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백일장 대입 스펙 비리

2014.11.21 22:40 입력 2014.11.24 00:11 수정
김여란 기자

▲ “등단 작가한테 과외받으면 글을 대신 써주기도 하는데,
그걸로 백일장 제시어에 맞추면 3등 안에는 든다”
- 문예창작과 학생의 고백

“문학특기자로 대학 가기엔 백일장 수상 실적이 적었다. 문인이 운영하는 문예학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아봤는데, 수업 방식은 특별할 게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정 안되면 저희가 써준 걸 외워서 내면 된다’고 했다.”

고등학생 ㄱ양의 말처럼 기성 문인에게 ‘백일장·공모전 당선용’ 글을 살 수 있다는 건 문예창작학과(문창과) 입시를 겪은 학생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다. 21일 경향신문이 문창과 대학생과 문인들을 취재한 결과, 고등학생들이 등단한 문인에게 교습을 받으면서 써준 글을 백일장·공모전에 내거나, 시험장에 문인 출신 학원 강사가 동행하는 등 부정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교생 백일장 대입 스펙 비리

백일장 부정은 입시 비리로 이어진다. 한 해 60개 이상 열리는 전국 백일장에서 수상하면, 실적에 따라 경희대·동국대·명지대 등 전국 20여개 대학이 운영하는 문학특기자 전형에 지원할 수 있다. 문학 관련 학과가 아니라도, 수시 입학사정관제(현 학생부종합전형)에서 교외 수상실적이 인정됐던 작년까지 백일장은 쏠쏠한 대입 스펙이었다. 학원들은 “글만 잘 쓰면 인서울은 기본”이라는 식으로 광고하며 백일장, 문예특기자 전형을 대입의 도구로 내놓기도 한다. 지난 10월에는 교사가 써준 시로 백일장 금상을 받는 등 허위 실적으로 명문대 입학사정관제에 합격한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경찰에 적발됐다.

일부 과외·학원을 통한 문인들의 작품 거래와 백일장 부정은 문창과 입시를 겪은 이들이라면 모르기가 더 어렵다. 서울의 한 대학 문창과 학생 ㄴ씨는 “고등학교 때 주위에 모 시인에게 과외받던 애들이 있었는데, 과외비에 돈을 더 얹어주면 시를 하나 써 준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애들은 목숨 걸고 백일장 다니는데 작가가 그러면 안되지 않나. 내가 작가가 되어서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ㄴ씨도 등단한 문인을 소개받아 문학 과외를 받으려 한 적 있었지만, 한 달 2번 교습에 60만원이라는 교습비가 비싸 포기했다.

다른 학교 문창과생 ㄷ씨도 “등단한 작가한테 과외받으면 글을 대신 써주기도 하는데, 그걸로 백일장 제시어에 맞추면 얼추 3등 안에는 든다고 했다. 백일장에 많이 나가는 애들이 만나면 하는 얘기가 그런 얘기”라고 말했다. ㄷ씨가 나온 고등학교에서는 백일장과 공모전에 몇 차례 당선됐던 재학생의 글이 어느 시인이 써준 것으로 드러나 문제가 된 적이 있다. ㄷ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계에서 더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걸 봤다. 저도 문학이 아니라 입시에만 관심 있었다면 돈 주고 작품을 샀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학 문창과생 ㄹ씨도 “고등학교 때 한 학생이 백일장에서 당선됐는데 문인이 대신 써준 게 발각됐다는 이야기를 선생님에게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직접 대필이 아니라도 문인 출신 학원 강사들은 여러 방식으로 백일장 부정을 돕는다. 호남의 한 대학 국문과생 ㅁ씨는 “문창과 입시로 유명한 학원에서는 보통 상을 받는 시의 패턴을 만들어 주고, 시제에 따라 거기서 단어만 바꾸게 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ㄴ씨는 “어느 백일장에서 학원 강사인 문인이 돌아다니면서 자기 학생들의 글을 봐주는 걸 봤다. 시제가 나오면 자기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어떻게 써야 하느냐고 묻는 애들도 있다”고 말했다.

문학으로 장사하는 일부 문인들의 행태는 문단에서도 ‘모두 알지만 말하지 않는 비밀’이다. 별다른 해결책도 없다. 한 시인은 “문학이 축소되면서 생계가 절박해진 문인 중 소수가 재능 장사에 나서는 것”이라며 “공개된 장에서 문학을 가르칠 수는 있지만, 일대일로 수업하는 건 실질적인 결과물을 갖고 거래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쉬운 구조라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소설가는 “그렇게 문학을 배운 학생들이 도덕적이고 좋은 문인이 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백일장 운영 단체와 대학 측에서도 골머리를 앓는다. 청소년문학상을 운영하는 대산문화재단은 1차 합격자를 대상으로 2박3일 캠프를 열어 검증 절차를 거친다. 대필·표절을 가려내는 데만 예산 1억원 이상이 드는 만큼, 다른 백일장들이 대산문화재단만 한 검증 절차를 갖추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재단 측은 “캠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본인이 쓴 글이 아니라는 게 종종 드러난다. 글쓰기와 문학이 입시 도구가 되다 보니 글쓴이를 믿지 못하게 된 현실이 괴롭다”고 말했다. 동국대도 문예특기자 선발 시 본 대학 주최 백일장을 포함한 모든 백일장을 주요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면접이나 자체 실기에 중점을 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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