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불복종 확산

길거리 강연·토론·자료 공유…일상이 된 ‘국정화 저항’

2015.11.08 22:36 입력 2015.11.08 22:44 수정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일상으로 진화·확산되고 있다.

교육현장에선 국정화 문제가 논술대회·토론·대자보의 단골메뉴로 자리 잡았고, 국정화를 비판하는 길거리 강연과 자발적인 자료 공유 움직임도 늘고 있다. 댄스동아리 사이트엔 “국정화는 상식의 문제”라는 글이 걸렸고, 정부가 축소하고 비틀려고 한 근·현대사 책에 대한 관심은 커지고 있다. 국정화로 역사 해석의 독점권을 쥐려던 정부로서는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는 격이 됐다.

■ 풍자·토론·놀이가 된 국정화
지난달 말 ‘국정화’ 논제로 교내 논술대회를 연 서울의 한 공립고에서는 참가자 60명 중 한 명만 조건부 찬성(역사학자들이 합의하면)을 하고, 모두가 반대입장을 써 냈다. 담당 국어교사는 “논제가 즉석에서 발표됐는데도 아이들이 1500자 분량을 주저 없이 빨리 써 내려갔다”면서 “역사는 하나의 관점이 불가능하다, 학생과 교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지 않았다 등의 이유가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세월호 때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니 국사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는 얘기도 꽤 있었다”면서 “학생들이 세월호 이후 나와 관련되는 이야기들은 스스로 판단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고 인터넷·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에선 최근 역사에 관심 많은 한 학생이 국정화 반대 대자보를 교내에 붙이자, 그 밑에 다른 학생들이 포스트잇에 찬성 지지글을 빼곡하게 붙였고, 이를 계기로 교장과 교사들이 합당한 이유와 근거를 들어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교육적인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에 아예 자유게시판을 마련하기로 했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6학년생은 “최근 영어학원에서도 국정화 토론을 했는데 다들 반대의견이었다. 학교 친구들도 국정화를 다 ‘극혐(극한의 혐오)’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학교에 전교조 선생님이 한분도 없다는 한 고교생은 “학교선생님들이 모두 국정화에 비판적이고, 역사과목이 아닌 다른 수업시간에도 은근히 국정화를 비꼬는 예문을 많이 든다. 아이들도 비웃는다”고 전했다.

경기도의 한 교사는 영화 <암살>을 패러디한 컴퓨터 바탕화면과 교무실 티슈 갑에 국정화 반대 문구를 붙인 인증샷을 올리고, 전북 박사모 일동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님, 국어 영어 수학도 좌편향이니 국정화해달라’는 풍자글도 등장했다. 경남 창원에서는 지난달 28일 마산일고 교사의 역사 거리강연도 펼쳐졌다.

■ “답답해서 내가 직접 찾았다”
대학가엔 국정화 반대 몸짓과 사이트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서울대인 모임’ 페이스북에는 지난 5일 역사학 석사수료생 우모씨가 박정희 정부가 처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했던 1973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주요 신문기사들을 모아 정리·분석한 글을 올렸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국정화와 관련된 과거 기사들을 찾아 모았다는 우씨는 1973년 역사교과서 국정 전환 직전의 반대의견들과 국정전환 이후 교과서의 품질에 대한 비판, 1980년대 이후 검정교과서 전환을 촉구하는 기사들과 정부 검토, 추진상황 등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 공유했다.

서울대 교내엔 스스로 ‘양비론자’로 소개한 1학년 학생이 쓴 ‘나까지 자보를 쓰게 하다니 정부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는 대자보가 눈길을 잡고 있다. 이 학생은 “국정 교과서도 검인정교과서도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입식 교육이 이뤄지는 현 체제를 보완해나가긴 커녕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국정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서울 ㄱ대 댄스동아리에서 활동 중인 최모씨(21)는 “동아리 특성상 평소에 정치 얘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는데 단체 카톡방에서 국정화 반대 서명 주소나 자료들이 올라오고 있다”며 “정치 문제라기보단 상식의 문제로 보는 사람들과 글이 많다”고 전했다.

■ 근·현대사 관심 높아져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국정화 지지자들이 좌편향 역사인식을 불지폈다고 비판하는 책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판매량이 정부의 국정화 발표 후 평소 한 주에 2~3세트(6권) 나가다 10세트 정도로 늘었다. 최근 출간된 김동춘 교수의 <대한민국은 왜>(사계절)와 <나의 한국현대사>(돌베개), <민중을 기록하라>(실천문학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푸른역사)까지 알라딘의 역사책 분야 10위 안에도 이례적으로 현대사 책 4개가 들어 있다.

김육훈역사교육연구소장(서울 독산고 교사)은 “국정화 이후 덕분에 친일파가 누군지 잘 알게 됐다. 근현대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됐다는 반응이 많다”며 “정부가 올바른 역사교육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국민들 사이에서 미래를 위해서도 교육을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몇 번의 공개강연을 나섰을 때 흔히 국정화 지지세력으로 여겨지는 노인들이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나서 언론·정부의 일방적 공세에 대한 진실을 알게 돼서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며 “갈수록 국정화가 이념이나 세대 간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선 교과서 내용의 결과를 떠나 획일적 역사교육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후진적 행태에 대한 분노가 많이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며 “정부 스스로 그동안 젊은이들이 가져왔던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역사학회들은 이달 말부터 주말에 1시간가량 길거리에서 역사학 강의를 진행하며 시민들과 직접 만나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국내 최대 역사학회인 한국역사연구회도 대안 도서 발간을 추진중이어서 갈수록 국정화 반대와 저항 움직임은 사회 저변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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