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민 소송, 잿빛 하늘을 몰아내다

2018.10.31 06:00 입력 2018.10.31 06:01 수정

시민이 답이다

[파란 하늘을 찾아-미세먼지 해외견문록](6)시민 소송, 잿빛 하늘을 몰아내다

프랑스 파리에 사는 변호사 르노 그리페(52)는 젊은 시절부터 꽃가루 알레르기와 천식이 있었다. 꽃가루가 날리는 5월을 보내는 게 힘들었다. 1995년 주치의에게 기관지염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며 이유를 묻자 의사는 “알레르기성 체질 때문인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원인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10여년 전부터는 꽃가루가 날리지 않는 겨울에도 점점 숨 쉬기 힘들어졌고 기관지염이 심해졌다. 이제 열두살이 된 막내아들도 자신처럼 기관지염을 심하게 앓는다. 그는 “도대체 나는, 내 아들은 왜 아픈 것인가 알고 싶었다”고 했다. 유전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취재차 찾아간 기자에게 1998년 리베라시옹 신문의 ‘자동차 vs 어린이’라는 헤드라인 기사를 보여줬다. 그는 “오염의 주된 희생자는 어린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증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국가가 대기오염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소송에 참여했다. 그리페는 “대기오염으로 건강이 나빠졌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이기기 어려운 소송”이라면서도 “국가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생각한다. 대기오염 관리를 못하거나 방치하면 정부도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미세먼지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 중인 르노 그리페 변호사. 임아영 기자

미세먼지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 중인 르노 그리페 변호사. 임아영 기자

“대기 오염 피해, 국가 책임져야”
유럽 각국 손배 소송 크게 늘어
실제 영국·독일선 승소 사례도
까다로운 EU·WHO 환경 기준
손해배상 소송의 근거로 작용

대기오염이 시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자 국가를 상대로 행정조치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국내외에서 늘고 있다. 정부가 오염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 법적 책임을 묻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움직임이다. 시민들이 각기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근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모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7월 파리의 요가강사 클로틸드 노네즈(56)가 정부가 대기오염 관리를 소홀히 해 심각한 호흡기 질환을 얻었으니 14만유로(1억8000만원)를 보상하라는 소송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 소송에 그리페 등 30명이 모였다. 소송을 지원하는 올리비아 블롱드 레스피르 회장은 “대기오염이 심각해지면서 오염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묻는 움직임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소송을 통해 국가의 책임 체계가 잡히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제환경단체 클라이언트어스(client earth)는 유럽연합(EU)과 유럽 각국에 대기오염 관련 소송을 제기했고 영국에서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고 있다. 2015년 클라이언트어스는 영국 정부가 대기질 개선 노력을 소홀히 해 시민들이 이산화질소 같은 대기오염물질에 노출됐다고 주장했다. 고등법원은 2015년 이들의 주장을 수용해 정부가 최대한 빠른 시간 내 대기오염 허용치 초과를 막을 수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이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셈이다. 이후 두 번의 소송에서도 법원은 계속 환경단체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지속적으로 정부가 대기질 개선을 위해 내놓은 대책이 미진하다는 환경단체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정부가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2016년 소송에서 클라이언트어스는 영국 정부가 5개 도시에 ‘클린 에어존’을 만들겠다고 내놓은 계획이 부족하다고 주장했고 1심 재판부는 2017년 4월까지 새로운 계획을 발표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정부는 6·8 조기 총선 이후에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했다가 즉각 발표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받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결국 지난해 5월 디젤차 도심 진입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계획을 제출했지만 2월 고등법원은 다시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정부의 대책이 미흡하다는 취지였다.

독일 환경단체인 독일환경행동은 슈투트가르트시 등 지방자치단체에 디젤차 운행을 금지해야 한다고 2015년 제소했고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바덴뷔르템베르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는 지자체가 디젤차의 운행을 금지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 상소했고, 결국 지난 2월 독일 연방행정법원은 슈투트가르트·뒤셀도르프 당국이 대기질을 유지하기 위해 연방 규제와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디젤차의 운행을 금지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법원이 잇따라 이 단체의 손을 들어주면서 지자체의 디젤차 운행 금지 제도가 확산되는 추세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주민 건강 피해를 책임지라며 시민 2명이 지자체장을 형사 고소하기도 했다. EU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대기질이 건강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주장이다.

유럽 환경단체와 시민들이 이렇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은 EU의 기준이 대체로 각국 정부 기준보다 까다롭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EU 기준보다 후퇴한 각국 정부 기준에 대한 비판이 크다. EU 기준은 미세먼지의 24시간 평균치로 50㎍/㎥, 연간 평균치로 40㎍/㎥를 정해두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미세먼지가 24시간 평균치 기준으로 50㎍/㎥, 연간 평균치로 20㎍/㎥를 넘어선 안된다고 보고 있다. EU 기준치는 이보다 느슨한 것이다.

[파란 하늘을 찾아-미세먼지 해외견문록](6)시민 소송, 잿빛 하늘을 몰아내다

미세먼지 수치 유럽 2배인 한국
허용치도 WHO 권고 2배 넘어
환경단체, 한·중 정부 소송 청구
“이를 통해 시민 의식 달라지길”

반면 한국의 미세먼지 허용치는 WHO 권고기준을 2배 가까이 넘는다. 한국은 미세먼지는 24시간 평균치 100㎍/㎥, 연간 평균치 50㎍/㎥로 정해두고 있고 초미세먼지의 경우 24시간 평균치는 35㎍/㎥, 연간 평균치는 15㎍/㎥다. 한국에서 미세먼지 저감 정책이 강력하게 수립되지 못하는 이유는 미세먼지 기준치가 약하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있다.

유럽과 비교하면 한국의 미세먼지 수치는 2배 이상 높다. 지난 6월 국립환경과학원 집계 결과 서울의 연평균 미세먼지(PM10)와 초미세먼지(PM2.5) 농도는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등 외국 대도시의 2배 이상이었다. 지난해 서울의 연평균 미세먼지 수치는 44㎍/㎥, 초미세먼지 수치는 25㎍/㎥였지만 지난해 파리의 연평균 미세먼지는 21㎍/㎥, 초미세먼지는 14㎍/㎥로 미세먼지의 경우 2배 이상 나빴다.

한국에서도 정부와 중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소송이 진행 중이다.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등 91명이 지난해 4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중국이 국제사회 일원으로 오염물질을 관리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 국제 규범을 위반했고, 한국 정부는 미세먼지의 원인도 파악하지 못한 채 국민의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한국 소송은 한국 정부뿐 아니라 중국 정부를 향해 벌이는 소송이라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현재 중국 정부는 소송 청구에 대한 답이 없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6부가 한국과 중국 사이 조약에 따라 중국 정부에 송달서류를 보냈지만 중국 정부는 반응이 없다. 재판부는 중국 정부에 서류 송달을 계속 시도해보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11일 1차 변론에서 한국 정부 측 대리인은 “예전부터 미세먼지에 대한 다각적 대응책을 마련해왔고 원고가 주장한 법적 책임은 국가에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가 다각도로 노력했고 법적 책임까지 질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소송을 진행하는 환경재단의 지현영 변호사는 대기질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는 국내 환경 기준은 법적 기준이 아니라 행정 목표라고 주장한다”며 “환경 기준은 지켜져야 하는 강제성이 있다”고 말했다.

소송은 시민들이 더 이상 나쁜 대기 상태를 참고 견디지 않고 국가에 책임을 묻겠다는 시도다. 소송을 통해 시민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지 변호사는 “유럽에서는 정부 정책을 개선하는 소송이 승소하는 흐름을 봤을 때 우리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미흡하다면 법적 판단까지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의 정책 실패로 마스크, 공기청정기 등의 지출을 하게 된 책임도 법원에서 물을 예정인데 시민들이 이 소송으로 미세먼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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