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삶 즐기려면 영어가 유창해야 한다니…누구도 알려준 적 없는 현실과 마주한, 그날의 열패감

2019.04.13 06:00 입력 2019.04.13 19:25 수정
이대한

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영어는 과학 공동체의 공통어(링구아 프랑카)이다. 국제 학술지와 학술대회는 영어로 소통이 이루어진다. 좋은 논문을 쓰려면 좋은 연구결과와 함께 좋은 영어 문장이 뒤따라야 한다. 최근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언어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사진 속 대학원생을 포함해 연구실 동료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대한 제공

영어는 과학 공동체의 공통어(링구아 프랑카)이다. 국제 학술지와 학술대회는 영어로 소통이 이루어진다. 좋은 논문을 쓰려면 좋은 연구결과와 함께 좋은 영어 문장이 뒤따라야 한다. 최근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언어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사진 속 대학원생을 포함해 연구실 동료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대한 제공

얼마 전, 논문을 탈고하고 다른 저자들과 회람하는 과정에서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저자 중에 프랑스인이 두 명 포함되어 있는데, 자신들의 이름이 잘못 적혀있다며 수정을 요청해왔다. 두 사람의 이름에 들어있는 é를 내가 e로 적었기 때문이다.(나는 아직도 é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모른다)

처음엔 이름을 틀리게 써 저자들을 언짢게 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억울함이 몰려왔다. 나도 논문에 내 이름을 모국어로 ‘이대한’이라고 적지 않고 영어로 ‘Daehan Lee’라고 적는데, 왜 그들의 이름은 키보드에도 없는 글자를 찾아서 입력해줘야 하는가. 프랑스인들의 이름과 소속을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그들의 언어로 고쳐주고 있자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받는 언어적 혜택에 대한 삐딱한 생각은 다른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프랑스인들이 받는 혜택은 영어권의 과학자들이 누리는 특혜에 비하면 사실 별것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과 소속에 대해서만 간신히 언어 주권을 지킬 수 있을 뿐, 그들 또한 외국어인 영어로 논문을 써야 하는 건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영어는 서로 다른 모어를 사용하는 과학자들의 소통을 매개하는 공통어, 즉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다. 국제학회에서 발표는 영어로 이루어지며, 국제 학술지도 영어로 쓰인 논문을 출판한다. 영어를 잘한다고 과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를 못하면 국경 없는 과학 활동에 참여하기가 어렵다. 과학은 연구실에 고립된 사적인 활동이 아니라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진행되는 사회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영어는 그것을 갖춘 과학자들에게는 소통의 문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소외의 벽이 된다. 대학원생 시절, 처음 참석한 국제학회에서 나는 그 벽에 부딪혀 쓰디쓴 좌절을 맛보았다. 학회 중에 참가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소개하는 포스터를 걸고 발표하는 포스터 세션이 열리는데, 당연히 발표와 토론도 모두 영어로 이뤄진다.

대학원생 때 처음 가본 국제학회
엄청나게 주고받는 영어 토론
내용 이해되는데 입은 안 떨어져
멍청이가 된 기분으로 빠져나와

내가 흥미롭게 보았던 몇몇 포스터 앞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는데, 나는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영어 대화에 주눅이 들어 끼어들지 못했다. 소심하게 포스터 사이를 기웃거리다가 결국 토론의 열기로 가득 찬 발표장을 뒤로하고 걸어 나왔던, 멍청이가 된 기분으로 잔디밭에 주저앉아있던 그날 밤의 열패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과학자의 삶을 즐기려면 영어도 유창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누구도 내게 알려준 적 없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했다.

여느 한국인 또래처럼, 나는 어릴 때부터 삶의 아주 많은 자원을 영어를 익히는 데 쏟아부었다. 그 어마어마한 투자 덕분에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정도는 되지만, 그럼에도 영어는 여전히 나에게 불편한 외국어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모두가 영어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는데, 영어권 국가인 미국에 와서 보니 언어가 나의 ‘유리천장’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듣고 사교육을 받으며 엄청난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동안, 미국인들은 다른 무엇을 한다. 이들은 미국에서 자라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언어권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동안 치르는 기회비용을 떠안지 않는다. 그들이 모어로 손쉽게 과학 논문을 읽어 나가는 동안 나는 모르는 단어를 찾고, 영어 문장을 독해해야만 비로소 연구 내용에 접근할 수 있다.

국제학회 발표도 논문도 영어
그들이 모국어 논문 술술 읽을 때
나는 시간·돈 쏟으며 독해 ‘끙끙’

그나마 읽고 듣는 것은 쉬운 편이다. 많은 한국인이 그러하듯, 나도 쓰기와 말하기가 취약하다. 교육과정을 밟아 나가는 동안 읽고 듣는 훈련은 많이 하는 편이지만, 영어로 쓰고 말할 일은 많지가 않다. 우리말로도 글을 쓴다는 것은 여전히 까다로운 일인데, 불편한 외국어로 문장을 지어내는 것은 더 험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논문을 쓰는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논리적인 글을 쓰기 전에 다양한 동의어나 유의어 중에서 정확한 어휘를 골라내고, 관사나 전치사 등 다른 문법적 요소들과 함께 배열하여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내야 했다.

예를 들어 관사(a/an, the)를 제대로 배치하는 것만 해도 보통 난제가 아니었다. 지도교수가 교정을 마친 논문에서 가장 많이 지적을 받은 것도 바로 관사의 사용이었다. 언제 a/an을 넣고 언제 the를 넣어야 하는지는 얼추 감이 잡혔지만, 관사를 넣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명확하게 구분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어려움을 토로하자 지도교수는 본인의 박사 지도교수가 자신에게 한국인 학생의 논문 교정을 부탁하며 “한국인은 이 세상에 관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야”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게다가 문법을 틀리지 않는다고 좋은 문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좋은 문장은 오직 좋은 문장들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영어로 쓰인 수준 높은 글을 숱하게 읽어야만 습득할 수 있는 문장력은 내가 짧은 시간 안에 획득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니다. ‘콩글리시’가 군데군데 섞여 있는 논문 초안을 고치기 위해, 나는 논문을 많이 써 본 (불친절한) 대학원생 한 명을 간절히 붙잡고 거의 한 문장 한 문장 갈아엎어 나가야 했다. 굴욕스러운 과정이었다.

과학자의 전제조건은 아니지만
못하면 국경 없는 활동 어려워
영어는 이 세계에서도 권력이다

이처럼 과학 안팎에서 영어는 누군가에게 불평등한 유리천장이 된다. 좋은 논문·발표는 좋은 연구와 좋은 글쓰기·말하기가 모두 충족되었을 때 가능하다. 학계의 구성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섬세한 소통 능력도 필수적이다. 요컨대 영어가 어눌하면 좋은 연구를 수행하고도 그 가치를 평가받지 못할 수 있고, 학계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구성원들과 소통하기도 매우 어렵다.

그런 영어라는 능력과 권력을 갖추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영어권에서 나고 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불가능한 조건이기도 하다.

언어는 소통을 매개하고, 지식을 축적하고,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수단이다. 동시에 언어는 인간을 통제하고, 계급을 나누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무엇이기도 하다.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서 영어는 권력이며 자본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영어 유치원을 다니고 어학연수를 갈 수 있으면, 운 좋게 외국에서 태어나 이중 언어 구사자가 된다면 그 권력과 자본을 획득하기가 용이하다.

한국 사회는 그런 불평등을 완화하기보다는 확대한다. 영어를 잘하면 입시와 취업이라는 경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영어는 누군가에겐 부와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는 통로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앞을 막고 가로선 장벽이 된다. 오늘도 수많은 청년이 그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한편으로 나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한국어’를 저절로 갖추고 살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깨닫지 못했다. 영어가 지금 나에게 그러하듯, 내 모국어 또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른 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이민자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소외의 장벽이 되고 있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배워야지”라는 말은 지금 나에게 “미국에 왔으면 (과학을 하려면) 영어를 잘해야지”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내가 그들의 소외에 무감했던 것처럼 자신의 모어가 과학계의 링구아 프랑카인 많은 (주류) 과학자들도 내 좌절에 무감할 것이다. 영어라는 장벽은 오롯이 스스로 넘어서야 하는, 내 앞에 놓인 움직일 수 없는 언어적 현실이다. 징징거린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남들이 쉴 때에 나는 더 듣고, 읽고, 쓰고, 말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견디고 쑥스러움을 이겨내야 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연구실에서 예쁜꼬마선충의 ‘언어’를 연구하고 있기도 하다. 영어는 그나마 같은 인간의 언어라 배울 만하지만, 냄새(페로몬)로 소통하는 벌레들의 언어는 짐작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영어가 외국어라면 페로몬 언어는 외계어에 가깝다.

지금껏 영어에 쏟아부은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벌레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앞에 놓인 영어와 페로몬이라는 이중의 언어적 장벽 너머에 과학자로서 꿈꾸는 ‘그곳’이 있다.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높게만 보이는 ‘벽’이 그곳으로 넘어가는 ‘문’이 되는 마법 같은 날이 오기를.

■ 필자 이대한

[다른 삶]과학자의 삶 즐기려면 영어가 유창해야 한다니…누구도 알려준 적 없는 현실과 마주한, 그날의 열패감


벌레 유전학자. 예쁜꼬마선충(노벨상도 여럿 배출한, 이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벌레다)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포닥)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에서 여전히 벌레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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