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기획 - 한국사회의 민낯 ‘세월호’

2008년 숭례문·2014년 세월호… 현장 컨트롤타워 없었다

2014.05.12 21:55 입력 2014.05.12 22:43 수정

(2) 작동 않은 재난 대응 체계

2008년 2월10일 오후 8시48분. 대한민국 국보 1호인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정확한 발화지점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문화재 훼손이 우려되자 오후 8시59분 문화재청에 문의했다. 40여분이 지나서야 문화재청의 한 사무관이 “화재 진압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불과 1분 만에 뒤집어졌다. 문화재청 한 과장은 “숭례문이 손상돼도 상관없으니 진화만 해달라”고 정반대의 요청을 했다. 이어 3분 뒤 문화재청의 국장급 고위간부는 “불길이 번지지 않으면 파괴하지 말고, 계속 번질 것 같으면 그때 파괴하라”는 애매한 의견을 냈다.

당일 오후 11시27분. 화재현장 지휘를 책임졌던 서울시소방재난본부가 “2층 기와를 걷어낸 뒤 상부를 파괴해서 진화하라”는 조치를 내렸지만 이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황이었다. 2층에서 작업하던 소방관들도 철수한 상태였다. 뒤늦게 대형 크레인을 불렀지만 장비가 도착하기 전인 11일 0시40분 숭례문은 힘없이 내려앉고 말았다.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이 진화 방법을 놓고 허둥대는 사이에 국보 1호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특히 엇갈린 입장을 내놨던 문화재청 간부 세 명은 모두 화재 초기 현장에 없었다. 숭례문 화재 이후 재난현장 컨트롤타워의 중요성이 부각됐지만 정부나 지자체 모두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후 5년이 지났지만 현장 컨트롤타워 부재 문제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구조·수색 과정에서 똑같이 반복됐다.

2008년 2월11일 새벽 숭례문이 화재로 붕괴된 이후 소방관들이 고가사다리차를 이용해 막바지 진화를 하고 있다(위쪽 사진). 지난달 16일 침몰한 세월호 조타실에서 선원들이 해양경찰의 안내를 받아 탈출하고 있다. 두 참사는 시간과 공간이 달랐지만 현장 컨트롤타워 부재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숭례문 화재 때는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이 진화 방법을 두고 허둥댔으며, 이번 세월호 참사 때도 지휘체계의 혼선으로 초동 대응과 이후 수색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연합뉴스

2008년 2월11일 새벽 숭례문이 화재로 붕괴된 이후 소방관들이 고가사다리차를 이용해 막바지 진화를 하고 있다(위쪽 사진). 지난달 16일 침몰한 세월호 조타실에서 선원들이 해양경찰의 안내를 받아 탈출하고 있다. 두 참사는 시간과 공간이 달랐지만 현장 컨트롤타워 부재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숭례문 화재 때는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이 진화 방법을 두고 허둥댔으며, 이번 세월호 참사 때도 지휘체계의 혼선으로 초동 대응과 이후 수색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연합뉴스

▲ 문화재·화재 진압 우왕좌왕
소방당국 불 못 끄자 보고 문화재청 40분 뒤 “신중해야”
2시간50분 뒤엔 “상부 파괴”

▲ 총괄적 지휘 체제 없어
해경, 신고 접수 30분 뒤 도착… 침몰 현장 정보 전혀 몰라
적극 구조 않고 선원만 구해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9분. 476명이 탑승한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구조를 먼저 요청한 것은 승객이었다. 오전 9시30분. 해경 헬기와 함정이 세월호에 접근했지만 침몰 상태와 승객 상황 등에 대한 어떤 정보도 확보하지 못했다. 특히 해경은 세월호에 들어가 승객들에게 탈출하도록 안내(방송)하지 않았다. 깨진 창문으로 세월호 안만 쳐다보는 일까지 벌어졌다. 승객들에게 선실 내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수차례 요구한 선장과 선원들은 자신들만 해경 함정을 이용해 탈출했다.

세월호는 과적 등으로 급속히 침몰했다. 이 때문에 구조현장에서는 기존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세월호 침몰만 지켜봤다.

실제 세월호 침몰 당일 해양 전문가들은 다양한 구조책을 쏟아냈다. 부산 해양대 졸업생들은 카카오톡을 통해 세월호에 쇠줄을 걸어 양쪽에서 선박들이 당기는 방안 등을 해양수산부 등에 요청했다.

그러나 정부는 “다른 부서에 연락을 취하라”면서 외면했다. 이후 구난·수색 과정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사고 첫날부터 기상 악화나 잠수 준비시간 단축을 위해 해상에 바지선을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지만, 이는 사고 발생 나흘째인 4월19일에야 겨우 실행됐다. 18일 새벽부터 시신 유실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그물은 19일 오후에야 설치됐다.

정부는 사고 발생 이후 “범정부 차원의 대책본부를 안전행정부 장관이 맡도록 돼 있지만, 이번 사고는 그 중대성을 감안해 정홍원 총리가 대책본부를 직접 이끌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 발생 순간부터 이후 구조와 수색까지 현장 지휘부는 ‘부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백민호 강원대 교수(재난관리공학)는 “그나마 육지 소방관들은 사고현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현장 정보를 획득하고 대응 방법을 찾지만, 이번 세월호에선 그런 과정조차 전혀 없었다”면서 “총괄적인 지휘통제체계의 부재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이어 “해경이 1차적인 구조와 수색을 하지만, 이를 현장에서 잘 이행하도록 돕는 전문가 집단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동규 동아대 교수(정책학)는 “전문 다이버 같은 구조·수색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 동원 준비가 전혀 안됐다”면서 “현장 지휘소가 있기는 했지만, 실무책임자가 권한을 가지고 전체적인 컨트롤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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