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용산 기지 건물, 정부가 쓰고 공원 조성? 그건 잘못됐다”

2017.10.30 21:03 입력 2017.10.31 17:30 수정

일본 다치카와시 미군 기지 사례가 주는 교훈

“부지 전체를 시민의 품으로” 활동가들, 미완의 반환 비판

주일 미군기지를 반환받아 조성한 일본 도쿄도 다치카와 쇼와기념공원의 모습으로, 왼편 건물은 쇼와 일왕을 기리는 쇼와일왕기념관이다. 공원과 함께 반환된 주변 지역은 자위대 기지와 일본 경찰청, 소방청 등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김기범 기자

주일 미군기지를 반환받아 조성한 일본 도쿄도 다치카와 쇼와기념공원의 모습으로, 왼편 건물은 쇼와 일왕을 기리는 쇼와일왕기념관이다. 공원과 함께 반환된 주변 지역은 자위대 기지와 일본 경찰청, 소방청 등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김기범 기자

“주민들은 투쟁에서 승리했지만 일본 정부 탓에 절반의 승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미군기지 확장은 막았지만 온전히 시민 품으로 돌아오진 못한 것이지요.”

지난 9월17일 일본 도쿄도 다치카와시에서 만난 반전활동가 도시유키 오보라는 “스나가와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은 시민들의 저항이 없었다면 여전히 미군기지가 존재한 상태 그대로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다치카와시는 도쿄 외곽의 지자체로 1972년까지 주일미군의 공군기지가 있던 곳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 전까지는 일본 육군 비행장으로 사용되던 곳을 미군이 사용했었다. 이곳의 미군기지가 전 일본적인 관심사가 된 것은 1955년 일본 정부가 다치카와 기지 확장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기지에 인접한 스나가와 지역의 농민들 땅을 수용해 미군이 사용할 활주로를 연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스나가와의 농민들은 토지 수용에 강하게 반발했고, 노동조합, 대학생 등과 힘을 모아 정부 측의 측량작업을 저지했다. 1957년까지 이어진 스나가와투쟁에는 주민들 외에 노조, 학생 등 6000여명이 참여했고, 8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기지 내에 침입했다는 이유로 23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 정부는 일단 기지 확장계획을 포기했다. 이후 베트남전쟁 당시였던 1967~1968년 일본 정부가 다시 추진한 기지 확장 역시 제2차 스나가와투쟁으로 불리는 주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미군은 다치카와시를 떠나게 됐다.

미군 철수까지만 보면 주민들의 승리로 보이지만 일본 정부는 다치카와 미군기지를 주민들에게 온전히 돌려주지 않았다. 우선 미군이 떠난 자리에 자위대가 들어왔다. 다치카와 시민 82%가 반대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자위대를 이주시켰다. 이어 1981년 일본 정부는 미군기지 부지 전체 460㏊ 가운데 3분의 1 정도인 148㏊ 정도를 공원으로 만드는 계획을 발표했다. 공원 주변에는 일본 경찰청, 소방청 등 정부기관이 사용하는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는 계획도 세워졌다. 일본의 반전활동가들은 이렇게 부지 전체가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 외에도 이 공원이 1989년 사망한 쇼와 일왕을 기념하는 ‘쇼와기념공원’이 된 것을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많은 이들의 피땀 어린 반전투쟁으로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냈는데 정작 시민 공간으로 얻어낸 부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이기도 한 일왕을 기념하는 공간이 되는 역설적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쇼와기념공원 개원을 앞두고 저지 투쟁이 벌어졌고, 평화기념공원으로 만들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83년 10월 쇼와기념공원은 일반에 공개됐다. 게다가 쇼와기념공원 내에는 해당 부지가 미군기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의 용산 미군기지 반환과 공원화 계획에 일본의 반전활동가들은 다치카와 사례가 용산공원이 택할 수 있는 미래들 중 가장 잘못된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지난해까지 국토교통부가 추진했던 공원 조성계획상의 일부 정부부처가 공원 내 건물들을 사용하고 나머지를 공원으로 만드는 내용에 대해 이들은 “한국 정부가 쇼와기념공원 사례에서 배워간 것 아니냐”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반전평화단체 스나가와평화광장의 후쿠오카 교코 대표는 “많은 이들이 애를 쓴 덕분에 활주로 연장을 저지하고, 주민들의 일상을 지켜낸 것은 성과”라면서도 “대부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데다 미군기지 역사조차 삭제된 것, 언제라도 전쟁기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큰 한계”라고 말했다.

<취재 지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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