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이대로 괜찮나(상)

변별력 명분, 억지로 문제 꼬아서 내…현 체제선 ‘생명과학Ⅱ 20번’ 되풀이

2021.12.20 21:00 입력 2021.12.20 21:06 수정

[수능, 이대로 괜찮나(상)]변별력 명분, 억지로 문제 꼬아서 내…현 체제선 ‘생명과학Ⅱ 20번’ 되풀이

지난 15일 법원이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의 오류가 인정된다며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정답 결정을 취소했다. 해당 문항이 전원 정답 처리되면서, 생명과학Ⅱ 표준점수 최고점이 ‘1점’ 하락했다. 응시생들은 해당 과목을 선택한 것만으로 다른 과학탐구 과목을 선택한 수험생들에 비해 손해를 보게 됐고, 1~2등급을 받았던 응시생 가운데 100명이 넘는 학생들의 등급이 하락했다. 수능 출제를 주관했던 평가원 원장은 취임 10개월 만에 물러났다.

50만명에 달하는 수험생의 입시를 판단할 중요한 시험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한 문제의 파장은 너무도 컸다. 2점짜리 문항 하나에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은 한국에서 수능 점수가 상위권 대학·학과 진학의 가장 강력하고, 사실상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같은 등급을 받았더라도 표준점수 ‘1점’ 차에 당락이 결정되는 경합이다 보니, 수능의 가치는 고교 교육과정의 충실한 이수나 대학에서의 수학 역량 점검 같은 교육적 목표를 한참 넘어서 오직 ‘변별력’ 하나로 집중됐다.

상대평가 과목인 국어와 수학에는 이상적인 등급 비율이 존재한다. 1등급은 과목 응시생의 4%, 2등급은 7%, 3등급은 11% 안팎이다. 이번 수능에서 국어 1등급을 받은 학생은 1만7914명으로 국어 응시생 44만6580명의 4.01%였다. 수학은 42만9799명이 응시해 4.2%인 1만8031명이 1등급을 받았다.

지난 2월까지 평가원장으로 지내며 4차례 수능 출제에 관여한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는 “초고난도 문제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현재 수능 체제 안에서는 상위권 변별력을 갖추기 위해 이런 문제를 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수능 문항이 어려워지면 상위 등급 비율은 적어지고, 쉬워지면 비율이 늘어난다. 변별력을 확보하려다 보니 교과 내 다양한 성취기준을 여러 개 복합적으로 연계하면서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열에 아홉은 ‘찍는’ 킬러문항
“입시·사교육 경쟁만 불붙여”
수포자 만드는 수학이 대표적
확률과통계 30번 오답률 97%
“초고난도 문제 교육과정 위반”

여기에는 수능이 국가 주관·전국 단위로 치러지는 유일한 학력 평가라는 태생적 한계도 자리한다. 2022학년도 수능에는 재학생과 재수생을 포함, 총 50만9821명이 응시했다. 대학이 요구하는 국·수·영 과목별 최저등급을 충족시키는 수시전형에서도 치열하지만, 표준점수로 집단 내 수험생의 ‘순위’을 가늠하는 정시전형에서는 말 그대로 1점이 당락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치열한 경쟁구도가 형성되는 구조에서 최상위권과 상위권, 중위권과 하위권이 단 한 번, 공통된 문제를 풀어 순위를 매기다 보니 열에 아홉이 넘는 수험생들이 대부분 찍고 넘어가는 초고난도 문제들이 시험지에 오른다. 약 50만명을 점수순으로 줄세워도 문제가 없을 수준으로 문항을 설계하는 구조다 보니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매년 수능이 끝나고 초고난도 문항이 고교 교육과정을 벗어났는지 아닌지 설전이 이어지는 배경이다. 김상우 수학교육혁신센터 연구원은 “일반적인학생들이 학교에서 정상적으로 열심히 수업을 받았다고 해서 절대 풀 수 없는 문제들”이라고 했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 양성소로 악명이 높은 수학 과목이 대표적이다. 입시 관련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2022학년도 수능 수학영역 문항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공통영역과 선택영역 총 46문항 가운데 약 20%인 9문항이 고교 교육과정을 벗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공통문항에서 3개, 선택과목인 확률과통계 2문항, 미적분 3문항, 기하 1문항 등이었다. 이들 9문항의 오답률을 분석한 결과는 놀라웠다. 9문항 가운데 4문항의 오답률이 95%를 넘었고, 선택과목인 확률과통계 30번 문항의 오답률은 97%에 달했다. 100명 가운데 겨우 3명만 정답을 찾았다는 얘기다.

김상우 연구원은 “현재 수능은 ‘아 내가 공부를 안 해서 틀렸구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같은 수용보다는 ‘아무리 해도 안 되겠다’는 포기를 강요한다”면서 “학교에 가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고, 입시와 사교육으로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경쟁에만 불이 붙는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교육과정을 벗어난 초고난도 문제 지적이 잇따르면서 최근에는 아예 배우지 않아 풀 수 없는 문제보다는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꼬아 시간이 걸리게 만들면서 수험생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문항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외국인의 ‘한국 수능 견문’은 늘 화제다. 가장 가깝게는, 집단유전학 분야 석학인 조너선 프리처드 스탠퍼드대 석좌교수는 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을 두고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출제된다는 것이 놀랍고 인상적”이라는 트윗을 남겨 화제가 됐다. 수능 지문에 등장한 시를 쓴 시인이 해당 시의 내용을 풀이하는 문항에서 오답을 내는가 하면, 국내에서 활동 중인 미국 출신 유명 방송인이 수능 영어 문항을 틀리는 모습이 방송에 등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수능에서는 이런 초고난도 문제는 2개만 출제되면서 수능의 과도한 변별력 집중이 다소 해소됐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실시된 두 차례 모의평가와 11월 수능을 분석한 결과 다시 변별력 확보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초고난도 문항을 줄이기 위한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9학년도 수능의 일부 문항이 고교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을 벗어났다며 2019년에 국가 대상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됐다. 하지만 법원은 수능의 경우 국가가 출제하는 입학전형이라는 이유로 선행교육 규제 대상이 아니라며 기각, 법 개정을 통해 해법을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앞서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민정 의원(열린민주당)은 지난 9월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수능에서 고교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을 벗어난 내용을 출제할 수 없도록 명시하고, 교육부 장관은 수능이 선행학습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사전영향평가를 실시해 시험에 반영하는 내용 등을 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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