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드문 ‘절주운동 발상지’…술자리 적어 건강과 평화를 얻었죠

2019.10.25 16:25 입력 2019.10.25 16:28 수정
이대한

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내가 살고 있는 시카고 근교의 에번스턴은 인구 7만명이 조금 넘는 아기자기한 ‘대학 도시(college town)’다. 나의 직장이기도 한 노스웨스턴대학은 이 도시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캠퍼스가 도시의 많은 면적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학생과 교직원들이 에번스턴의 거주 인구와 유동 인구의 상당수를 이룬다. 그 덕분에 도시가 젊고 다양성이 넘친다.

매일 출퇴근하면서 지나쳤던 오래된 건물이 바로 절주운동의 입지전적 인물인 프랜시스 윌러드의 자택이면서 기독교여성절주회의 본부 역할까지 했던 곳이었다. 현재는 ‘프랜시스 윌러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매일 출퇴근하면서 지나쳤던 오래된 건물이 바로 절주운동의 입지전적 인물인 프랜시스 윌러드의 자택이면서 기독교여성절주회의 본부 역할까지 했던 곳이었다. 현재는 ‘프랜시스 윌러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동네의 이모저모가 대략 파악되었을 무렵부터 의문스러운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낮이면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도시가 밤에는 너무나도 고요해지는 것이다. 술 취한 대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대학가의 밤에 익숙했던 나에게 에번스턴의 밤은 낯선 풍경으로 다가왔다. 미국의 명문대생들은 공부하느라 밤에 놀지도 않는 것일까. 취객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동 인구에 비해 술집도 너무 적었다. 그나마 있는 술집들도 텅텅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과 한국 대학생의 차이가 있다면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만으로 19세가 되는 해의 1월1일,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 되는 순간부터 술을 마실 수 있는 한국에선 대부분의 대학생이 합법적으로 음주를 즐길 수 있다. 반면 미국의 대학생은 만 21세가 되어야 술을 마실 수 있다. 따라서 입학과 함께 선배들의 지도(?)로 본격적인 음주를 시작하는 한국의 대학생들과 달리 이곳의 신입생 대부분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불가능하다(이곳의 신분증 검사는 정말 엄격해서 나도 아직 술집과 마트에서 늘 신분증 확인을 요구받는다).

실제로 연구실에서 종종 축하할 일이 있어 샴페인을 터뜨릴 때면 학부생 인턴들은 정중히 샴페인을 사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별생각 없이 술을 ‘안’ 마시는 학생이구나 하고 처음에 생각했다가, 뒤늦게 나이 때문에 술을 ‘못’ 마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학부생들이 참석할 수 있는 피크닉 행사에서는 애초에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알코올 프리’로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음주 가능 연령의 차이는 고요한 대학도시의 밤에 대한 나의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낮에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 중 저학년 대학생은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고학년 대학생,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 교직원 및 일반 시민들은 밤이면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조용한 대학 도시의 밤에 대해 종종 주변의 미국인들에게 질문해보았지만 석연치 않은 설명만 돌아올 뿐이었다.

19세기 감리교 주도 절주운동
기독교여성절주회 본거지 명성
에번스턴 평화 ‘금주법의 역설’

지도교수 초대 연 2회 파티만
한국과 달리 회식 거의 안 해
논문 축하할 때도 샴페인으로

스트레스 해소엔 술 대신 운동
저녁은 가족과 함께할 수 있어
절주, 개인·사회 건강회복의 길

그런데 최근 그 미스터리가 풀렸다. 어쩌다 노스웨스턴대에서 학부를 졸업한 연구실 동료 니콜에게 나의 의문을 들려주었더니, “에번스턴이 ‘절주(temperance)’의 도시니까!”라는 명쾌한 대답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니콜에게 부연 설명을 요청하니 “에번스턴이 절주운동의 중심지였으며, 프랜시스 윌러드라는 절주운동의 입지전적인 인물과 그녀가 대표를 지낸 기독교여성절주회(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의 본거지였다”는 것이다. 니콜은 심지어 내가 매일 출퇴근하면서 지나쳤던 오래된 건물이 바로 프랜시스 윌러드의 자택이면서 기독교여성절주회의 본부 역할까지 했던 곳이자, 현재는 ‘프랜시스 윌러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노스웨스턴대학이 감리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며, 대학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존 에번스(John Evans)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 또한 에번스턴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미국의 절주운동이 감리교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감리교도의 세가 강한 에번스턴이 1852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120년 동안 주류의 판매가 금지된 ‘드라이 커뮤니티(dry community)’였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보낸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면 ‘도수’가 상당한 청춘이었다. 주당은 아니었지만 술과 술자리를 즐기는 편이었다. 보통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술자리가 있었고, 자정을 넘겨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일이 허다했다. 안주에 따라, 기분에 따라 소주를 마시기도, 맥주를 마시기도, 둘을 섞어 마시기도 했고, 때로는 식사에 반주를 곁들이고 때로는 술에 안주를 곁들였다.

개인주의적인 미국 사회 중에서도 금주운동의 본거지였던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긴 이후, 내 생활의 ‘도수’도 상당히 떨어졌다. 우선 삶에서 회식이 사라졌다. 한국에서는 개강, 졸업, 논문 게재 등의 대소사를 기념하며 연간 수차례의 연구실 회식이 있었는데, 이곳에선 그런 회식에 견줄 만한 자리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도교수인 에릭이 여름과 연말에 한 번씩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지만 두 시간 정도면 자리가 마무리되고, 술은 가볍게 맥주 한잔씩 걸치는 정도다. 한국에서는 식당에서 성대하게 벌어졌던 논문 축하 파티가 여기서는 회의실에서 샴페인 한 병을 터뜨리고 견과류를 나눠 먹는 정도로 소박하게 진행된다.

아주 가끔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도 있지만 한국처럼 장소를 옮겨 한잔 더 마시는 일은 거의 벌어진 적이 없다. 술자리를 가진다고 해도 한국처럼 술을 따라주고, 마시길 권유하고, 그런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위기다. 소주나 병맥주를 나눠 마시는 한국과 달리 이곳에선 주로 각자 맥주든 칵테일이든 한잔씩 주문해 먹고, 각자 따로 명세서를 받아서 계산하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여기에선 술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개념 자체가 약해 보인다. 누군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퇴근하고 술 한잔할까?’라는 이야기가 나오던 한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심리치료사(therapist)를 만나보는 게 어때?’라는 권유가 돌아오기도 하고, 스트레스 해소의 대명사를 ‘술’보다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술자리를 가지려고 해도 동네에 마땅히 갈 만한 술집이 없다. 식당들은 대부분 일찍 문을 닫고, 그나마 있는 술집들은 ‘펍(Pub)’으로서 간단한 기본 안주에 술만 파는 가게가 대부분이다. 즐거운 술자리를 완성하는 술, 안주, 술친구의 삼위일체에서 두 꼭짓점을 상실하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갖는 날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덕분에 절주의 도시 에번스턴에서 나도 절제의 삶을 살아보고 있다. 술자리가 주는 즐거움을 잃어버렸지만 얻은 것도 많다. 우선 술로 인한 갈등이 사라졌다. 취담을 수습하느라 고생하거나 귀가 시간 약속을 어길 일도 없어졌다. 그리고 건강해졌다. 술 자체가 몸을 힘들게 하는 것도 있지만, 술자리로 인해 생활의 리듬이 깨져 골골거리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무엇보다 삶이 한결 평화로워졌다.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삶은 힐링 그 자체다.

새로운 환경에서 의도치 않게 경험해보게 된 ‘절주’를 통해 미국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주운동’의 지향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절제되지 못한 음주는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고, 그 결과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렇기에 ‘절주’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건강을 회복하는 한 가지 길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절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19세기 미국에서는 알코올 남용과 중독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특히 알코올에 중독된 남성들의 가정폭력이 심각한 문제였다고 한다. 프랜시스 윌러드가 이끈 기독교여성절주회를 비롯해 금욕적인 청교도의 나라 미국에서 사회적인 ‘과음’에 대한 반작용으로 절주운동이 전개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미국의 절주운동은 ‘술이 웬수야’라는 한탄에 그치지 않고 금주법 시대라는 ‘결실(?)’을 맺는다. 금주법 제정으로 술의 제조와 유통이 금지된 1920년부터, 헌법개정으로 금주법이 폐지된 1933년까지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술의 제조와 유통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절주운동을 전개한 수많은 사람의 선한 의도와 달리 금주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금주의 시대’가 아닌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 즉 ‘밀주의 시대’를 열었다. 술을 마시던 수많은 사람은 술을 끊는 대신 ‘몰래’ 술을 마셨다. 그러다 메탄올이 섞인 저질 밀주를 마시고 사망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합법의 세계에서 불법의 지하세계로 끌려간 술을 다루는 어두운 세력들이 발호했다. 시카고의 알 카포네를 비롯해 거대한 밀주 시장을 장악한 마피아들의 검은돈이 금주법을 집행해야 할 공직 세계를 부패시켰다. 결국 금주법은 역사의 오명을 쓰고 폐지된다. 기독교여성절주회와 프랜시스 윌러드의 노력으로 마피아 알 카포네의 시대가 열렸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왜 ‘선한 의도’가 때론 악이 발호하는 밑거름이 되는가 하는 난처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제야 알겠다. 평화로운 에번스턴의 밤은 숱한 가정을 파괴한 미국 사회의 알코올중독과, 열정적이었던 절주운동, 알 카포네를 탄생시킨 금주법 시대의 아이러니가 지나간 폭풍 후의 고요라는 것을.



[다른 삶]술집 드문 ‘절주운동 발상지’…술자리 적어 건강과 평화를 얻었죠


▶필자 이대한

벌레 유전학자. 예쁜꼬마선충(노벨상도 여럿 배출한, 이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벌레다)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포닥)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에서 여전히 벌레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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