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다큐
2018.05.11 16:49 강윤중 기자

5·18광주민주화운동 고문피해자 이성전씨가 38년 전 석 달 동안 갇혀 구타 당하고 조사를 받던 상무대 영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강윤중 기자

5·18광주민주화운동 고문피해자 이성전씨가 38년 전 석 달 동안 갇혀 구타 당하고 조사를 받던 상무대 영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살아서 나갈 수 있으까 했었제.” 이성전씨(70)는 깨진 유리창 너머를 카메라에 담으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모진 고문 속에 허위 자백을 강요받다 내려다본 창밖에는 초소와 주유소, 철조망 등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 창 너머엔 5월의 신록이 봄 햇살에 반짝였다. 38년 전 이곳은 505보안대였다.

이씨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고문피해자다. 1980년 5월, 서른두 살이었던 그는 공수부대원들이 학생과 시민을 폭행하는 모습을 보고 시위에 뛰어들었다. 그해 7월1일 이씨는 시민군에 무기를 건넨 혐의로 경찰에 연행됐다. 이후 경찰서와 군 영창, 교도소로 옮겨가며 경찰과 군인, 교도관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곤봉과 곡괭이자루 등에 수없이 맞았고, 군홧발에 ‘지끈지끈’ 밟혔다. 각목에 머리를 맞고 의식을 잃기도 했다. 그때 후유증으로 왼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한다.

이성전씨가 38년 전 고문을 받았던 보안대 조사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당시 창밖을 보며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38년 전 고문을 받았던 보안대 조사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당시 창밖을 보며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강윤중 기자

고문 현장인 옛 505보안대로 들어서는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고문 현장인 옛 505보안대로 들어서는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지난 7~8일 광주에서 이성전씨를 만나 고문현장을 찾아갔다. 이씨의 목에는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지난해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사진치유를 받으며 들었던 카메라다. 아물지 않는 상처와 대면하는 수단이다. 처음 찾은 곳은 그의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옛 505보안대다. 폐허로 남았지만, 그가 끌려왔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들머리부터 섬뜩했다. 난간을 붙잡고 지하 고문실로 내려서는 이씨의 모습이 위태해 보였다. 여기저기서 “아이고 나 죽네”하는 신음이 온종일 들렸다고 했다. 2층 조사실 옆 물고문실을 가리킬 때 이씨는 지팡이용 등산 스틱으로 피해자들이 누웠던 나무 평상과 수도꼭지 사라진 수도관을 흥분한 듯 두드렸다.

보안대 조사실로 내려가는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보안대 조사실로 내려가는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고문실에 선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고문실에 선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보안대 내 물고문실을 설명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보안대 내 물고문실을 설명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이씨가 3개월 동안 갇혀서 고문당했던 상무대 영창은 5·18자유공원 내에 복원돼 있었다. 조사를 받는 중에도 수시로 끌려나가 서너 시간씩 구타를 당했다. 그는 상무대 법정에서의 첫 재판을 엊그제 일처럼 묘사했다. ‘내란실행죄’로 12년을 구형받았다. 자리를 옮겨 복원된 법정이지만 그때의 고통이 전해오는지 이씨는 햇빛이 들이치는 법정 문 밖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5·18자유공원 내 복원된 상무대 영창. /강윤중 기자

5·18자유공원 내 복원된 상무대 영창.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하루 서너 차례씩 끌려가 구타 당했던 상무대 조사실 앞 천막이 있던 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하루 서너 차례씩 끌려가 구타 당했던 상무대 조사실 앞 천막이 있던 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3개월 동안 갇혀 고문을 당했던 상무대 영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3개월 동안 갇혀 고문을 당했던 상무대 영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내란실행죄로 12년 구형을 받았던 상무대 법정에 앉아 그날의 기억에 잠겨 있다.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내란실행죄로 12년 구형을 받았던 상무대 법정에 앉아 그날의 기억에 잠겨 있다. /강윤중 기자

상무대 법정 서둘러 나서는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상무대 법정 서둘러 나서는 이성전씨. /강윤중 기자

이튿날, 고향집에서 연행돼 한 달 동안 조사를 받던 화순경찰서를 찾았다. 예전 건물과 유치장은 흔적이 없었다. 세월이 지나도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금세 소환됐다. 사진을 몇 장 찍은 이씨는 당시 때리고 짓밟던 경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악랄했”던 구타와 욕설들을 나열했다. 높아진 목소리가 떨렸다.

이씨가 지난 1980년 7월1일 연행돼 한 달 동안 고문을 당했던 화순경찰서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당시 단층 건물과 유치장은 흔적이 없었다.  /강윤중 기자

이씨가 지난 1980년 7월1일 연행돼 한 달 동안 고문을 당했던 화순경찰서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당시 단층 건물과 유치장은 흔적이 없었다. /강윤중 기자

1980년 5월 22일 오전 7시. 이씨와 동지들은 광주 시민군에 합류하기 위해 연탄 트럭 화물칸에 엎드려 화순과 광주를 잇는 너릿재를 넘었다. “그때 공수부대가 사격하믄 자폭해불자고 다짐했었제.” 평온한 옛 길에 발을 딛고 선 노인의 표정에 ‘그날’의 비장감이 스치는 듯했다.

광주 시민군과 합류하기 위해 ‘그해’ 5월22일 넘었던 너릿재. /강윤중 기자

광주 시민군과 합류하기 위해 ‘그해’ 5월22일 넘었던 너릿재. /강윤중 기자

이씨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집 근처 산책로였다. 한 그루 고목나무 앞에 섰다. “썩어 죽어버린 줄 알았는디 꽃을 피우는 거이 신기하더만요. 꼭 나 같소. 고문으로 몸은 이리 망가져부렀어도 열심히 살아야겄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제.” 그는 나무를 향해 가만히 셔터를 눌렀다.

이성전씨가 집 인근 산책길에서 고목나무 사진을 찍고 있다. 고목에 꽃이 피는 것을 보며 고문으로 망가진 자신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집 인근 산책길에서 고목나무 사진을 찍고 있다. 고목에 꽃이 피는 것을 보며 고문으로 망가진 자신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강윤중 기자

이성전씨가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사진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찍은 작품들. 각각 옛 505보안대 고문실(상처와의 대면)과 고목나무에 움튼 생명(원존재와의 대면).

이성전씨가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사진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찍은 작품들. 각각 옛 505보안대 고문실(상처와의 대면)과 고목나무에 움튼 생명(원존재와의 대면).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의뢰를 받아 2013년부터 이씨 등 고문피해자들의 사진치유를 진행해 온 사진심리상담사 임종진씨(사진치유 전문기업 ‘(주)공감아이’ 대표)는 “대면하기 싫고 두려운 현장이지만, 사진행위를 통해 지속적으로 마주하며 ‘공간 해석의 전이’가 일어났다”면서 “자신의 그때 선택이 정의로웠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예술가가 아닌 피해 당사자들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아가는 표현행위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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