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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따냐…한반도·연해주·카자흐·우즈벡 유랑한 ‘고려인’입니다

2019.05.25 06:00 입력 송윤경 기자

고려인 정 따냐씨의 가족은 5대에 걸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유랑해왔다. 지금은 남편, 두 자녀와 함께 10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지난 19일 경기 안산시에 있는 따냐씨 집에서 그의 가족사를 들었다. 왼쪽부터 따냐씨, 딸 이미연씨, 남편 이 비아체슬라브씨. 권도현 기자

할머니는 때때로 마당 아궁이에 큰 가마솥을 올리고 옥수수를 삶았다. 그럴 때면 손자, 손녀들은 마당에 모여 신나게 옥수수를 먹었다.

“할머니의 눈에서 ‘사랑’이 보였어요. 손자, 손녀들 배불리 먹이려고 늘 노력하셨던 거, 그게 생각나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외곽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들려달라는 부탁에 ‘할머니’와 ‘옥수수’ 얘기를 꺼냈다. 그의 이름은 정 따냐(텐 따찌아나·42). 자신이 나고 자란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한국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고려인이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러시아 등 구소련 지역의 동포를 일컫는다.

따냐씨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조선어’만 할 수 있었고, 따냐씨는 러시아어를 썼다. 할머니의 눈에서 사랑을 읽은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2010년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눈엔 유독 할머니들이 띄었다. “우리 할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신기하고 따뜻했다. 버스 안에서 어느 할머니와 손자가 정답게 얘기하는 모습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나는 할머니와 저렇게 대화할 수 없었는데, 너무 부러웠어요.”

따냐씨 가족은 5대에 걸쳐 한반도→러시아 연해주→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한반도(한국)로 이어지는 유랑을 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증조할머니는 한반도 이북 땅에서 태어나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았다. 할아버지·할머니는 연해주 한인마을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에서 자녀(따냐씨 아버지 5남매)를 낳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 따냐씨의 딸과 아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한국에 뿌리내리려 애쓰고 있다. 이제 따냐씨는 자신의 손자·손녀가 이곳 한국에서 태어나길 바란다.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고려인의 존재는 기억해야 할 ‘역사’ 정도로 여겨지지만 이들은 이미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이다. 출입국관리 당국에 따르면 한국 땅에 있는 고려인은 약 7만명. 이들이 데려온 자녀까지 포함하면 한국의 고려인 규모는 약 8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대개 따냐씨처럼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서 왔다. 한국어를 하지 못해 주로 중소규모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경기 안산, 인천, 광주 등지에서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식민통치에 항거한 순국선열을 기리는 행사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이 시기를 건너온 한민족의 거대한 흐름 속에 근현대사의 거친 물결에 파도처럼 부서졌다가 다시 일어섰던 ‘고려인’이 있다.

이들은 지배층의 착취,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폭력, 끝없는 이주 속에서도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녀를 열렬히 키웠다. 1세기가 넘는 시간을 돌아 다시 한반도 땅으로 ‘귀환’한 따냐씨 가족의 이야기에는 한민족의 또 다른 역사가 담겨 있다.

◆우즈벡서도 한국서도 ‘이방인’…아이들은 차별없는 ‘한국인’으로 살길

소련 붕괴 후 우즈벡인들이 말했다…“너희 땅으로 가라”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우리땅은 어디인가’ 생각해봐
한국 온 10년 동안 공장 전전…반말은 예사, 욕설도 들어
지금 직장 와서 처음 들은 “OO씨”, 인간대접 받는 느낌

정 따냐(42·사진)·이 비아체슬라브(43)씨 부부는 2010년, 딸과 아들은 2012년 한국에 왔다. 두 자녀를 각각 중학교, 초등학교에 보낸 첫해에 큰 고비가 찾아왔다. 아들인 이 안드레이군(19)은 그래도 고려인 아이들이 있는 안산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딸 이미연씨(20)는 외국 국적 학생이 단 한 명도 없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미연씨는 “첫 1년 동안 내내 학교에선 그냥 앉아 있기만 했고, 밤마다 울었다”고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을 보며 아버지는 “그냥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따냐씨는 아침마다 딸을 다독여 등교시켰다. “우리에겐 목표가 있다. 그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엄마의 굳센 의지 때문에라도 학교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연씨는 교과서의 한글 낱말을 모두 러시아어로 번역해 가필한 다음 이해될 때까지 읽고, 수업을 들었다.

한국말에 능통한 중국 동포를 생각하면 러시아어만 쓰는 고려인들이 얼핏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전승되지 않은 배경엔 고려인들만의 슬픈 역사가 있다.

■ 말과 글을 잃은 이유

따냐씨의 증조부모 세대는 한반도 최초의 ‘이민세대’이자 ‘개척세대’였다. 19세기 말 함경도 농민들은 지방관료와 지주의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고 그곳의 황무지를 일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연해주로의 이민이 얼마나 대규모였는지, 1900년대 초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는 3만명에 달했다(김호준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따냐씨의 할아버지·할머니인 정 사예프, 박 니나는 이 무렵 연해주의 한인자치마을에서 태어났다(각각 1913년, 1914년 출생). 그들이 태어난 한인마을은 러시아에 있었지만 언어와 풍습은 조선과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러시아 연해주가 항일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하던 시기(1920년대)에 결혼했고 아이 셋을 낳았다.

고려인들이 말과 글을 지켜갈 의지를 잃게 만드는 비극은 1937년 일어났다. 그해 소련의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18만명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고려인들은 시베리아 열차 화물칸에 실려 연해주로부터 약 6000㎞ 떨어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의 허허벌판에 버려졌다. 열차에선 사망자가 속출했다. 정 사예프·박 니나 부부의 품 안에서 아이 셋이 모두 숨을 거뒀다. 박 니나의 여섯 남매 중에서도 네 사람이 죽었다.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고려인들은 통곡을 하며 철길 옆에 시신을 묻었다.

정 사예프와 박 니나 부부가 내린 곳은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였다. 고려인들은 ‘이주지’에 닿은 후에도 토굴에서 연명했다. 이 과정에서도 친지와 지인들이 죽어나갔다. 두 부부가 서로의 곁을 지키며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따냐씨)이었다. 고려인들은 날이 밝으면 죽은 이들을 땅에 묻고 갈대밭과 늪을 논밭으로 일궜다.

정 사예프와 박 니나 부부는 카자흐스탄에서 19년간 살며 다시 아들 둘, 딸 셋을 낳았다. 그중 둘째가 따냐씨의 아버지 정 표도르다. 이 가족은 이후 기후가 조금 더 따뜻한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 살았고, 정 표도르는 박 클라브치아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이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농장 일을 했다. 따냐씨의 어린 시절 풍경에 등장하는 커다란 옥수수 농장이 이곳이다.

따냐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말’을 놓고 자주 다툰 것을 기억한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조선말’을 고집했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세대는 달랐다. 따냐씨의 어머니는 ‘어차피 소련에서 살 텐데 조선말을 알고 있어봐야 뭐하느냐’고 대꾸했다. 소련은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고, 한민족의 노래를 부르는 것마저 막았다. 고려인의 문학작품도 검열해 강제이주를 연상케 하는 표현을 모두 삭제했다. 강제이주 10여년 후 태어난 따냐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학교에서 러시아어로 공부했다. 조선말을 알아듣기는 했지만 러시아어로 대답했고 따냐씨를 비롯한 자녀들에게도 굳이 조선말을 가르치지 않았다.

따냐씨의 아들이 한국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해 ‘매트리스를 치우라’는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가 선생님에게 호되게 맞은 일이 있었다. 아들 안드레이군은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는데도 일에 지쳐 있는 엄마를 생각해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따냐씨는 뒤늦게 학교의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러시아말을 잘 못한다고 맞은 적이 있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고려인 후손들은 말과 글은 이어받지 못했지만 전통만은 지켰다. 가을에는 늘 생고추를 갈아 김장을 했고 환갑 같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친척이 모여 사흘 동안 음식을 준비했다. 한복도 입었다. 아이들 돌잔치에는 쌀, 펜, 실 등을 놓고 돌잡이도 했다. 평소 식습관은 고려인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따냐씨의 경우에는 아침에는 치즈를 곁들여 빵을 먹었고 점심·저녁에는 밥을 먹었다.

부모님 칠순잔치 때 한복 입고 ‘덩실’ 정 따냐(텐 따찌아나·왼쪽)씨 가족이 2017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부모님의 칠순잔치 때 한복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 정 따냐씨 제공

■ 소련 해체 후의 혼란

따냐씨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교사는 고등교육을 마친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진출하는 직업군이었다.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1년간 교사로 일했다. 하지만 국내외 정치상황이 또 한번 따냐씨 가족을 덮쳤다. 1991년 말 소련이 붕괴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살던 곳은 ‘소련’에서 우즈벡 민족의 나라 ‘우즈베키스탄’이 됐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공용어가 러시아어에서 우즈벡어로 바뀌었다. “학교 교장선생님 같은 (중요한) 자리는” 모두 우즈벡인에게 돌아갔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찾아왔고 동네 식료품 가게엔 소금, 비누 같은 물건조차 없었다.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교사를 그만두고 시장에서 지인들과 함께 고려인들을 상대로 반찬가게를 했다. 지금도 고려인 밀집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근김치’를 수북하게 쌓아놓고 팔았다.

소련 붕괴 이후 따냐씨는 우즈벡 사람들로부터 ‘너희 땅으로 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우리 땅은 어디인가’를 생각해보게 됐다. 따냐씨 또래의 차 이고르씨(41) 가족이 겪은 일은, 소련 붕괴 직후 중앙아시아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고르씨의 아버지는 타타르족 지인과 함께 제빵공장을 운영했다. 그런데 소련 붕괴 후 “깡패”들이 아버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공장을 넘기지 않으면 반드시 네 아들의 피를 보겠다.’ 이런 협박 전화가 수시로 걸려왔다. 실제로 이고르씨는 미행을 당했다. 결국 아버지는 타타르족 동업자와 함께 일을 관뒀고, 공장은 우즈벡인들 손에 들어갔다. 이 일로 그의 아버지는 뇌졸중을 얻어 1999년 사망했다. 이고르씨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따냐씨 동네에서도 ‘비(非)우즈벡인’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러시아 민족은 러시아로 가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가고, 독일 민족도 독일로 가고…. 마을 사람들이 떠나는 걸 매일매일 지켜보던 때가 있었죠.” 이런 혼란 속에서도 따냐씨는 무역회사에 다니는 고려인 남편 이 비아체슬라브씨를 만나 결혼했다. “가진 것이 사랑밖에 없던 시절”이라, 1999년에 태어난 딸 이름을 러시아어로 ‘사랑’이라 지었다(러시아어 ‘사랑’은 한국어로는 발음하기 어려워 한국 이주 뒤 딸 이름을 미연으로 고쳤다. ‘미연’은 ‘아름다운 연꽃’이란 뜻으로 따냐씨가 직접 지었다). 이듬해 아들 안드레이를 얻었다.

정체성 혼란을 겪은 따냐씨와 다르게, 그의 아버지 정 표도르씨는 우즈베키스탄을 자신의 나라로 여겼다. 아버지는 평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좋아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정 표도르씨는 딸이 한국에 10년째 살고 있는데도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따냐씨 부부가 딸·아들을 두고 2년간 한국에 먼저 들어와 일하는 동안 어머니는 손녀와 손자를 돌봐주었다. 어머니는 한국에 와보고 싶어 했지만 심장질환으로 고생하다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따냐씨 가족의 ‘산증인’인 할머니는 1960년대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2014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할머니는 사고로 첫아들을 잃었지만 나머지 4남매를 있는 힘껏 키웠다. 표도르씨는 종합기술 전문학교를 나왔고, 따냐씨의 삼촌 블라디미르는 화가였다. 고모 안토니나와 소피야는 각각 교사와 회계사로 일했다. 따냐씨의 자녀에 대한 헌신은 할머니를 닮은 듯했고, “살고 있는 곳을 고향으로 여기고 사랑하겠다”는 신념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듯했다.

교사 그만두고 시장에서 반찬 팔던 시절 소련이 해체된 후 정 따냐씨(오른쪽)는 교사를 그만두고 우즈베키스탄 시장에서 지인들과 함께 고려인식 반찬을 만들어 팔았다. 고려인들이 즐겨 먹는 ‘당근김치’가 수북이 쌓여 있다. 정 따냐씨 제공

■ 우여곡절 끝 ‘우리 땅’ 찾아왔지만…

‘우리 땅’을 찾아왔지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서도 이방인이었다. 10년 동안 경기 지역 공장을 전전해온 따냐씨는 그간 겪은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은 세 명이 하는 일을 우리(자신과 같은 동포와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한 명에게 시키고, 젊은 남자 관리자들은 나이가 많은 여자한테도 그냥 반말을 해요. ‘너 바보야?’라는 막말이나 욕설도 해요.” 2년 동안 한 공장에서 일하고도 퇴직금 한 푼 못 받은 적도 있었다.

때로는 ‘화풀이성’ 해고도 당했다. “ ‘불량’이 계속 나오니까 관리자가 와서 ‘왜 이렇게 하느냐’고 화를 내요. 제가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니까, ‘우리는 시킨 대로 하고 있었어요’라고 답했는데 저보고 ‘지금 당장 집에 가라’고…. 말대답하는 게 기분 나쁘다는 거죠.”

그래도 따냐씨 가족은 큰 사고는 입지 않았다. 남편 비아체슬라브씨가 일하던 곳에서는 한 고려인이 낡은 프레스 기계에 팔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그 고려인은 합의금으로 2000만원을 받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건설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끔찍한 사고를 당하는 것을 목격한 남편은 요즘도 가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중을 드러낸다.

■ 후손만은 한국에서 정착했으면

따냐씨는 두 달 전부터 한국인 직원들이 다수인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서로 ‘○○씨’라 부르며 존대한다. “처음으로 사람 대접받는 느낌이에요. 그전까지는 사람 아니고… 바닥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가 한국인들과 섞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인간 대접’이었다. 그래서 따냐씨는 자녀들만은 반드시 한국인으로 인정받기를 바란다. 딸 미연씨는 경기도의 한 ‘공유오피스’에서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업체의 블로그를 딸이 관리하고 있는데, 따냐씨는 매일같이 그 블로그에 들어가 딸이 올린 게시물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사실은 저도 제 인생이 아쉬워요. 꿈도 못 이뤘고…. 이제 저의 새로운 꿈은 아이들이 여기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도록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제 손자·손녀들이 이런 말도 하는 거죠.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국에 외국인처럼 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덕분에 우리는 한국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국에 온 후 10년 동안 밤잠을 아껴가며 공부했지만 아직 따냐씨의 한국어는 능숙한 편이 아니다. 지난 19일 저녁, 경기 안산시의 따냐씨 집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딸, 아들이 돌아가며 통역을 맡았다. 그의 남편은 아예 한국말을 익히지 못했다. 지금은 네 가족이 러시아어로 대화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 자녀가 결혼하고 손자·손녀가 태어나면 또 다른 소통 단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조선 말엽부터 시작된 유랑의 역사, 제국주의와 냉전 그리고 전체주의에 휩쓸리며 큰 희생을 감내했던 고려인들.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고려인 동포들이 이주민으로서의 불안감과 단절감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일상을 누릴 날은 언제쯤 올까.

구소련 지역 거주 동포들 왜 고려인이라고 부를까

구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를 ‘고려인’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19세기 말부터 러시아 연해주로 진출한 조선인의 후손이다. 그런데 왜 ‘고려 사람’ 혹은 ‘고려인’이라고 부르게 됐을까.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김호준 저)에 따르면 러시아의 탐험가가 1860년에 연해주를 찾았을 당시부터 이미 조선인들은 자신을 ‘고려사람’으로 칭했다고 한다. 고려인 통사를 엮어낸 김호준 작가는 이 책에서 “조선 사람들이 연해주가 고구려 땅이었음을 과시하기 위해 스스로 고려사람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후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한 것도 ‘고려인’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쓰게 된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비롯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은 50만명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연해주는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였다. 시민단체 ‘고려인너머’는 한국 사회가 이들을 잊지 않도록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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