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8년 하면 서울올림픽?…누구에겐 ‘철거’가 그해의 역사다

2017.10.08 20:14 입력 2017.10.08 21:42 수정
이소영 |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공식역사 VS 기억 | 역사의 한순간을 다르게 기억하기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순간을 우리들은 저마다 다르게 기억한다. 88올림픽이 필자에게는 거대한 간판 뒤에 가려진 판잣집들과 겹쳐져 떠오르는 것처럼. 이러한 개개인의 기억들은 ‘공식적인 역사’와 다르다 할지라도, 심지어 과장·과소화될지라도 ‘공식적인 역사’의 단일한 서사가 담지 못하는 이야기들, 진실을 재조명할 수 있게 한다. 사진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장면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순간을 우리들은 저마다 다르게 기억한다. 88올림픽이 필자에게는 거대한 간판 뒤에 가려진 판잣집들과 겹쳐져 떠오르는 것처럼. 이러한 개개인의 기억들은 ‘공식적인 역사’와 다르다 할지라도, 심지어 과장·과소화될지라도 ‘공식적인 역사’의 단일한 서사가 담지 못하는 이야기들, 진실을 재조명할 수 있게 한다. 사진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장면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장면 1

1989년 12월, 폐쇄적인 독재체제를 유지해오던 루마니아에서 민중혁명이 발발했다. 루마니아 서부의 한 도시에서 보안경찰이 시위대에 발포,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 것을 기점으로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군대 역시 혁명대열의 편에 섰다. 전세가 기울자 대통령 차우셰스쿠는 해외 도주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 체포된다. 사형을 언도받은 독재자 부부가 형의 집행을 망연히 기다리는 모습은 당시 국내 뉴스에도 실시간으로 보도됐다.

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2008)는 바로 그 루마니아 혁명에 대한 기억을 다룬다. 사건 발발로부터 16년이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한 소도시 지역방송국에서는 “16년 전 그날 밤 우리 마을에도 혁명은 있었는가”를 주제로 한 토크쇼를 기획한다.

만일 차우셰스쿠 탄핵 소식이 보도되던 밤 12시8분 이전에 사람들이 이미 광장에 모여 있었다면 그 마을에서도 혁명의 불씨가 점화됐던 것이고, 방송이 나온 뒤에야 모여든 것이라면 혁명은 있었다고 보기 힘들기에, 과연 그날 밤 몇 시에 군중이 광장으로 모였던가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이다. 토크쇼 패널로 초대된 마을 중학교 역사교사 마네스쿠는 당시 광장에서 “차우셰스쿠 물러가라”고 외쳤던 영웅담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마네스쿠) 친구 일당이 그날 취해서 밤새 달리던 거 내가 봤거든” 등의 제보전화가 걸려온다. 갖가지 사소한 기억들이 교차하며 충돌하는 가운데 엉뚱하게 논의의 쟁점은 ‘과연 그날 밤 마네스쿠는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가’로 옮아간다.

난장판이 된 토크쇼 말미에 또 다른 패널인 할아버지가 느릿하게 말한다. 그날 아침 아내와 사소한 일로 다투었다고. 미안한 마음에 귀가하며 식물원에서 꽃 세 송이를 꺾어와 탁자에 두었다고. 아내는 여전히 토라져 아무 말도 안하고 청소만 하였으나 거울로 훔쳐보니 슬쩍 웃고 있더라고. 안도하며 TV를 켜 보던 중 혁명소식이 나오기에 아내한테 자신이 겁쟁이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일단은 뛰쳐나왔다고 말이다.

‘민중의 승리’ 혹은 ‘혁명 제16주년’ 식으로 박제화된 역사 대신 그저 술기운에, 혹은 아내한테 멋져 보이고 싶어 엉겁결에 거리로 나왔던 기억들을 들려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각자 어떠한 일상을 살았으며, 무엇으로 그 장면을 떠올리는가라고 영화는 이야기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민중혁명의 역사적 순간은 ‘꺾어다준 꽃을 받고서 좋다고 웃던 아내의 얼굴’로 기억된 셈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환경미화 등의 이름으로 서울과 수도권의 판자촌은 강제철거되거나 가려졌다. 사진은 1988년 서울 상계동 무허가 판자촌 강제철거 당시 주민들이 삶터를 지키기 위해 철거반원들의 작업을 막아 내려는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환경미화 등의 이름으로 서울과 수도권의 판자촌은 강제철거되거나 가려졌다. 사진은 1988년 서울 상계동 무허가 판자촌 강제철거 당시 주민들이 삶터를 지키기 위해 철거반원들의 작업을 막아 내려는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장면 2

한편 역사적 순간에 대한 기억이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사건과 관련한 것일 때, 그 기억은 과대·과소화된 형태로 남겨지기도 하고, 변형되거나 망각되기도 한다. 기억연구자 임지현은 굴뚝이 하나밖에 없는 아우슈비츠에서 네 개의 굴뚝이 폭파됐다고 증언한 피해생존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트라우마처럼 깊이 새겨진 기억(deep memory)은 때때로 과장되거나 부정확하게 남겨지며, 설령 그것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바로 그 어긋남과 망각이 도리어 고통의 진실성을 역설해주기도 함을 설명한다.

자전적 애니메이션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감독 아리 폴만, 2008)은 1982년 레바논 전쟁 당시 행해진 민간인 학살을 소재로, 이스라엘 참전 군인들의 서로 다른 기억하기와 ‘기억 못함’을 그려낸 작품이다. 고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극중 주인공은 친구가 두 해째 꾸고 있다는 악몽에 관해 듣게 된다. 친구의 악몽은 자신을 물어 죽이려고 온 동네를 질주하는 26마리의 개들에 관한 것인데, 둘은 이 꿈이 레바논 전쟁 당시 수행한 군복무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친구에게 있어 참전은 ‘너는 사람을 쏘지 못하니 대신 작전을 방해하며 짖는 개들을 쏘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사살한 26마리 짐승들의 눈빛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반면 주인공은 해당 시기에 대해-반사실적인 장면 하나 이외에는-자신이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군복무 시절의 동료들을 찾아다닌다. 남자다워지고 싶다는 치기를 품고 입대했다던 한 동료에게 참전은 공포에 질려 마구 총을 쏘아대다가 민간인 일가족을 오인사살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기억된다. 불탄 탱크에서 홀로 살아남아 자대로 복귀한 다른 동료에게 있어 그것은 ‘살기 위해 동료들을 버린 죄책감’으로 남아있음을 주인공은 듣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의 조각들도 일부 되살아난다.

특정한 순간을 끝끝내 떠올리기 거부하는 무의식과 알아내고픈 충동의 대립은 주인공의 기억을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재연한다. ‘몸은 사건을 경험했지만 기억은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화면이 갑자기 실사로 전환되며 학살현장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을 비추는 영화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어떠한 종류의 충격적인 순간에 대해 망각하는지를 관객들로 하여금 다만 짐작하게 한다. 망각된 장면은, 레바논의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여자·아이들을 살육할 때 이스라엘군이 마을 외곽을 차단하고 민병대를 위해 밤새도록 조명탄을 터뜨리며 학살을 방조한 바로 그 사브라-샤틸라 학살사건과 관련됐으리라는 점을 말이다.

물론 여기서의 ‘기억 못함’은 방조자나 공모자의 비겁한 내적인 도피로도 해석될 여지가 없지 않다. 또 당사자가 다르게 기억한다 해서 그 다른 기억이 옳은 것도, 그가 짊어져야 할 모종의 책임이 사면되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만 망각한, 혹은 망각했다고 기억하는 자가 ‘왜 그렇게 기억할까’의 맥락을 세심히 살피면서 충돌하는 다른 여러 기억들과 비교해볼 때, 공식역사의 단일한 서사에는 담기지 못했던 목소리들을 듣게 될 여지가 생겨난다.

■ 장면 3

원고를 준비하며 필자가 개인적으로 공식역사와 다르게 기억하는 역사의 한순간은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현재까지의 삶만 놓고 볼 때 가장 또렷하게 떠오르는 그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인 듯하다.

필자의 기억 속에 남겨진 제일 오래된 유년기의 장면들 가운데 하나는 몇 살일지 모를 어릴 적에 보았던 판자촌이다. 당시 필자의 가족 또한 변두리의 좁고 낡은 복도식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어서 ‘처음으로 바깥세상의 비참함을 목격한 <행복한 왕자> 동상’처럼 그렇게 가난 자체가 큰 충격은 아니었을 텐데도 그 장면은 선연하게 각인돼 있다. 비닐창문과 간이화장실, 그리고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던 쪽방. 그곳이 정확하게 서울 어디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외갓집 가던 길에 어떤 모퉁이를 돌면 항상 그곳이 보였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음에도 그랬다.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나라가 온통 축제분위기였던 여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우리나라는 올림픽 하는 부자 나라”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으니 그 판잣집들은 대통령 할아버지가 튼튼하게 고쳐주셨겠지, 어린 필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외갓집으로 향하던 길 내내 옷섶 안에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버스가 길모퉁이를 돌 때, 얼굴을 창문에 닿을 듯 갖다 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쳐진 집들 대신 새로 설치된 어마어마하게 큰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높던지 판자촌 전부를 가리고도 남았다. 슬레이트 간판에는 ‘선진국으로 가는 대한민국’이라 쓰여 있었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판 아래의 틈새를 보니 절반쯤 부서진 집들 안에, 거기, 사람들이 보였다.

이내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폭죽이 터지고, 브라운관에서 호돌이와 호순이가 윙크하고, “손에 손잡고” 노래가 매일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집집마다의 화단에 동사무소에서 나누어준 예쁜 화분들이 심겨졌지만 즐겁지 않았다. 거대한 간판 뒤로 가려둔 부서진 판잣집들이 겹쳐져 떠올랐다. 아름다운 도시란 어떤 삶들을 감추고 치움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비록 그렇게 언어로 표현하지는 못했어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는 있었다.

이렇듯 필자에게는 서울올림픽의 역사적 순간이 대형 슬레이트 간판으로 가려둔 부서진 집들과 한데 묶인 채 기억으로부터 소환된다. 호돌이도, 굴렁쇠 소년도, 손톱이 아주 길고 화려하던 여자육상선수도 아닌, 부서진 집들로 그해의 올림픽을 떠올리는 것이다.

필자가 적어도 ‘어떤 삶들을 감추고 치움으로써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에 한번 의문을 품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면 그것은 1988년 여름, 서울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분들이 삶으로 겪어내셨을 아픔에 빚진, 역사적 순간에 대한 다른 기억 덕분일 것이다.

■ ‘공식역사’에 포섭 안된 기억들의 역사

이렇듯 역사의 한순간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빛나는 민중혁명의 승전일이든, 악몽 같은 민간인 학살의 다음날이든, 혹은 자신의 경험과 관련됐든 아니면 (서울올림픽에 대한 필자의 기억처럼) 타인의 경험을 목도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든, 각자에게 다르게 각인된다.

이러한 기억들은 역사학자 윤해동의 말처럼 ‘흑 아니면 백’으로 기술된 공식역사 이면의 다양한 채도를 지닌 회색들을 드러내 보인다. 실제 근래의 많은 사회·문화사 연구들은 이미 ‘순결한 우리 누이’나 ‘연약하고 무구한 아이들’ 혹은 ‘고결한 정신이 무자비하게 짓밟힌 사람들’ 식의 스테레오타이프화된 희생자 상이나 ‘저항 대 협력’의 이항대립을 넘어선다. 소도매상의 일기나 보통학교 학생의 편지, ‘문학적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으면서 절필은 못하고 일본어로 글 쓴’ 식민지 말기 소설가 등 평범하고 작은 사람들의 다른 기억들을 통해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재조명하고 있다.

어릴 적 위인전이나 삼국지 등에서 ‘창을 스치면 단숨에 모두…’, ‘검 한 획에 열 명 목이…’와 같은 문장들을 읽으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져본 경험이 대부분 있을 것이다. 그 ‘모두’와 ‘열 명’에게도 각자 사랑하는 이들과 좋아하는 것들이 있을진대, 그들은 단지 강감찬과 나폴레옹과 관우와 조자룡의 용맹에 화려한 수사를 또 하나 덧붙여주기 위해 소리 없이 단칼에 스러져야만 했던 것일까. 공식역사에 포섭되지 않을 기억들의 역사란,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영웅이 휘두른 칼에 목이 베인 수많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서랍을 열고, 구석에서 발견해낸 일기나 편지를 꺼내어 읽는 데서 시작되는 이야기.

더 나아가 이는 사회과 교육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들, 혹은 인권문제를 다룰 때도 유용한 기제가 되어준다. 미국의 청소년 역사소설 시리즈 <디어 아메리카>는 ‘역사의 한순간에 대한 기억하기’를 교육에 활용한 좋은 예다.

이 시리즈는 특정한 시대와 사건을 배경으로 해 일상을 살아가는 동년배 소녀의 일기 형태로 구성됐다. 이 시리즈는 학생들이 수업에서 배운 각종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한 시기에 살았을 동년배의 가상일기장을 들여다봄으로써 당시 그들이 느꼈을 법한 감정이나 그들의 기억에 남겨진 특정한 순간을 상상해보도록 한다는 게 기획취지다.

우리의 경우, 이를테면 병자호란을 겪은 소녀나 옆집 서학쟁이들의 비밀모임에 호기심이 일어 까치발 하는 소년의 가상일기 등을 통해 평범하고 작은 이들의 기억에 남겨졌을 역사적 사건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는 것이다. 또는 필자의 88올림픽 기억처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동시대사의 어느 한순간을 각자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보는 식의 시도를 해봄직하다.

<경향신문·인문학협동조합 공동기획>

▶필자 이소영

[금지를 금지하라](20)88년 하면 서울올림픽?…누구에겐 ‘철거’가 그해의 역사다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다. 법학을 전공했고, 법사회사와 법문학·법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법을 통한 과거청산’ 문제와 한국 발전주의 시기 규제·단속의 법사회사가 근래 연구관심이다. 논문으로 <‘건전사회’와 그 적들: 1960-80년대 부랑인 단속의 생명정치> <법문학비평과 사회적 기억의 구성: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법을 통한 과거청산의 아포리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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