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객 “너흰 뭐 먹고 사니?”…“응, 우린 디지털 노마드야”

2019.11.01 16:33 입력 2019.11.01 16:35 수정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발리에는 소위 ‘디지털 노마드’가 많다. 온라인 비즈니스를 하거나 창업을 준비 중인 사람들을 위한 코워킹 플레이스도 곳곳에 있다. 도시의 코워킹 플레이스와 달리 야외 공간과 수영장이 있는 곳들이다. 내가 사는 누사프니다는 영화 한 편 다운로드를 받는 데 1박2일이 걸릴 정도로 인터넷이 느리지만 우붓이나 짱구 같은 번화가들은 광섬유 인터넷이 들어가 있다. 웹디자인이나 사진 작업 정도에는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작가, 프로그래머 등은 개중 흔한 직업이다. 나는 한국에서 잡지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관련 분야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발리를 거점으로 직접 모델을 고용해 화보를 찍고 외국 잡지에 알음알음 판매하는 사진가, 뉴욕에서 활동하면서 준비 과정은 발리에서 진행하는 연극 연출가, 웹 에디터, 사진 리터처 등이다. 어차피 도시에 있다 해도 클라이언트와 직접 만나 소통할 일이 별로 없는 직업들이다. 이곳에서 만난 가장 독특한 ‘디지털 노마드’는 ‘어떻게 디지털 노마드로 살 수 있나’를 주제로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스페인 남자였다. 잡지기자들끼리 모여 앉아 이런저런 창간 아이템을 구상하다가 “새로 창간하거나 폐간하는 잡지를 소개하는 ‘월간 창간’ 어떠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적 있는데, 이거야말로 디지털 노마드계의 ‘월간 창간’이 아닌가 생각했다. 알고 보니 ‘불로소득으로 여행 다니면서 살 수 있다’고 꼬드겨서 소액 금융 투자자를 모집하는 사이트였다.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면 노트북 한 대로 세계 어디서든 먹고살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스스로 먹고살 방법을 늘 고민하고 노후 대책을 세워야 하는 ‘셀프 고용인’이다.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면 노트북 한 대로 세계 어디서든 먹고살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스스로 먹고살 방법을 늘 고민하고 노후 대책을 세워야 하는 ‘셀프 고용인’이다.

사실 따져보면 나도 ‘디지털 노마드’다. 발리에 살지만 온라인으로 한국과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 노마드라 불리는 데는 거부감이 있다. 왠지 단어 자체에 겉멋이 잔뜩 묻은 느낌이라 그렇다. 유목민도 아니고 ‘노마드’라니, 당장 머리를 촘촘히 땋고 조개껍데기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치고 문신을 열다섯 개쯤 새긴 다음, 마감 늦었다고 재촉하는 고객에게 “아이 그런 거 난 몰라요. 갑자기 하기 싫어졌어. 바이바이”라고 해맑은 소리를 해서 인간 혈압의 한계를 시험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힙스터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힙스터’라 불리는 거라는데, 디지털 노마드도 마찬가지지 싶다. 적어도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여행 사이트 웹에디터로 일하는 멕시코 친구와 나는 그렇다. 우리는 종종 “너흰 뭐 먹고 사니?”라고 물어보는 손님들에게 “응, 디지털 노마드야”라고 대답하곤 같이 웃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묻는다. “나도 발리에서 살고 싶어! 어떻게 하면 돼?” 내 경우에 비춰 답을 하면 이렇다.

첫째, 일을 찾는 능력은 필수다. 나는 처음부터 ‘디지털 노마드’가 될 생각은 없었다. 겨울 한 철을 따뜻한 나라에서 나고 싶었고, 마냥 놀면 심심할 것 같기에 미뤄두었던 단행본 일거리를 가져왔다. 영화잡지에서 5년, 패션지에서 5년을 일하고 난 후 프리랜스 에디터 생활도 몇 년 했기 때문에 일거리를 기획하고 고객을 찾는 일은 익숙했다. 글 쓰는 일은 우아하게 청탁을 기다리고, 커피 홀짝이고 음악 들으면서 생각을 끼적여 보내면 따박따박 입금되는 속 편한 직업이라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렇게 먹고살 수 있는 작가는 거의 없다. 베스트셀러를 몇 권 낸 유명한 소설가거나, SNS와 방송에서 맹활약하는 셀러브리티급 작가면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몇 권 출간했기 때문에 아직도 내가 먼저 기획을 해서 편집자들에게 제안을 한다고 하면 글 쓰는 후배들이 놀랄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다. 프리랜서로 생존하려면, 더구나 외국에 살아서 기업, 방송, 광고, 문화 이벤트 등이 연관된 고수익 단기 편집 아르바이트를 못하고 오로지 글로만 먹고살아야 한다면, 자잘한 일거리라도 스스로 적극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책을 기획해서 출판사에 제안서를 보내고, 종류가 각기 다른 대여섯 개 매체에 기고 여부를 타진해서 해외 영화제 취재를 가고, 매달 떠오르는 기사 아이템을 잡지사에 보내는 식의 ‘잡 헌팅’에 익숙했다.

연극 연출가·웹 에디터·작가…
발리에는 ‘디지털 노마드’ 많아
스스로 먹고 살 방법 찾아 고민
셀프 고용인이자 프리랜서일 뿐

물가가 싼 나라에 산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져 주지는 않는다
“걱정할 시간에 마감을 하자고”
생계를 위해 일 찾는 능력 필수
수익·지출 사이 균형도 찾아야

만일 당신이 웹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 일러스트레이터 등 언어가 필요 없는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 세계인이 이용하는 포트폴리오 게재 사이트를 통해 일거리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한국어로 소통을 해야 하는 직업이라면 고정 고객을 갖고 있는 편이 유리하다. 내 경우도 먼저 청탁을 받는 경우가 일거리의 80%는 된다. “올해의 대중문화 키워드가 ‘모던 히피’라는데 발리가 히피의 성지 아닌가요? 거기 뭐 쓸 거 없어요?” “여행 특집을 준비 중인데 발리를 소재로 뭘 쓸 수 있죠?” 그러니 한국 뉴스를 매일 체크하고 인터넷 트렌드를 섭렵하고 책과 영화를 챙겨보는 것은 중요한 일과다. 한국 콘텐츠를 너무 오래 들여다봐서 인도네시아어가 늘지 않을 정도다. 일거리를 찾는 노하우, 그리고 업계에 한 줌 남은 지인들이 말하자면 내 디지털 노마드 생활의 근간이다.

그러고도 원하는 수익을 맞추기가 힘들지 모른다. 나는 서울에 사둔 오피스텔 월세와 기타 투자금을 합해 월 70만원 정도 불로소득이 있다. 그래서 그나마 외국에서 글을 쓰며 사는 게 가능하다. 언젠가 발리에 출장 온 한국인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엄청 자유로운 영혼인 줄 알았더니 의외네요!” 이게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흔한 편견이다. 디지털 노마드라고 해봤자 결국 프리랜서의 다른 말일 뿐이다. 스스로 먹고살 방법에 대해 늘 고민하고 노후대책까지 마련해야 하는 ‘셀프 고용인’ 말이다.

둘째, 수익과 지출 사이에서 심리적 균형을 찾아야 한다. 도시 생활이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구조라면 이곳에서는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이 가능하다. 하지만 때로는 적게 벌고 크게 써야 할 일도 생긴다.

이곳에서 수영장 딸린 방 두 개짜리 독채 빌라는 월 100만원부터, 정원이나 수영장을 공유하는 렌털 빌라의 방 한 칸은 30만~50만원 정도다.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저렴한 집들도 있다. 내 친구는 사누르에서 방 두 개, 욕실 두 개, 넓은 거실, 정원이 있는 독채 빌라를 연간 480만원에 빌려서 직접 수리해 살고 있다. 사누르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고 원주민이나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차분한 동네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형병원, 공항, 해변이 가까워서 지인들이 발리에 관심을 보이면 내가 가장 먼저 추천하는 동네다. 반면 누사프니다는 원주민이 많지 않던 동네라 빈집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오히려 본섬인 발리보다 주거비용이 비싸다. 나는 35㎡짜리 원룸에 사는데 렌트비가 월 40만원 정도로 친구의 사누르 독채 빌라와 맞먹는다. 공과금이 모두 포함된 금액이다. 룸메이트가 있기 때문에 실제 주거비는 그 절반이다.

집값이 그렇게 싸다니, 정말 조금 벌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비자 연장 비용, 스쿠터 렌트비, 세탁비 등 의외로 돈 드는 구석이 많다. 이곳에서 사업, 투자, 취업을 하지 않고 최대한 버티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흔히 소셜비자라 불리는 211비자를 이용한다. 체류 2개월 후부터 매달 비용을 내고 연장해서 최장 6개월까지 머물 수 있는 비자다. 6개월이 지나서 비자를 갱신하려면 외국에 한 번 나갔다 와야 한다. 흔히 가까운 싱가포르로 가서 하루 만에 소셜비자를 다시 만들어서 들어오는 방법을 쓴다. 일명 ‘비자런’이다. 어쨌든 일 년에 두 번씩 본의 아니게 해외여행을 해야 하는 거다. 게다가 식비도 점점 오르는 추세고, 환율도 나빠지고 있다. 내 경우는 이것저것 따져서 월 100만원을 고정 지출로 잡고, 비자런 비용까지 감안하면 월 150만원은 벌어야 적자가 아니라 계산한다.

함정은 그 150만원에 보험, 연금 등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거다. 가끔 이곳에 살던 외국인이 큰 사고를 당해 수술비 마련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저축이 충분히 있거나,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하면서 저축까지 가능할 만큼 고수익 직종이면 상관없지만 낮은 물가만 보고 무턱대고 짐을 꾸리면 곤란하다. ‘욜로(You Only Live Once)하다가 골로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의 경쟁과 치솟는 물가와 각박한 환경을 피해 온 이곳에서도 종종 불안감을 느낀다. 과연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한국을 떠나 다른 곳에 살러 간다’는 흥분 때문인지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다. ‘안되면 한국 돌아가서 취직하면 되지, 병이라도 걸려서 큰돈이 들면 가족과 친구들이 도와주겠지, 어쩌다 책이 대박이 나거나 묻어둔 주식이 빵 터질 수도 있잖아?’ 그런 막연한 낙관이 있었다. 하지만 살다보면 어디든 현실이 된다. 이제 내게 발리는 여행지가 아니라 생활공간이다. 감각과 마인드도 그에 맞춰 현실적으로 변한다. 예컨대 최근 서울에서 같이 일하던 지인들 중 잡지 편집장이 되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 많았다. 축하할 일인데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저들이 몇 년만 지나면 실무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겠네? 그럼 누가 나한테 일을 주지? 이제 원한다고 마음대로 취직을 할 수도 없겠네? 나도 은퇴를 준비해야 하나? 그럼 뭘 먹고살지?’ 주로 그런 상념 때문에 한동안 머리가 복잡했다. 물가 싼 나라에서 슬렁슬렁 산다고 불안이 알아서 사라져 주는 게 아니다. 내가 버린 것(안정)과 누리는 것(자유)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의 삶에 만족한다. 도시에서 괴로워하는 친구들, 특히 내 또래 싱글 여성을 보면 외국에서 일하며 사는 걸 한 번 시도나 해보라고 말한다. 지난주에 나는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한국인 헤어디자이너를 만났다. K뷰티 열풍에 힘입어 스카우트되어 간 경우였다. “생각 같아선 아주 시골로 가고 싶지만 돈은 벌어야 하니까 싱가포르로 갔어요.” 그 역시 한국보다 노동조건이 좋고 자주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싱가포르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지레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지 않았다. 나는 모처럼 한인 헤어디자이너를 만난 게 기뻐서 머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그 덕에 나는 난생처음 옆머리와 뒷머리를 박박 민 투블록 컷을 하게 되었다. 너무 호전적으로 보이지 않나 염려했는데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들을 비롯해 모두가 시원해 보인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한국에서 40대 여성이 파인애플처럼 위 꽁지만 남은 투블록 컷을 하고 다니면 얼마나 이상하게 쳐다보는 인간이 많을까 생각하니 새삼 외국살이가 기뻤다. 경제력과 건강 따위에 대한 불안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확실히 이곳에선 내 존재 자체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덜하다. 게다가 오늘도 날씨는 좋고 하늘은 높고 마당에는 망고가 주렁주렁 열려 있고 시장에는 500원짜리 도시락 장수가 전을 펼치고 어딜 가나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긍정적인 기운이, 내가 포기한 많은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상쇄해준다. 맑은 공기와 햇살은 불안을 녹여서 좀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력으로 바꾸어준다. 걱정할 시간에 마감을 하자, 그리고 저녁엔 와인을 마셔야지, 까끌한 뒤통수를 만지며 생각하는 거다. 이것이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다.



[다른 삶]여행객 “너흰 뭐 먹고 사니?”…“응, 우린 디지털 노마드야”


▶필자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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