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숨의 촛불 1년

1700만개의 촛불로 수놓은 ‘민주주의 시민 미학’

2017.10.27 22:09 입력 2017.10.27 23:18 수정

다시 광장으로…못다 이룬 민주주의 완성 위해 모입니다

김숨씨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가 열렸던 광화문광장을 1년 만인 지난 24일 찾았다.

김숨씨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가 열렸던 광화문광장을 1년 만인 지난 24일 찾았다.

#1.

“어디에서 왔지?”

“한국에서.”

“북쪽? 남쪽?”

“남쪽.”

“티브이에서 너희 나라 소식을 전하더군. 너희 나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다소 격앙된 사내의 얼굴빛은 거무스름하다. 단단히 굳은 벽돌 같은 얼굴. 사내는 푸른빛이 도는 경비복장을 하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얼굴을 한 사내는 그럼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하다.

“아웅산…… 폭파…… 전두환…… 나는 전두환을 알아…….”

사내의 눈빛이 반짝인다.

“아, 미얀마……?”

“박근혜…… 너희 대통령……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작년 12월 독일 쾰른의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마주친 경비원과 나누었던 대화다. 그는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나와 일행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전날 밤 보훔에서 만난 한 독일인 기자의, 조용하지만 강렬하던 눈빛은 내게 묻고 있었다.

“너희 나라가 어떻게 될 것 같니?”

한국인을 아내로 둔 그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들이 권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한국 국민들이 얼마나 깊은 분노와 절망에 빠져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는 지금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이고 있다. 계층을 막론하고, 세대를 막론하고…… 독선적이고 부패한 정권을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서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내가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향하는 시민들 덕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에게 고맙고 고마웠다. 그날 밤 보훔에 사는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리랑을 연주했다. 한국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 보훔은 우리나라가 최초로 광부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아리랑 선율이 아름답다는 걸 나는 그날 밤 처음 깨달았다. 아리랑을 들으며 몰래 눈물을 훔친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전국의 크고 작은 광장들에는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순하지만 지혜로운 초식동물의 심장처럼 작고 빨간 촛불을 들고.

#2.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변두리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했다. 우리 다섯 식구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가게 뒤편에는 절이 있었다. 소박하고 작은 절이었지만 신도들이 제법 되는 절이어서 초파일이면 멀리서부터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으레 우리 가게에 들러 흰 초를 사갔다. 초를 사려는 발길은 오후 늦도록 이어졌고, 초등학생이던 나는 꼼짝없이 가게에 붙어 앉아 초를 팔아야 했다.

조선소 노동자로, 중동 근로자로,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버지는 어느 날 백수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어머니는 먹고살기 위해 마당 담벼락과 부엌을 터 구멍가게를 냈다.

절의 신도들은 다양했고, 가게에 들러 초를 사가는 손님들 역시 다양했다. 근사한 승용차를 타고 오는 사람,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 빛나는 구두를 신은 여자, 변변한 신발이 없는지 쥐포처럼 닳은 고무 슬리퍼를 신은 여자. 손님 중에는 대학교 교수도, 넝마주이도, 교사도, 미용사도, 미화원도, 야채 장수도 있었다.

우리 가게에서 파는 초는 한 가지였다. 염소 다리처럼 길고 흰 초. 초 종류가 한 가지였기에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똑같은 초를 사갔다. 저마다 소원은 다르겠지만, 자신들이 믿는 하나의 대상에게 초를 바치기 위해서.

#3

“촛불 데모가 만든 민주정권이 아니었다면 나는 올 수 없었다.”

지난 10월, 한국을 방문한 재일조선인 소설가 김석범 선생의 소회다. 제주 4·3항쟁을 다룬 대작 <화산도>의 저자인 그는 아흔두 살(1925년생)로 무국적자이기도 하다.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그 누구보다 염원하는 그는 북한 국적도, 남한 국적도 취득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어로 소설을 쓰지만 한민족의 소설가이기를 바라기에 일본 국적 역시 스스로 거부했다. 2015년 10월 박근혜 정부는 그의 입국 요청을 거부했다.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민족반역자 세력을 등에 업고 탄생했다”는 그의 비판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소원하고, 한국인 이름으로 4·3항쟁을 다룬 소설을 일본 문단에 발표해 파장을 일으킨 소설가의 입국을 정작 한국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은 아이러니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촛불시민혁명으로 불리는 촛불집회가 아니었다면, 그의 이번 한국행은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행이 성사되었다 해도 노 소설가의 심정은 착잡하고 서글프지 않았을까.

4년 전 겨울, 나는 광화문광장을 지나다 여남은 개의 촛불을 보았다. 마치 지상으로 떨어진 북두칠성처럼 그곳에 놓여 있던 여남은 개의 촛불이 2만 개로, 100만 개로, 190만 개로, 232만 개로 늘어나리라는 것을 나는 그때 상상이나 했던가. 집회 횟수가 늘어날수록 촛불의 개수도 늘어났고, 우리가 평소 무심한 발걸음으로 지나쳤던 광장들은 민주주의 성소가 되어갔다.

#4

2016년 서울 광화문에서 첫 촛불집회가 열린 것은 10월29일 토요일이다. 10월은 농부들이 여름내 공들여 키운 곡물들을 거두어들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농사를 지으며 말년을 보내는 내 부모님은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고추를 따고, 깨를 털며 10월을 났다. 해가 떨어지면 티브이 앞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티브이 속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탄핵을 외치며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드는.

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어, 다시 추수의 계절 10월이 돌아왔다. 부모님은 수확물을 거두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계신다. 일기예보에서는 단풍 소식을 전하고, 대학들은 수시 모집이 한창이다. 티브이와 라디오에서는 전 세계 유일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당장이라도 일어날지 모를 전쟁 관련 기사를 수시로 내보내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가 연일 신문과 방송의 단골 기사로 등장한다.

아버지 자신에게는 물론 우리 가족에게 혹독했던 백수의 시간, 그 시간이 아버지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을 나는 언제 정확히 알았을까. 그러니까 아버지의 게으름이나 무능, 무책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해방 이듬해에 태어난 아버지와 그 세대는 국가 이데올로기와 독재 정권, 조작된 여론, 왜곡된 역사 교육, 비윤리적이고 독단적인 통치자들의 지배를 받는 피해의 인생을 살았다. 그들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아니, 그들이 어머니의 몸속에서 잉태되던 순간부터.

그러한 아버지들의 자식들인 우리는 아버지의 월급을 종이쪽지에 적어 담임선생에게 제출하기도 하는 기이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졸업한 후에는 비정규직이거나, 정규직이라 해도 비정규직이나 마찬가지인 직장을 철새처럼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 우리 아버지의 직업과 경제력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우리에게 대물림되었듯, 우리의 그것이 고스란히 우리 자식들에게 대물림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우리는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라는 농담을 서로에게 씁쓸히 건네며.

#5

촛불집회가 독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재단 인권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폭력 집회로 “한국 민주주의에 새 활력을 불어넣은” 시민 한 명 한 명에게, 그러니까 지난해 늦가을부터 올봄까지 촛불을 들었던 시민 모두에게 주는 상이라는 것 또한.

수십, 수백만이 넘는 시민이 모였지만 누구 하나 다치지 않은 비폭력 평화 집회에 우리 스스로도 놀랐고, 세계인들도 놀랐다. 집회를 모두의 축제로 승화시킨 시민들에게 세계 언론들은 부러움이 담긴 찬사를 보냈다.

촛불집회 때 시민들의 손에 들려 있던 초도 길고 흰 초였다. 시민들은 때로는 직장 동료의 손을 잡고, 때로는 어린 딸들의 손을 잡고, 때로는 스승과 제자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향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가게에 들러 자신의 손에 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손에 들려줄 초를 샀을 것이다. 그중 어느 가게에서는 구멍가게 시절의 나처럼 어린 여자아이가 초를 팔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남한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하던 미얀마인 사내는 지켜보았을 것이다. 보훔의 독일인 기자도 한국인 아내와 함께. 낫처럼 구부러져 선량하고 성실한 시민들의 등을 콕콕 아프게 찌르던 민주주의를, 한국 시민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반듯하게 일으켜 세우는지를.

더듬어보면 1987년 6월9일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분노해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항쟁을 이끈 이들도, 미군 장갑차에 효순·미선 두 여중생이 깔려 숨졌을 때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촛불을 든 이들도, 용산 참사 현장에 국화와 촛불을 들고 모여든 이들도, 세월호 유가족들의 곁을 지킨 이들도,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한 구의역에 추모의 메시지와 국화를 바친 이들도, 이제 서른다섯 분밖에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이들도 시민들이었다.

작년 10월29일부터 4월까지 23차례에 걸쳐 1700만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었다. 남편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가했던 친구는 말했다. 그곳에 모인 시민들이 “특정한 한 사람이 든 깃발 아래가 아니라 내 손에 든 촛불 아래 서서” 탄핵을 외쳤다고. 다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곳에서 “소외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촛불이 다 타들어 더는 들 수 없을 때까지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고.

“촛불은 질량을 가지지 않은 존재이면서 더욱 강한 존재”라고 가스통 바슐라르는 말했다. 촛불집회 일 년을 맞아, 촛불의 강함을 일찍이 깨달은 지혜로운 시민들이 다시 광장으로 모이고 있다. 촛불로 수놓은 시민 미학을 우리의 민주 광장에서 마저 완성하기 위해.

▶소설가 김숨(43)은

[소설가 김숨의 촛불 1년]1700만개의 촛불로 수놓은 ‘민주주의 시민 미학’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백치들> <바느질하는 여자> 등을 내놓았고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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