 그만큼 높아질 수 있다”고 했다. 한 판사는 “다양한 판사가 확보될 때 판결을 받아들이는 피고인이나 피해자 입장에서도 더 공정한 판결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일각에선 편향성 논란을 제기한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가 쓴 ‘차별사건에서 소수자 법관에 대한 중립성 논쟁 검토’ 논문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1964년 인종·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제정된 이후 제기된 차별소송에서 여성이나 흑인 판사가 사건을 담당했다는 이유로 법관의 중립성을 의심하며 기피 신청을 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판사가 자신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건 당사자에게 기운 관점을 가지고 우호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소수자 법관의 편향을 우려하는 문제제기는 역설적으로 다수 중심의 관점에서 중립성을 판단하는 편향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차별사건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차별의 다양한 발생 양태에 관한 지식, 차별을 파악하는 민감성과 세밀함, 불평등한 권력 구조와 작동기제에 대한 이해, 피해자 관점에서 차별 피해의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 등이 필요하다”며 “법관의 소수자 정체성과 차별 경험은 편향성이 아니라 오히려 차별사건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전문성이 된다”고 했다. 이어 “차별사건에서 공정한 재판을 위해 법원이 다수자 중심의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며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법관을 확보하고 이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의견을 나누도록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이토록 XY한 대법원]의 XY는 남성의 성염색체를 말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 탄생한 지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대법원은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대법관 다양화와 관련한 더 많은 기사를 읽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로 들어오세요.
링크: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s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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