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60년, ‘우리 안의 미국’

2013.06.01 15:23 입력 2013.06.03 13:25 수정

2013년은 한·미동맹 60년이 되는 해다. 한·미동맹을 통해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 아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일궈냈다. 국가 개입에 의한 성장발전 전략을 사용한 경제부문을 제외하고 한국 사회는 ‘미국화’를 지향했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경제적으로도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미국 시스템과의 일체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 시스템의 유효성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소프트파워’의 영역에서는 어떨까. ‘영어’(언어), ‘개신교’(종교), ‘스타벅스’(문화) 등 미국을 상징하는 세 키워드를 통해 ‘우리 안의 미국’을 들여다보았다.

영어

‘아륀지’ 파문을 기억하는지.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장을 맡고 있던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이 그 주인공이다. “미국에 가서 오렌지를 달라고 하니 아무도 못 알아들어 ‘아륀지’라고 했더니 가져오더라.” 2008년 1월 30일 그가 새 정부의 영어교육 방향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월 수강료가 149만원인 서울 청담동의 한 유아 영어학원. 한국에서 영어는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의 표지다. / 김문석 기자

월 수강료가 149만원인 서울 청담동의 한 유아 영어학원. 한국에서 영어는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계급의 표지다. / 김문석 기자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발음을 영어능력 자체, 나아가 국가경쟁력과 등치시킨 비교육적이고 즉흥적인 발상이었지만, 이명박 정부가 표방한 영어 몰입교육은 사교육시장에서 영어 열풍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2009년 대우증권의 영어학원 산업 분석보고서는 “국내 영어 사교육시장은 우호적인 정부 정책과 높은 사교육열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면서 기업형 영어학원 브랜드 상위 3개사가 2008년 한 해 동안 3000억원 규모의 시장을 창출했다고 분석했다. 2008년 초·중등 영어 사교육시장은 약 3조5000억원으로, 당시 우리나라 초·중등 전체 사교육시장(16조2000억원)의 21.3%를 차지했다.

1883년 최초의 영어 교육기관 동문학이 설립된 이래 영어는 한국 사회 미국화의 첨병이었다. 위키리크스 문건에서 “뼛속까지 친미”라는 평가를 받은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에 추진된 영어 몰입교육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영어=미국=세계화’ 공식이 극단적으로 반영된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능력은 제도화한 문화자본이자 계급을 구분하는 표지다. 최샛별 이화여대 교수(사회학)는 2002년 전국 6개 대학(국민대, 동아대, 서울대, 이화여대, 전북대, 한림대) 학생 1791명을 대상으로 영어능력과 소득계층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이 조사에서는 응답자들 부모의 경제력(7개 구간)과 학력(4개 구간)을 구분하고 해당 구간에 속하는 학생들이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스스로 평가하도록 했는데, 부모의 소득과 학력수준이 높은 응답자일수록 자신의 영어실력을 고평가했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영어능력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이라는 고리를 통해 개인의 능력으로 전환됨으로써 사회적 지위의 대물림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2년 조사가 응답자의 주관적 판단에 기반한 것이었다는 한계를 안고 있는 데 비해, 지난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표한 조사는 이러한 추세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국내 4년제 대학의 2008년 8월 및 2009년 2월 졸업자 1만1106명을 대상으로 ‘스펙’과 일자리의 질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보고서를 보면, 학점보다는 영어능력(토익점수·어학연수)이 좋은 일자리(대기업·공공부문·금융계·외국계 기업 정규직)를 구하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주목할 것은 영어능력이 소득수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가구 소득수준에 따른 학점 차이는 거의 없었지만 토익점수는 3개 구간별(200만원 미만·200만원~500만원·500만원 이상)로 상당한 차이(각기 750점·757점·817점)를 드러냈다.

영어의 지배력은 엘리트 학자 집단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2005년 당시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5년 현재 서울대학교 교수의 50.5%가 박사학위를 미국에서 받았다. 여기서 모집단을 해외 박사학위 소지자로만 좁히면,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는 전체 외국 학위 소지자의 81.1%로 높아진다.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도 외국 학위 소지자 중 미국 박사의 비율은 80%를 넘었다. 일방적인 미국 편중 현상이다.

“영어가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물신”이 되었고 “우리 사회에서 영어에 대한 강조는 국가경제의 발전 필요성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사회적 균열을 정당화’할 계급적 필요성에 기인하고 있다”(송승철 한림대 영문학과 교수)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순복음교회는 미국 교회의 ‘번영신학’과 한국 중산층의 욕망을 결합해 초대형 교회로 성장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의도 순복음교회. 순복음교회는 미국 교회의 ‘번영신학’과 한국 중산층의 욕망을 결합해 초대형 교회로 성장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개신교

한국 사회는 개신교를 통해 미국과 만났다. 1886년 문을 연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필두로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배화학당 등 개화기 조선에서 근대화 교육을 수행한 학교들이 모두 미션스쿨이다. 이들 학교의 교과서는 영어성경이었고 교육 목표는 기독교 지도자와 신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 사회의 엘리트는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은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개신교는 곧 미국의 종교였다. 영어가 한국인에게 근대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통로였다면, 그것은 개신교의 시각으로 굴절화된 미국적 가치였던 셈이다.

문제는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개신교 주류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한 미국 개신교가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분파였다는 점이다. “1893년에서 1983년까지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는 거의 90%가 미국인이고, 그 대부분은 미국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다.”(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미국 개신교 보수주의 진영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신교 주류의 특징은 ‘반공주의’ ‘정교유착’ ‘전투적 성장주의’로 요약된다. 1950년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 영락교회는 한국전쟁 이전에 신자가 6000명을 넘어선 대형교회로 성장했는데, 이 교회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를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사탄)”이라고 표현했다. 2011년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무릎을 꿇고 기도해 논란이 됐던 국가조찬기도회는 군사정권 시절인 1968년부터 연례 행사로 자리잡은 ‘대통령조찬기도회’의 후신으로, 같은 이름의 미국 제도를 본뜬 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조찬기도회에서 한 개신교 목사는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1980년 8월 조찬기도회에서는 개신교 목사 23명이 신군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는데, 이 기도회는 KBS와 MBC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세계 유수의 대형교회들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전투적 성장주의의 뿌리도 미국에 있다. 한국 교회가 군사정권 시절 교세 성장을 위해 도입한 대규모 집회와 부흥회는 1950년대 미국 교회의 특징이었다. 성장주의의 이론적 뿌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풀러신학교를 거점으로 하는 교회성장학파와 적극적 사고(긍정적 사고)의 주창자인 1950년대 미국의 노만 빈센트 필 목사, 필 목사의 ‘적극적 사고’ 신학을 실제 목회에 응용한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교회성장학파와 적극적 사고 신학을 자신들의 교회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2000년대 이후 성장한 한국의 후발 대형교회는 예배에 ‘쇼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도입했는데 이 또한 원조는 미국 교회다.

미국발 개신교의 영향은 개신교의 외적 성장이나 우파 정권과의 친화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최근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자기계발·힐링 담론의 토양이기도 하다. 김진호 실장은 <녹색평론> 129호 대담 ‘힐링과 멘토의 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최근의 힐링 현상의 직접적인 연원은 기독교, 특히 미국발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며 “(자기계발 신앙과 힐링의 신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미국의 치유목회론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990년대다. 숱한 자기계발 신앙 서적과 힐링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말했다. 자기계발 담론은 강한 확신을 바탕으로 개인의 성공을 추구하며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여긴다. 보수 기독교 진영은 최근에도 국회의 차별금지법 입법 움직임에 대해 동성애자들을 ‘종북게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반발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 정권 때 등장한 ‘고소영’(고대·소망교회·영남)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개신교 네트워크는 한국 사회에서 출세의 지름길쯤으로 인식된다. 지난해 선출된 19대 국회 지역구 당선자 246명 중 100명이 개신교 신자였다. 18대 국회에 비해 약 8%포인트 높은 비율이다. 신자 수는 감소하는 추세다. 1965년부터 1990년 사이에 개신교회의 신자 증가율은 20~40%였지만 1990년대에는 2~3%로 추락했다. 가장 최근 조사인 2005년 조사에서 개신교 신자 수는 1995년 대비 14만여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40년 만의 첫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매장. / 이상훈 선임기자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매장. / 이상훈 선임기자

스타벅스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인물과사상사)를 보면, 공식 문헌에서 커피를 처음으로 맛본 한국인으로 기록된 이는 고종이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의 권유로 커피를 처음 마셨다고 한다. 이후 커피는 서구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다방, 인스턴트 커피, 커피전문점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렸는데, 1999년 한국에서 1호점을 낸 미국 브랜드 스타벅스는 한국인들의 일상 풍경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스타벅스는 한국에 진출한 첫 외국 커피전문점이다. 1호점을 낸 후 4년 만에 110개로 매장을 확대했다. 2013년 3월 기준으로는 503개다. 매장 수로는 국내외 브랜드를 합쳐 이디야, 카페베네, 앤젤리너스에 이은 4위지만 스타벅스의 상징성은 그 이상이다.

1987년 미국 시애틀에서 6개 매장, 종업원 100명으로 시작한 스타벅스를 그 이전의 커피전문점과 차별화하고 커피의 본고장인 유럽에까지 침투하게 만든 초기 스타벅스의 특징은 다양한 종류의 커피, 테이크아웃, 고급스러운 실내공간 등이었다.

작가 정수현씨는 2011년 한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스타벅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스타벅스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곳은 정말 멋진 장소였다. 예술가에 가까운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직접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내부 인테리어, 발음하기도 어려운 메뉴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음료 사이즈들, 스타벅스에서 멋지게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주문하고 그로테스크한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열면 머리 위로 수많은 영감이 쏟아졌다.”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던 셈이다.

스타벅스의 문화 충격은 엉뚱한 곳으로 유탄을 날리기도 했다.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이전 커피전문점에 비해 비싼 가격을 고수한 스타벅스는 ‘된장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분수에 맞지 않는 허세와 허영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스타벅스는 커피의 입맛(taste)을 하나의 미학적 취향(taste)으로 바꾸어놓았다”고 평했다. “스타벅스는 커피 이상의 현상으로, 그들이 파는 것은 커피가 아니라 브랜드다. 사이렌이 그려진 로고가 달린 머그잔·티셔츠·일기장은 문화적 아이콘으로 소비된다. (중략) 커피잔과 아이템 위에 새겨진 사이렌의 로고는 그것을 소유한 이가 어떤 ‘취향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말해준다. 일종의 ‘종족화’ 현상이랄까.”(<크로스: 진중권+정재승>, 웅진지식하우스)

그 취향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이국적 취향이다. 한국 스타벅스 전무를 지낸 정영권씨는 <스타벅스 100호점의 숨겨진 비밀>에서 한국 스타벅스 1호점을 이대 앞에 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단 우리는 스타벅스를 외국에서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잠재고객이 필요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 살았던 사람들, 역이민으로 들어와 사는 분들이나 해외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그리고 이왕이면 여성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20~30대를 타깃으로 잡았고 여대 앞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스타벅스가 한국에 진출했을 때 한국인들에게 커피를 ‘들고다니는’ 테이크아웃 문화는 생소한 것이었다. 생소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명동, 여의도, 종로, 광화문 등 시내 중심가를 선점하는 전략을 취한 스타벅스의 테이크아웃 문화는 젊은 직장인들을 통해 빠르게 번졌다. 스타벅스가 끌고 들어온 ‘미국 취향’은 2003년 케이블TV 채널을 통해 방영을 시작한 <섹스앤시티>와 그 이후 불어닥친 ‘미드’ 열풍을 타고 더욱 확산됐다.

커피전문점은 이제 일상적인 풍경이다. 국내 커피전문점 개수는 2011년에 1만개를 넘었다. 2011년 커피 수입량은 13만톤, 금액으로는 7억1700만 달러에 이른다.

참고자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스타벅스 100호점의 숨겨진 비밀>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아메리카나이제이션>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크로스 : 진중권+정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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