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뇌종양·간비대증…더 많은 병 드러날까봐 병원 안 가”

2017.10.23 20:52 입력 2017.11.10 16:22 수정

필리핀 미군 기지 오염지역 피해자들의 삶

지난 9월7일 필리핀 수비크의 위성도시 잠발레스에 있는 소시마 알마리오(왼쪽) 집에서 그의 둘째 아들 어거스트가 손가락이 하나뿐인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수비크 미 해군기지에서 막사 화장실을 청소한 알마리오는 간비대증과 뇌종양에 걸렸고 그의 자녀 9명 중 3명은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수비크 | 허진무 기자

지난 9월7일 필리핀 수비크의 위성도시 잠발레스에 있는 소시마 알마리오(왼쪽) 집에서 그의 둘째 아들 어거스트가 손가락이 하나뿐인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수비크 미 해군기지에서 막사 화장실을 청소한 알마리오는 간비대증과 뇌종양에 걸렸고 그의 자녀 9명 중 3명은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수비크 | 허진무 기자

“수비크만 자유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난 9월5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고속도로를 5시간 달려 도착한 수비크만 자유항에는 눈부신 바다가 펼쳐졌다. 흰 요트 수십대가 정박한 해변은 과거 미군기지 터였는지 모를 정도로 한가로웠다.

한때 아시아 최대의 미 해군기지였던 수비크는 1992년 미군 철수 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됐다. 그 뒤로는 빛과 그림자가 겹친다. 빠르게 발전하는 경제자유구역 수비크 자유항이 양지라면 바로 옆 위성도시 올롱가포는 여전히 깊은 미군기지 후유증과 사회적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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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주둔 시절 올롱가포는 성매매 업소 500여곳이 불야성을 이뤘던 곳이다. 이날 찾아간 기지촌 성매매 여성단체 ‘부크로드’ 본부는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2층짜리 판잣집이었다. 부크로드를 이끄는 알마 부라완(56)은 33년 전인 1984년 부크로드에 가입했고 1988년 대표가 됐다. 성매매는 여성들이 가장 쉽게 돈 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술집 종업원은 하루 150페소(약 3300원)를 벌지만 성매매를 하면 하루 1000페소에서 3000페소까지도 벌 수 있었다. 부라완은 “미군기지의 존재 자체가 군인을 위한 오락을 요구했고 여성들을 성매매로 몰아넣었다”며 “1980년대에는 수비크에서 1만6000여명의 여성들이 성매매를 했다”고 떠올렸다.

미군이 임신시킨 여성들을 버리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아메라시안(아메리칸+아시안)’이라고 불리는 혼혈아들이 태어났다. 부라완도 1987년 누군지 모를 미군으로 인해 셋째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미군도, 필리핀 정부도 아메라시안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아메라시안 대부분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난은 대물림됐다. 대를 이어 성매매에 나서는 가족도 많았다. 브렌다 모레노(50)는 흑인 미군과 성매매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레노는 검은 피부 때문에 어릴 적부터 차별과 폭력을 경험했다. 모레노는 “많은 아메라시안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를 옮겨다니지만 결국 올롱가포로 돌아온다”며 “미군기지가 있던 곳이라 비교적 차별이 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올롱가포와 수비크 사이를 흐르는 칼라클란강은 미군기지 유류오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주민들은 이 강의 검푸른 기름띠가 미군이 남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 주변에는 미군기지에서 나온 오염물질로 몸이 망가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생존자’라고 불렀다.

해가 저물고 다음날 올롱가포 북동쪽 카라얀 언덕 산비탈에 올랐다. 내려다본 마을 주민들의 집은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 쌓고 슬레이트와 비닐을 덮은 움막이었다. 마을에는 미군기지에서 일하다 건강을 해친 이들이 살고 있었다.

콘라다 돔돔(60)이 사는 집에서는 나무 탁자 위로 흰개미 수십 마리가 기어다녔다. 돔돔은 식당에서 일하다 미군 남편과 1975년 결혼해 1978년까지 미군기지 내에서 살았다. 결혼 생활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기지에서 총기를 제작하던 남편은 화학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그는 군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 숨졌다. 돔돔 역시 간암에 걸려 간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미군은 필리핀인에게 주로 기지 청소를 맡겼다. 에프란 디아고(62)는 1980년부터 미군이 철수한 1992년까지 미군기지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했다. 쓰레기를 처리하고 화학물질도 다뤘지만 미군은 안전장비도 주지 않았다. 피를 토하고서야 디아고는 자신이 석면침착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디아고의 목소리는 풍선에서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로 변했다. 가족 중 여럿이 기지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했다는 카멜리타 소리아노 파미산(54)도 남편은 2003년, 아버지는 2015년 모두 폐암으로 숨졌다.

지난 9월8일 필리핀 원주민 아이타족이 수비크 칼라클란강(왼쪽 사진)에서 시장에 내다 팔 조개를 잡고 있다(오른쪽). 오염된 강물에서 잡은 조개에서는 휘발유 냄새가 났다.    수비크 | 허진무 기자

지난 9월8일 필리핀 원주민 아이타족이 수비크 칼라클란강(왼쪽 사진)에서 시장에 내다 팔 조개를 잡고 있다(오른쪽). 오염된 강물에서 잡은 조개에서는 휘발유 냄새가 났다. 수비크 | 허진무 기자

마을 주민들은 ‘아이타족’이라고 불리는 필리핀 원주민들이 수비크 강에서 잡은 생선과 조개를 주로 먹고산다. 주민들은 생선과 조개가 건강에 나쁘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값싼 음식이기 때문이다. 파미산은 “생선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지만 다른 음식을 살 돈이 없다”고 했다.

오래도록 잃어버린 삶, 그렇다고 필리핀인들이 침묵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결성된 시민단체 ‘미군기지정화위원회’는 수비크의 환경오염에 대해 미군이 책임져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2000년 8월 오염 피해자들을 모아 미국 정부와 필리핀 정부에 손해배상 집단소송도 제기했다. 그러나 필리핀 법원은 재판 관할권이 없다는 이유로 2001년 9월 기각해버렸다. 급격히 동력을 잃은 미군기지정화위원회는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만 남긴 채 사라졌다. 이 단체에서 ‘바비 몬테이요’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모하마드 자밀 드라피자(65)는 “점점 활동이 뜸해졌고 2009년부터는 사무총장과도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도 오염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필리핀 방문 사흘째인 7일 오전 수비크만관리청(SBMA)에서 만난 아메샤 델라 라나 환경부장(49)은 “수비크에 오염지역이 10곳 있고 오염추정지역이 13곳 있다”며 오염지역으로 소방 훈련장, 국방물자 재활용 유통사업소(DRMO), 해군병원 소각장 등을 꼽았다. 라나 환경부장은 미군기지정화위원회가 오염지역 중 하나로 지목한 ‘하버 포인트’의 유류 오염 가능성도 인정했다. 현재 스타벅스, 유니클로, 다이소 등이 입점한 대형 쇼핑몰이 지어져 있는 곳이다. 수비크만 자유항을 운영하는 수비크만관리청은 해변에 있는 과거의 미 해군본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미군이 오염 정화에 대해 어떤 책임도 인정하지 않아 필리핀은 자체적으로 정화작업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1947년 미국이 필리핀과 체결한 군사기지조약(MBA)에는 기지 반환 때의 오염 정화에 대한 조항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2004년 스톡홀름 협약을 비준한 뒤 세계은행에서 지구환경기금(GEF) 864만달러를 빌려 수비크 일부 지역의 잔류성 유기오염물질(POPs)을 정화한 바 있다. 라나 환경부장은 “이상적인 정화 계획이 있었지만 자금이 부족해 결국 오염지역을 직접적으로 정화하지 못했다”며 “다만 땅속에 묻고 시멘트로 덮어 오염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염된 땅을 손써보지 못하고 덮어놓은 셈이다.

수비크를 떠나기 전 또 다른 위성도시 잠발레스에서 미군기지 오염의 피해자인 소시마 알마리오(56)의 집을 찾았다. 알마리오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수비크 미 해군기지에서 막사 화장실 관리를 담당했다. 알마리오는 “화장실은 강 근처에 있었는데 온갖 오물과 하수가 강에 버려져 물 색깔이 검었다”며 “사람들이 그 강에서 잡은 생선을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생명보험 판매원으로 일하는 알마리오는 간비대증과 뇌종양을 앓고 있다. 그의 자녀 9명 중 3명이 신체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알마리오는 “나는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리지만 병원에 가지 않는다”며 “병원에 가면 더 많은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둘째 아들 어거스트(26)는 손가락이 오른손 검지 하나뿐인 몸으로 태어났다. 어거스트는 “우리는 너무 가난하게 살고 있고 몸이 아프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미국이 우리의 삶을 보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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