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개’ 보며 연민만 하던 나를 실천의 길 걷게 해준 봉사자들

2019.04.19 16:24 입력 2019.04.19 16:29 수정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어느 날 부둣가에서 심하게 다친 개를 보았다. 개는 두개골이 훤히 보이도록 도려진 머리 가죽을 덜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나는 개가 내게 다가오지 않기를 빌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고 미안해서다. ‘내가 뭘 해줄 수 있겠어? 여긴 동물병원도 없다는데? 저런 개들을 일일이 돕다간 애니멀 호더가 될걸.’ 자신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다 변명일 뿐이었다. 개는 나를 지나쳐갔다. 애절한 눈빛으로 잠깐 내 눈을 쳐다봤지만 워낙 독립적인 발리개(Bali Dog)답게 금세 체념하고 발길을 옮겼다. 그날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런 일은 자주 반복됐다. 파리들이 상처에 알을 까서 피부가 괴사한 채로 돌아다니는 개는 흔하다. 관광객들은 종종 슬프고 찝찝한 얼굴로 섬에서 목격한 개들 이야기를 나눈다. 도시에서는 생명력을 다한 동물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된다. 시민들이 죄책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누사프니다의 유일한 수의사 카덱이 민가의 마당에서 개에게 중성화 수술을 하고 있다. 그의 티셔츠 등판엔 ‘나를 믿으세요, 나는 수의사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누사프니다의 유일한 수의사 카덱이 민가의 마당에서 개에게 중성화 수술을 하고 있다. 그의 티셔츠 등판엔 ‘나를 믿으세요, 나는 수의사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내게 연민을 실천으로 바꾸는 방법을 알려준 것은 ‘파우 오브 누사프니다(Paw of Nusa Penida, 이하 프니다 파우)’의 재키(Jacquie)였다. 프니다 파우는 비영리 동물보호단체다. ‘단체’라곤 하나 이제 시작 단계로, 설립자인 재키와 수의사 카덱(Kadek)이 변변한 설비나 후원금도 없이 동분서주하고 있다. 식당에서 우연히 재키를 만나 대화를 나눈 후, 나는 그들의 활동에 호기심이 생겼다. 재키와 카덱은 개들을 중성화시키러 마을을 돌아다니는 날 나를 동행시켜 주었다. 몹시 더운 날이었다.

도시 배회 불쌍한 개들 마주할 땐
‘귀찮고 미안해서’ 눈 피하기 급급
시민들도 죄책감·불쾌감 없이 외면

우연히 찾은 ‘동물보호 단체’ 방문
변변한 후원금도 없이 분주한 활동
외면받는 생명 보듬는 모습에 감동
덕분에 동물 바라보는 눈빛 달라져

“발리개는 인간에게 알려진 개들 중 가장 오래된 종이에요. 튼튼하고 면역력이 강하고 영리해서 길에서도 잘 살아남죠.” 재키가 설명했다. 발리개들은 충성심도 강하다. 주인이 돌보지 않아서 사실상 이웃이 먹여살리는데도 애처로울 정도로 주인만 따르는 발리개를 많이 봤다. “여기 사람들은 도시인들처럼 개를 애지중지하지 않아요. 고양이는 쥐라도 잡는데 개는 쓸모가 없다는 거죠. 개에게 의료행위를 하는 건 상상도 못해요. 암캐가 태어나면 버리기도 해요. 자꾸 새끼를 낳아서 귀찮아질 테니까. 얼마 전에도 누가 암캉아지 두 마리를 비닐에 담아 숲에 버린 걸 구조했어요. 유럽인 여행자들이 입양하고 싶대서 방법을 알아보는 중이에요. 발리는 동물의 해외 반출입을 금하지만 다른 도시를 통해서 입양시키는 업체들이 있다고 해서요.”

비영리 동물보호단체 ‘파우 오브 누사프니다’의 설립자 재키가 활동 초반에 구조한 고양이.

비영리 동물보호단체 ‘파우 오브 누사프니다’의 설립자 재키가 활동 초반에 구조한 고양이.

재키는 누사프니다 최초의 서양 이민자 중 한 명이다. 5년 전 그가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섬 전체에 자동차가 한 대뿐일 정도로 한산했다. 그는 발리에서조차 보기 힘든 진짜 앤티크 나무 집을 사들여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자티(Jati) 방갈로는 그 건물들만으로도 들를 가치가 있다. 하지만 재키의 평온한 은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용한 곳에서 편히 살려고 왔죠. 호주에서 개 훈련사 수업을 받긴 했지만 이런 일을 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심하게 다친 개를 발견했고, 치료를 해주었더니 내 집에 눌러앉았어요. 1m도 안되는 목줄에 묶인 채 굶고 학대당하는 개를 구조하기도 했죠. 손님들이 만지고 밥을 주는 바람에 눌러앉은 개도 있어요.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재키네 개’라고 했죠. 관광객들이 무책임하게 유기견과 접촉하면 이런 일이 생겨요. 사람들은 불쌍한 개, 고양이를 보면 나한테 연락을 하기 시작했어요. 주변에 입양을 보내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죠. ‘이대로는 안돼! 대책을 세워야 해!’ 그래서 카덱을 설득했죠.”

누사프니다에서 나고 자란 카덱은 누사프니다, 누사체닝안, 누사렘봉안을 관할하는 공식 수의사다. 소, 돼지가 아니라 주인 없는 개들을 치료한다는 건 이 젊은이에게도 낯선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워낙 동물을 좋아하는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전 8시에 만나 각자 스쿠터를 몰고 처음 들른 곳은 섬 일주도로 한쪽에 있는 마당 넓은 집이었다. 최근 출산을 한 듯 젖이 늘어진 까만 중형견 한 마리가 정자 아래 엎드려 있었다. 카덱은 개를 쳐다보지도 않고 주인들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평소엔 자기한테 관심도 없던 인간들이 갑자기 쳐다보면서 수군거리면 개들이 눈치를 채요. ‘어어 뭔가 잘못됐어.’ 그러고는 숲으로 도망을 가버려요. 수술 자체보다 도망간 개들을 쫓아다니는 데 더 오래 걸리곤 해요.” 재키가 말했다. 주인 할머니가 커피와 물과 과자를 내주었다. 그것이 그날 수의사 카덱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이 일의 좋은 점이 하나 있어요. 지역민들의 집을 구경하는 거예요.” 재키가 말했다. 카덱이 개를 마취시키는 동안 재키와 나는 할머니가 기계로 코코넛 열매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도네시아 음식의 기본은 한국 음식과 비슷하다. 나시 짬뿌르는 나물비빔밥, 렌당은 갈비찜 같다. 차이라면 양념에 코코넛, 땅콩, 카레를 많이 쓴다는 거다. 그 때문에 풍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카덱은 정자에 개를 눕혀 놓고 수술을 진행했다. 대여섯 살 먹은 주인집 꼬마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런 아이들이 자라면 자연스럽게 동물에 대한 인식이 바뀌겠죠.” 재키가 말했다. 카덱은 개가 먹을 항생제를 꼬마에게 건네며 용법을 설명했다. 꼬마는 믿음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니다 파우의 활약이 실제 이 섬의 동물 개체수 조절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교육효과는 확실한 듯하다.

카덱과 재키가 10시간 동안 다섯 마리 개들의 중성화 수술을 하는 고된 작업을 마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카덱과 재키가 10시간 동안 다섯 마리 개들의 중성화 수술을 하는 고된 작업을 마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도착한 다음 집은 환경이 좀 더 열악했다. 집은 덤불 한가운데였고 울타리가 없었다. 재키가 여러 번 설득한 끝에 주인이 중성화 수술에 동의했다고 한다. 수술할 개는 두 마리였다. 둘 다 출산 경험이 있었고, 그중 하나는 아직 강아지들을 돌보고 있었다. 카덱이 주인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털이 짧고 까만 첫째 개가 덤불로 도망쳤다. 카덱이 닌자처럼 블로건으로 마취총을 쏴서 간신히 잡았다. 수의학과에서 그런 것도 배우냐고 묻자 카덱이 웃었다. “아뇨. 여기서 진료를 하자니 필요하더라고요. 혼자 배웠어요.” 수술에 필요한 약품들도 카덱이 개인 돈으로 충당하고 있다.

카덱은 쓰레기장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까만 개를 수술했다. 그걸 목격한 보더콜리 스타일의 얼룩무늬 둘째 개가 도망을 쳐버려서 찾는 데 30분이 걸렸다. 카덱이 개의 자궁을 꺼내고 자르고 꿰매는 피비린내 나는 일을 하는 동안 재키와 나는 헛간 아궁이에서 코코넛 오일이 끓는 걸 구경했다. 그들이 하는 피비린내 나는 일에는 손쓸 수 없이 다친 개를 안락사시키는 작업도 포함된다. 그렇다. 이것은 별로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다음은 상점에서 키우는 노란색 대형견이었다. 그 개는 잦은 출산으로 배가 울룩불룩 늘어져 있었다. 이번엔 주인집 마루에 눕혀 놓고 수술을 했다. 개 주인은 그들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개가 낳았을 수십마리 새끼들은 모두 어떻게 됐을까? 나는 답이 뻔한 질문을 떠올렸다.

마지막은 주인 없는 개였다. 발리의 7대 힌두교 사찰 중 하나인 푸라 달렘 페드(Pura Dalem Ped)가 누사프니다에 있는데, 그곳 주차장에 개가 많다고 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세 마리가 어슬렁대고 있었다. 재키와 카덱은 식당에서 졸고 있는 노란 개를 골랐다. 카덱이 살금살금 다가가 엉덩이에 첫 번째 마취제를 놓자 개가 주차장으로 도망을 쳤다. 재키와 나는 덤불로 빠지는 길을 막아섰다. 개는 휘청거리면서 구토를 했는데, 푸짐한 식사를 한 지 얼마 안된 듯했다. 그 식당 주인들이 인심이 좋은 모양이다. 카덱은 두 번째 마취주사를 맞고 완전히 늘어진 개를 빈 건물로 옮겼다. 그가 수술을 마치고 표식으로 개의 귀를 조금 잘라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마취가 덜 풀린 채 차도로 뛰어드는 걸 막기 위해 개를 건물 안쪽으로 밀어넣고,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프니다 파우는 지금까지 62마리 암캐와 일부 수캐, 9마리 암고양이를 중성화시켰고, 치료와 안락사를 포함해 총 89마리 동물을 도왔다. 누사프니다의 수천마리 동물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 사람들은 흔히 환경 활동가들을 낭만적인 이상주의자 취급한다. 재키와 카덱은 그보단 골목에 쌓인 눈을 치우는 깐깐한 이웃들에 가까워 보인다. 폭설이 내리면 누군가는 외출을 포기하고, 누군가는 바빠서 뒤뚱뒤뚱 지나쳐 가고, 누군가는 나라꼴이 이게 뭐냐고 투덜거린다. 그런데 누군가는 빗자루를 들고 나와 눈을 치운다. 유난히 선량해서라기보단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가장 못 견디는 사람들이어서, 불평보단 행동이 효과적이란 걸 알아서다. 그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불쌍한 개들의 눈을 피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 대가로 나는 그들을 후원할 것이다.



[다른 삶]‘상처 입은 개’ 보며 연민만 하던 나를 실천의 길 걷게 해준 봉사자들


◆필자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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