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페미니즘을 찾아서

2016.08.08 09:36 입력 2016.08.08 13:18 수정
문계린 좌파 페미니스트

">" target=_blank> ‘메갈리아’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집니다. 작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티셔츠 사태와 웹툰 작가, 메갈리아와 미러링,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향이네에 보내왔습니다. 향이네는 기고를 1일부터 7회에 걸쳐 싣습니다. 토론을 위한 반론도 환영합니다. h2@khan.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target=_blank>

일부 한국 남성들에겐 유감스런 얘기겠지만, 내 주변의 페미니스트들은 하나같이 ‘진짜 페미니즘’을 찾아대는 한국 남성들을 마땅치 않아 한다. 그렇다고 이 페미니스트들이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남성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을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들인 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분리주의가 1960년대에 끝난 즐거운 이론적 실험이었음을 안다. 여자를 사람으로도 안 보는 한국 남성들일지라도 어떻게든 대화와 설득을 통해 왜곡된 성관념을 바로잡고자 한다. 그 왜곡된 성관념 또한 가부장제 질서가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그저 ‘수캐’로만 존재하게끔 했기에 나온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진짜 페미니즘’,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존재를 하나같이 마땅치 않아 한다.

나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다. 나는 ‘진짜 페미니즘’이 마땅치 않다. 그 이유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는 진짜 페미니즘이란 것이 사실 허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페미니즘이란, 대개 남성들이 즐겨 찾는 말이다. 자신이 비판하고 싶어하는 대상을 ‘가짜 페미니즘’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꺼내오는 용어다. 성차별이 나쁘다는 것은 배웠으나 무엇이 성차별이고 무엇이 성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은 대개 그것을 가르기 위해 자신의 기분을 잣대 삼는다. 내가 기분이 나빠지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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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기분이 세상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받는 사회적 억압에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 때문에 기분이 상한 사람들은 사회적 억압의 여러 원인 중 하나인 젠더문제에 관심도 없다. 그들은 젠더 문제를 접하면서도 부당한 일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이전에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는가 아닌가부터 확인하는 듯하다. 이것은 페미니즘을 둘러싼 해묵고 아둔한 논쟁인가? 아니다.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의 자리에 좋고 싫음을 들이대는 일은 논쟁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건 그냥 행패다. 의견차도 의견이 있어야 존재하는 법이다. 남의 논리에 제 기분 나쁨을 가져다 대는 사람과는 논쟁이 성립할 수 없다.

자기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은 보통 아동기에 끝나곤 한다. 그러나 어떤 이슈에서는,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는 버릇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머문다. 진짜 페미니스트의 탐구자들이 그러한 유아적 사고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들도 페미니즘이 무척 좋은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왜 마다하는가? 그들은 유구한 성차별이 무척 나쁘다고 배웠다. 성차별에 맞서 싸우고 성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진짜 페미니스트를 그들이 거부할 당위는 없다. 그들은 성평등은 좋고 성차별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성평등은 옳고 성차별은 그른 것이기도 한데 좋고 나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나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말한다. 저들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그들은 진짜 페미니스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일단 기분이 상했을 때 난동을 피우는 방법은 안다.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너는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판단 주체부터 자신이다. 자기객관화가 잘 안 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평가하고 판별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본 적조차 없는 것 같다. 심지어 그 판별식은 개인의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보통 그런 건 취향의 영역이다.

대단한 것 같은 권위를 남을 비난하기 위해 끌어온다는 점에서, 진짜 페미니스트는 우리 집 금송아지의 친척이다. 보료 위의 금송아지처럼 무기질적인 존재이다. 자신의 신경을 거스를 구석이 하나도 없고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우리 집 금송아지와 닮아 있다. 누군가는 그냥 여자들끼리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상해 한다. 그냥 여자라서 기분 나쁘다는 사람도 있다. 뭘 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좋고 나쁨이 지닌 속성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사람만큼 좋고 나쁜 이유가 생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건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그냥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살다가 죽어도 안 된다. 하다 못해 죽은 페미니스트들도 누군가의 신경을 끝없이 거스르기 때문이다. 관짝을 열어서까지 기분 나쁘다고 꺼내 온다.

살아 있는 사람을 우리 집 금송아지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동시에 반대자를 무시무시한 악의 무리로 규정한다. 이것도 자기 기분에 달린 문제니까 그렇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자는 악인이다. 악인은 곧 나치이고 IS다. 그래서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닌 ‘가짜’ 페미니스트들은 나치가 되고 IS가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나치와 IS의 악랄한 여성 억압을 얼마나 끈질기게 비판해 왔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가 아는 것 중에 제일 나쁜 카드를 내는 것으로 ‘게임’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들은 나치와 IS를 꺼내든다. 언쟁을 벌이다 ‘나치’가 나오면 그냥 언쟁을 접는 것이 낫다는 인터넷 경구는 오늘도 유효하다. 이런 거대한 악이 있는데, 이게 제일 센 카드인데, 그래도 너 계속 떠들 거야? 안 그러면 큰일난다? 결국 자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을 입 다물게 하려고 꺼내 드는 이름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정합한 논리인지는 여기서 무용해진다.

미러링 잡지 ‘사심’ 2015년 10월 창간호에 실린 지면

미러링 잡지 ‘사심’ 2015년 10월 창간호에 실린 지면

그런 점에서 ‘메갈리아’ 공격은 좋은 구실이 된다. 미러링은 얼핏 보기에 나쁘기 때문이다. 미러링이 뿌리 깊은 여성혐오의 ‘언어’를 되받아치며 여성혐오적 가부장제 시스템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거울상에서 원본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저 나쁜 말을 하는 나쁜 사람들이라고만 받아들인다. 미러링이 한국 남자들에게 지나치게 어려운 전술이었다는 정희진의 지적은 그렇게 타당해진다. 그것을 보고 기분이 나쁘니까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판단한다. 그대로 욕한다. 메갈리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초기에는 여성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저것은 일베충들의 장난이라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분들에게는 놀라운 사실이겠지만 여성도 인간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다른 인간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다.

메갈리아는 여태껏 무슨 악행을 저질렀는가? 그들은 인터넷에서 한국 남성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팽이버섯이나 고추를 써는 사진을 올렸다. 한국 여자를 욕하려면 없는 개념녀 없는 김치녀 만들고 열심히 자료를 조작해야 하지만, 한국 남자를 욕하려면 그냥 뉴스 기사를 읽어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남성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이것은 순식간에 천인공노할 몹쓸 짓이 되어버린다. 조작까지 해야 여성을 욕할 수 있는 자와 뉴스 기사를 읽기만 해도 남성을 욕할 수 있는 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메갈리아의 시작은 분노였다. 디시인사이드의 한 ‘여초’ 갤러리에 누군가 글을 올린다. 본인은 34세 남성인데 20세 신입 여직원에게 고백하고자 한다는 글이었다. 반응은 싸늘했다. 그는 “너희들은 돈 주고도 안 따먹는다”며 일갈하고 그곳을 떠났다. 14세 연상의 상사에게 고백 받아 곤란해질 여직원에 대한 연민, 그리고 상대의 생각은 고려하지도 않고 혼자서 결혼 이후의 삶까지 망상하며 고백을 위해 20만 원짜리 아이크림까지 준비했다는 글쓴이의 망상에 대한 조롱으로 해당 갤러리가 가득 찼다. 그들은 새로이 개설된 메르스 갤러리를 ‘털러’ 갔다.

그들은 한국어 온라인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그대로 되받아쳐 주기로 마음 먹었다. 일부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리 이용자들은 미러링을 시작했고, 여성들은 폭발적으로 메르스 갤러리의 미러링 행각에 동참했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에게 쏟아져온 억압과 폭력에 반발했다. 메르스 갤러리의 이용자들은 디시인사이드의 금지어 설정과 추천 글 삭제 등의 탄압을 피해, 동남아 성매매 관광을 비웃을 겸 이웃한 동남아 여행 갤러리로 이주하기도 하고, 결혼 못하는 남자 갤러리 등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니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메갈리아라는 사이트를 하나 팠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각종 논쟁을 거치다가 온라인의 여러 페미니즘 공간으로 분화했다. 이것이 거칠게 정리한 ‘메갈’ 1년의 역사다.

애초에 메갈리아는 시작부터 ‘진짜 페미니스트’일 수 없었다. 적극적으로 남성 일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이들이 어떻게 니네 집 금송아지가 될 수 있는가? 진짜 페미니스트를 찾는 분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탄압이 거세면 거셀수록 진짜 페미니스트가 나타나기보다는, 탄압의 대상인 메갈리아가 더욱 강력한 상징으로서 힘을 얻는다. 현재 트위터에서는 #내가메갈이다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신여성이네 김치년이네 꼴페미네 하는 낙인에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메갈리아를 낙인으로 만드는 자들에 대한 하나의 저항이다.

[기타뉴스]진짜 페미니즘을 찾아서

분노한 여성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겠다. 중국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수구 세력에 맞서 싸웠다. 수구 세력은 공공연하게 “남자가 3, 4명의 첩을 두는 것은 천지의 대의이고 여자가 오로지 청소하고 밥하는 것이 옳은 일임은 경서에서도 나와 있다. 지금 여자가 참정하고자 한다는 것은 천고에 기괴한 이야기이다” 같은 말을 일삼았다. 1921년 5월 16일, 20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성(省)헌법심의위원회의 회의장을 포위했다. 수구 세력의 대표 인사인 정자추는 회의장에 나타나지도 못했다. 같은 해 6월 1일, 성(省)제헌위원회는 ‘성(省)헌법’ 초안을 표결에 부쳤다. 통과된 성(省)헌법의 제5조 내용은 이러하다. ‘남녀, 종족, 종교, 계급의 구별 없이 인민은 누구나 법률상 평등하다. 누구를 막론하고 인신을 매매의 목적물로 삼을 수 없다.’ 남성을 기분 나쁘게 하다 못해 물리적으로 포위해버리기까지 한 무시무시한 페미니스트들이 얻어낸 성취다.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고 해서 사악한 ‘가짜 페미니스트’들이 지금 회의장을 포위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말아 주었으면 한다. 비교할 걸 비교해라. 성폭력특별법 제정하고 축첩 제도 철폐하고 호주제 폐지하고 여성혐오에 반대하기 위해 소비자운동 좀 하고 포스트잇 좀 붙이고 비판 좀 했다. 남한 여자들이 페미니즘의 기치 아래 어디를 포위하거나 어디에 폭탄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명심하길 바란다.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평을 넓혀 왔다.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들은 진짜 페미니즘을 찾는 사람들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아예 모른다고 눙치고 도망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마주치게 된다. 사회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절반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페미니즘을 만나게 된다. 불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 뿐이다. 지긋지긋한 ‘진짜 페미니즘’, 어디 시작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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