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의 시한까지 연장했는데 ‘ILO 협약 비준’ 왜 어렵나

2019.04.01 21:53 입력 2019.04.01 21:55 수정

‘결사의 자유’ 두 가지 협약…70년 전에 쓴 간략한 문장

국내 노동법 현실과 괴리

노사는 첨예한 대립 계속

<b>특수고용노동자 투쟁 선포</b> 1일 서울 청와대 앞에서 ‘특수고용노동자 2019 투쟁선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기본권과 노동조합 설립 보장을 촉구하며 ILO 기본협약 비준을 요구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특수고용노동자 투쟁 선포 1일 서울 청와대 앞에서 ‘특수고용노동자 2019 투쟁선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기본권과 노동조합 설립 보장을 촉구하며 ILO 기본협약 비준을 요구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과 관련해 진통을 겪고 있다. 70년 된 협약의 비준을 놓고 산 넘어 산의 연속이다. 당초 지난달 하순으로 정했던 협의시한은 노사의 입장차로 내달 초까지 연장됐다. “20세기 수준의 협약은 비준해야 한다”는 노동계 입장에 경영계가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맞서면서 교착 국면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1일 노동계와 경영계의 말을 종합하면, 첨예한 쟁점으로 인해 논의가 복잡해졌지만 실상 ILO 기본협약의 내용은 간단하다. ILO는 약 200개 협약 중 노사가 동의할 수 있는 8가지를 기본협약으로 정하고 1998년부터 가입국이 이를 비준하도록 했다. 아동노동·강제노동 금지 등 인권 보호 차원의 협약이 기본협약으로 분류된다. 한국은 1991년 ILO에 가입한 후 8개 중 절반인 4개 협약만 비준했다.

이번에 경사노위가 노사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협약은 결사의 자유와 관련된 2가지 협약이다. 두 협약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8년과 1949년 각각 제정됐다.

1948년 제정된 87호 협약은 “노동자나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스스로 단체를 설립할 수 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98호 협약도 노조원 차별을 막고, 노사 간 협상으로 고용조건을 정할 것을 권고하는 정도다. 기본협약인 만큼 ILO의 약 190개 회원국 중 두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국가는 약 20개국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중에서는 미국과 한국만이 비준하지 않았다.

노동3권을 보장하는 헌법 수준의 내용을 왜 비준하지 못할까. 헌법의 ‘이상’이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87호 협약은 ‘자유로운 노조 설립’을 천명하고 있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노조 설립 시 행정관청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더 나아가 행정관청은 보완을 요구하거나 신고 자체를 반려할 수 있다. 또 협약의 취지와 달리 한국은 공무원·교원의 노조 가입을 제한하고 있다.

경사노위의 현재 협상은 헌법상 권리를 현실화하는 과정인 셈이다. 노사 양측 논의에 진전이 없자 경사노위 의제별위원회 공익위원들은 지난해 11월 합의안을 내놨다. ILO의 권고 취지에 맞게 해고자와 공무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단 노동자처럼 일하지만 자영업자로 취급되는 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 가입은 장기 과제로 분류하면서 사실상 제외됐다. 노동계가 “당연한 권리를 협상으로 풀어가야 하느냐”며 반발하는 이유다.당시만 해도 한 고비는 넘은 것으로 평가됐지만 2라운드 격인 쟁의권 협상에서 노사의 시각차는 극대화되고 있다.

여기에 경영계는 “한국적 노사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며 5가지 요구사항을 내놨다. 문제는 5가지 모두 ILO의 권고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영계는 파업 시 직장점거 금지를 주장하는데 ILO는 평화로운 수단, 사용자의 직장 출입 허용 등의 조건을 충족한다면 합법 파업으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 2년인 단협 유효기간을 3~4년까지 늘려달라는 경영계 요구 역시 “단협 유효기간에 3년간의 법령상 제한을 부과하는 것은 상당한 제한”이라는 ILO 권고에 비춰보면 적절치 않다. 쟁의행위 찬반투표 절차 보완 요구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럼에도 경사노위는 3가지 요구사항을 협상의제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노동계가 절대 불가를 선언한 ‘파업 시 대체근로 투입’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폐지’를 경영계가 고수하면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ILO는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근로자를 고용하는 것은 결사의 자유의 심각한 침해”라 보고 있다. 또 ILO는 “노조탄압 관행에 관한 의혹이 남아 있다면 정부가 철저히 조사하고 사실로 밝혀질 경우 처벌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부당노동행위가 빈발하지만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도 걸림돌이다. 한국 검찰의 부당노동행위 기소율은 9.5%로, 일반 형사사건 기소율인 45.7%를 크게 밑돈다.

ILO 협약 비준에 급할 것 없는 경영계가 불가능한 요구를 앞세우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판을 깨도 경영계 입장에서 손해볼 일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정부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6월로 예정된 ILO 100주년 총회에 초청을 받은 이상 결과물이 필요하다. 유럽연합(EU)은 한·EU 자유무역협정 체결 시 약속한 ILO 협약 비준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가 협상 교착 국면의 활로를 뚫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우려가 함께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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