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10년,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2018.10.27 14:50 입력 2018.10.30 19:45 수정

고지운 변호사(이화여대 로스쿨 1기)는 자칭 타칭 ‘승소 전문 변호사’다. 그가 맡는 사건은 변호사 업계에서는 소위 ‘어려운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정부를 상대로 싸워야 하거나 일반 소송 법리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들, 그리고 지금까지 법조인들이 가보지 않았던 영역의 사건들이 고 변호사에게 들어온다. 그러나 그는 “늘 내가 이긴다”고 했다. 그는 이제 만 5년차에 접어든 이주민 지원 공익센터 ‘감사와 동행(감동)’의 대표 변호사다.

고지운 변호사가 10월 24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문화회관 4층 소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고지운 변호사가 10월 24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문화회관 4층 소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지 올해로 10년이 됐다. 그 사이 제1회 변호사시험을 치렀던 로스쿨 1기 출신들은 7년차 베테랑 변호사로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상근변호사 출신의 김종보 변호사(전남대 로스쿨 1기·법무법인 휴먼)를 비롯해 10년 사이에 많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다양한 공익활동을 벌이며 이슈의 중심에 서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사법시험 부활론자들의 공격을 받는다. 또 사시 출신에 비해 전문적이지 않다는 비난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조대진 변호사(영남대 로스쿨 1기)는 “지금은 과거에 비해 로스쿨 출신을 근거없이 비난하고 폄훼하는 목소리는 줄었지만 처음 로스쿨에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온갖 비난과 편견에 맞서야 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들의 편견에 맞서 로스쿨 출신도 훌륭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지금까지 버티고 있고, 나를 비롯한 다른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들로 인해 법률서비스 문턱이 낮아졌다고 말한다. 1시간 상담에 50만원을 호가하며 법률상담조차 받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이제는 과거보다는 훨씬 적은 부담으로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변호사가 사회의 낮은 곳까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로스쿨 제도 도입 10년의 가장 큰 성과다.

이주노동자의 ‘힘’ 고지운 변호사

고지운 변호사는 그동안 사법고시 출신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고 변호사 역시 시작은 사법고시생이었다. 연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 준비도 했었다. 고 변호사의 마음을 끈 것은 법철학과 생명윤리법, 의료법이었다. 법학을 학문으로 좀 더 공부하려 마음먹었을 때 로스쿨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그는 가족들 모르게 법학 일반대학원 준비와 법학적성시험(LEET)을 함께 준비했다. 결과는 이화여대 로스쿨 합격이었다. 다양한 학부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로스쿨에 몰려들었다. 법조문 하나를 놓고도 법학만 4년간 공부한 사람과 공학, 예체능 등 법학과는 거리가 먼 학부전공을 마친 사람들이 해석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다양한 토론이 이뤄졌다. 고 변호사는 “생각의 폭을 넒히고 하나의 법조문도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자연스럽게 배워나가는 것이 로스쿨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6 세계 이주민의 날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사망 이주노동자 추모제를 갖고 있다. / 이석우 기자

2016 세계 이주민의 날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사망 이주노동자 추모제를 갖고 있다. / 이석우 기자

그가 이주민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처한 상황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로스쿨 전국 연합체인 공익법학회에 초청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소속 변호사의 강연을 들으며 국제인권법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됐고, 로펌 실무수습기간 중 나간 법률봉사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처음 만나게 됐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막연히 대한민국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형식적 보호절차가 선진국 수준으로 잘 갖춰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부정당했다. 당연히 산업재해로 인정돼야 할 것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됐다. 매맞는 이주여성들도 너무 많았다.

그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곧장 이주민 지원센터를 찾아 “여기서 근무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답변은 “한 달만 다시 생각하고 오라”였다. 변호사가 됐으면 돈도 많이 벌어야 할텐데 이주민 지원센터는 교통비도 줄 수 없고, 지역도 대림동에 위치하고 있어 여성변호사가 근무하기에는 힘든 환경이라고 했다. 주변에서도 “미쳤냐, 왜 좋은 로펌에도 지원할 수 있는데 그런 짓을 하냐”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센터가 문을 닫았던 2013년 말까지 무급으로 법률지원을 했다. 대법원에 국선변호사 신청을 해서 한 건당 주는 돈 29만5000원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고 변호사는 “밥을 먹다가도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오면 바로 뛰쳐나가야 했기 때문에 그때는 밥도 제대로 먹고 다니지 못했다”고 말했다. 센터가 문을 닫았을 때 그에게도 한 차례 고비가 왔다. 남들처럼 그럴 듯한 로펌에 취직해 돈을 벌까 고민도 했다. 센터가 문을 닫기 전에 수임했던 사건은 그래도 처리해야만 했다. 억울하게 구금된 이주노동자 사건이 남아 있었다. 20대 젊은 이주노동자가 근무 중 산업재해를 당했다. 입원치료는 마쳤지만 통원치료는 좀 더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추가 휴가 요구도 당연한 권리였다. 사장은 “휴가를 주겠다”면서 한국어로 적힌 A4용지를 내밀었다.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설상가상 도움을 주던 노무사도 딱 그 시각에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어를 읽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서명한 서류는 ‘합의해지계약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입국 단속에 걸려 구금됐다. 회사와 근로계약을 해지했음에도 해지신고를 하지 않은 불법체류자라고 했다. 고 변호사는 그를 대신해 출입국관리소와 싸웠고, 이겼다. 이주노동자는 고 변호사에게 1만원짜리 10장과 멜론 하나를 건넸다. 그가 받은 첫 수임료였다.

그 일은 지금의 이주민 지원 공익센터 ‘감사와 동행’을 만들 수 있는 힘이 됐다. 감사와 동행에는 2명의 한국 변호사와 1명의 외국 변호사, 1명의 활동가가 함께 일하고 있다. 모든 사건 수임은 무료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사무실을 무상으로 빌려주는 대신 모든 사건은 수임료 없이 진행한다. 때문에 교통비나 복사비, 통신비 등 실비도 받지 않는다. 소송비용 마련부터 사무실 유지비, 소속 변호사 월급은 100% 후원금을 받아 지급한다. 각자에게 돌아가는 월급도 당연히 업계 최저다.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지원하는데 당사자인 여성이 조정기일에 나오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꼭 나오셔야 한다고 당부까지 드렸는데도 안 오셨죠. 그때 판사님이 막 화를 내시더라고요. 나중에 의뢰인에게 ‘왜 안 나왔냐’고 여쭤보니 버스값이 없어서 못 갔다고 하시더라고요. 심지어 가정폭력 피해여성들 중 귀화하신 분들은 손잡고 끌고가 기초생활수급자 등록도 해드리는 게 저희의 일입니다. 돈은 당연히 받을 수 없죠.”

그가 ‘감사와 동행’을 열어 지난 5년간 처리한 사건은 소송 150건, 법률상담 240건에 달한다. 단 한 건도 간단한 것은 없었다. 그는 지난 7년처럼 앞으로도 평생 이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로 남는 것이 목표다.

박인동 변호사가 전남 화순 지음 법률사무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지음 제공

박인동 변호사가 전남 화순 지음 법률사무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지음 제공

무변촌 지킴이 박인동 변호사

박인동 변호사(전남대 로스쿨 3기)는 ‘무변촌(변호사 없는 지역)’에 자리잡은 변호사다. 장이 서는 날이면 그가 운영하는 법률사무소는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이 된다.

“여기는 숫자 3, 8이 들어가는 날은 장날인데 읍내 나가셨다가 사무실에 들어와서 이야기하다 가시는 어르신들이 좀 계시죠.”

그도 처음에는 남들처럼 서울의 좋은 로펌이나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는 꿈을 꿨다. 그런데 고향이 전남 화순인 로스쿨 동기가 “화순에 가서 동업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시장조사차 들렀던 화순은 그의 눈에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초기비용이 적었다. 집값이 싸다보니 사무실 운영비가 서울보다 현저히 낮았다. 그리고 광주 시내까지 가려면 한 시간씩 걸리는 무변촌 지역에서는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동네 주민들이 언제든 법률상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폭력자치위원회 전문위원, 군청 내 계약심의위원, 경찰 선도위원 등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곳은 다양했다.

‘일정한 고객(수익)’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사무실을 차린 지 만 2년이 됐을 때부터였다. 사건은 대부분 노인들 상속문제나 토지구획문제, 대여금 소송 등 비교적 단순한 것들부터 복잡한 사건까지 다양하게 들어온다.

“‘이런 곳에 변호사 사무실이 있어요?’ 하면서 의뢰인들이 신기한 듯이 들어옵니다. 거기다 광주 대도시까지 나가 법률상담을 받으면 대부분이 사무장 상담을 받지만 저희는 재판이 없는 날은 변호사 2명이 항상 사무실에 앉아 상담을 해주니 그분들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죠.”

들어온 모든 사건에 전부 수임비용을 받지는 않는다. “상담을 해보면 본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있고, 굳이 법정까지 가져가지 않아도 내용증명을 보내거나 당사자들끼리 합의하면 되는 일도 꽤 있습니다. 그러면 서면 정도 써주거나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라고 알려드리고 보내죠. 의외로 마을 내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많습니다. 외지인이 와서 정착하려는데 우리 땅을 침범했다든지, 어찌보면 감정싸움도 많습니다. 도시는 아파트가 많고 구획이 지어져 있으니 그런 분쟁이 적은데 여기는 ‘여기까지가 내 땅이네, 네 땅이네’ 하는 싸움이 많을 수밖에 없죠.”

그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무변촌에서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영역은 무궁무진하고, 그만큼 그도 보람을 찾으며 살아간다. “큰돈 벌려는 욕심이 있다면 오면 안 되겠지만 시골에서 일을 하면 아무래도 바쁜 대도시보다는 마음에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다”고 했다.

로스쿨 설치 예비인가 대학에서 제외된 대학들의 반발은 거셌다. 2008년 2월 조선대 관계자들 1000여명이 제외가 된 이유와 로스쿨 심사기준 공개 및 재조정을 요구하는 집회를 벌이는 모습. / 연합뉴스

로스쿨 설치 예비인가 대학에서 제외된 대학들의 반발은 거셌다. 2008년 2월 조선대 관계자들 1000여명이 제외가 된 이유와 로스쿨 심사기준 공개 및 재조정을 요구하는 집회를 벌이는 모습. / 연합뉴스

로스쿨 대표자협의회장 출신 조대진 변호사

조대진 변호사는 변호사업계에서는 유명인사다. 그가 업계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로스쿨 대표자협의회 1기 회장을 맡으면서다. 당시 사법시험 41기를 중심으로 모인 ‘청년변호사’들의 공격을 최일선에서 받은 인물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선거에 로스쿨 제도 관련 공약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던 시기에 조 변호사가 집중포화를 맞았다.

“처음 로스쿨이 도입됐을 때 기득권의 반발이 워낙 컸습니다. 아무래도 먹고사는 문제니까 청년변호사들이 저를 놓고 ‘금수저’ 공격도 하고, 로스쿨 제도는 현대판 음서제라는 프레임을 짜서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사법고시가 희망의 사다리라고 말하지만 그 사다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당시에도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10년이 된 지금도 과거보다 적어졌지만 로스쿨이 문제가 많다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지금 소위 ‘사법적폐’들은 다 사법고시 출신이거든요. 그들이 그런 말할 자격이 될까요.”

조 변호사는 자신을 둘러싼 각종 공격에 맞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부족한 것은 사법고시 출신 ‘선배 변호사’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같은 사무실에 있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로스쿨 출신이라는 이유로 뒤처져 보이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그는 “내가 충분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땄는데 고객들에게 신뢰를 드리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 더더욱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수임료를 받지 못하더라도 다른 변호사들이 기피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소송을 맡아서 했다. 소위 ‘질 가능성이 많은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더 수임했다. 다퉈볼 여지가 있는 사건이지만 사법부가 관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들을 법리적으로 다퉈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일부는 지고, 일부는 이겼다.

그가 ‘손익분기점’을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개업 2년차를 넘길 무렵부터였다. 지금은 상담을 포함해 일주일에 평균 3~4건 정도 사건을 수임한다. “굳이 변호사 도움이 필요없는 사건들은 일부러 돈을 받지 않고 서면을 써드리거나 도움을 드렸는데 2년 정도 지나니 그분들이 지인을 소개해주거나 본인 사건을 의뢰하면서 ‘아, 이제 변호사 일만으로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가 됐습니다.”

그는 현재 승민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이 소속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로스쿨 제도는 법조인이 되는 문턱을 낮췄지만 로스쿨에 도전하는 일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로스쿨 제도의 도입 취지는 국민 옆에서 더 쉽게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라는 것인 만큼 열성을 가지는 것은 기본입니다. 법률가로서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모든 일은 생계를 위해 하는 것이겠지만 모든 사건을 돈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버리고, 사람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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