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마지막 韓人](1)조선의용군 최 채翁

2001.10.07 20:20

-남북 모두버린 항일투쟁 ‘잊혀진 전사’-

세월은 흘러도 역사는 남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잊고 산다. 단지 과거라는 이유 때문에. 하지만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며 과거없는 현재는 없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이 점철된 우리 근대사는 말 그대로 격동기였다.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희망을 담은 삶을 일구기에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너무 심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이역땅에 발디뎠던 어린아이들은 이제 80대 노인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중국 만주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일생을 타국에서 보낸 이들도 있다. “다시 돌아오마” 하며 떠났던 강제징용의 발걸음이 영영 귀국길을 밟지 못한 이들도 있다. 망향의 세월속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었는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아픔은 바로 우리 역사다. 그들이 이대로 세월속에 묻히는 것은 역사의 단절이다. 겨레의 새 삶과 함께 출발하여 역사의 가파른 고비를 그들과 함께 넘은 경향신문. 창간 55주년을 맞이하여 그 시대를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속의 마지막 인물들’을 찾아 그들이 온몸으로 전하는 생생한 역사의 목소리를 시리즈로 전한다.

잊혀진 전사. 최채옹(87)은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가열차게 항일 무장투쟁을 한 조선의용군 출신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역사속엔 없다. 북에서는 권력투쟁의 패배자이고 남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에 편입돼 6·25전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남북한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조선의용군을 흔히 ‘잊혀진 전사(戰士)’로 부른다.

최옹의 고향은 황해도 신천. 현재 큰아들과 둘째딸이 사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에 산다. 창춘엔 지린성 주정부가 있지만 옌볜(延邊)에서 기차로 10시간 거리에 떨어져 조선족이 별로 없다. 그래서 최옹은 옌볜에 있는 친구를 자주 만나지 못한다.

최옹의 남동생과 여동생은 서울에서 산다. 여동생 최윤신씨(85)는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의 아들 박시창 장군의 부인으로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박유철(朴維哲)씨의 어머니다.

남동생 최윤경씨는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해방후 백범 김구와 함께 서울로 왔다. 하지만 최옹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하다 중국에 남았다. 형제는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조국독립이라는 같은 목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형은 의용군, 동생은 광복군 소속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형은 ‘중국공민(公民)’, 동생은 ‘서울시민’으로 엇갈린 삶을 살게 되었다.

최옹은 1921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부친 최중호(崔重鎬)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 인성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백범 김구와 같이 활동하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다.

“어머니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분이고, 아버지는 경신학교 교원으로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먼 진도…전라도 진도지요 아마. 거기에서 1년여를 보내다 나왔어요. 아버지는 또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10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에 수감됐지요. 아버지는 감옥 땅을 파고 파옥(탈출)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그때 제가 4살이었어요. 어머니는 행상을 하면서 우리 식구를 키우다 6살때 아버지가 은밀히 불러 식구 모두가 상하이로 건너왔습니다”

최옹은 80여년전 고향을 떠날 때 기억은 생생하지만 고향에 대한 인상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최옹에게는 중국의 항일운동터가 바로 고향일 정도로 중국 대륙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다.

최옹은 32년 상하이에서 반제동맹에 가입해 반일운동한 것을 시작으로 40년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대(후에 의용군으로 개칭)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했다.

그는 조선의용대 선전간사로 대외선전 활동과 조선의용대 기록영화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41년부터 태항산전투를 비롯, 크고작은 전투에 참여하고 정치공작활동을 전개했다.

“41년 겨울인가 조선의용군이 3개 무장공작대를 조직해 적 후방에서 활동을 하는데 왜놈들이 빗질하듯 토벌해 낮에는 땅굴에 들어가 숨고, 발에는 고름이 나면서 썩고, 다음날 왜놈이 또 토벌하고…왜놈의 사격에 옆에 뛰던 동료들은 죽고 말았지…”

최옹의 항일무장투쟁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고향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때를 놓쳤다. 그것도 운명이라면 기막힌 운명이었다.

최옹이 속한 부대는 태항산전투가 끝난 후 무정(武丁) 장군과 합류하기로 돼있었는데 무정 장군이 ‘너는 전선에서 더 단련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무정 장군을 따라 조선에 돌아갈 기회를 놓쳤다.

옌볜에서 정치공작대 활동을 하다 해방을 맞은 최옹은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들떴지만 ‘최채는 지역에 남아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다음 옌볜지역 조선인정치조직을 마치고 나중에 오라’는 김두봉(金枓奉) 주석(최옹은 김두봉을 주석 혹은 총대장으로 불렀다)의 편지를 받았다. 또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것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최옹이 속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팔로군과 함께 국민당 정부와 맞서 또다시 전쟁을 벌였다. 그는 내몽고 사막을 거쳐 하얼빈에 이르는 곳곳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다시 고향갈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한반도에 6·25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최옹은 “그때 동북만주의용군, 그러니까 팔로군 주덕회 사령관이 나보고 ‘여기서 남아 사업을 하라’고 해 만주연군정치부에 시찰조를 조직해 옌볜지역에서 활동하다보니 또 조선에 갈 기회를 놓쳤다”고 회상했다.

그후 최옹은 지린성정부 편역과 과장을 시작으로 옌볜일보 사장, 옌볜자치주부주장, 지린성정부 민족사무위원회주임 등을 지내며 아예 중국에서 터를 잡았다. 남북한 모두 조선의용군 출신을 외면했지만 중국만 이를 인정해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85년 지린성인민대표부부주임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해방후 잠깐 마무리 일을 하고 곧 고향에 간다고 했던 것이 벌써 50여년이 흘렀고, 결국 지금까지 고향인 황해도에 가보지 못했다.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옹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일성이 연안에서 나온 조선의용군 출신을 모두 타격(숙청)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간다고 환영하겠습니까. 그래서 지금껏 한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도 조선의용군은 처신을 잘 안해줍니다. 사실 훈장받을 일이나 사업을 한 것도 없고…바라지도 않습니다…이제 중국 공민인데…”

그는 자신이 중국 공민이라는 말을 두번이나 했다. 말끝을 흐리는 최옹은 그러면서도 한가지 바람이 있다고 했다.

“남북이 통일돼 강성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 다행히 남북관계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하니 반가워. 고향은 어릴때 기억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지…가야 친척도 없는데…그래도 죽기전에 통일이 되면 한번 가보고 싶어”

‘중국 공민’이라고 강조했지만 그는 그래도 한국인이었다.

<원희복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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