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성소수자 가르치지마”…‘열린 성교육’ 갈등 빚는 미국

2019.10.28 06:00 입력 2019.10.28 07:42 수정

‘열린 성교육’ 갈등에도…“성 고정관념 탈피·인권적 접근 필요”

지난 5월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교육청 앞에서 시민과 학생 100여명이 성교육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5월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교육청 앞에서 시민과 학생 100여명이 성교육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최초 성소수자 정치인이 탄생한 곳이다. 일년 내내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성소수자 거리도 있다.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문화에 따라 교육 또한 잘 갖춰져 있다. 2005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성소수자 등 성적 다양성에 관한 내용을 교육과정에 넣었다. 2016년부터 이런 내용이 담긴 성교육을 중·고교에 의무화했다. 새로 도입된 캘리포니아주 교육법 ‘건강한 청소년법(California Healthy Youth Act)’에 따른 조치다. ‘건강한 청소년법’에는 성별과 성적 취향,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캘리포니아주 성교육은 청소년의 성관계 등 성적 권리도 부정하지 않는다.

■ 성교육에 관한 오해와 편견

이런 성교육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캘리포니아주 교육청이 지난 5월 성교육 가이드라인을 내놓자 로스앤젤레스와 오렌지카운티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가이드라인은 2016년 의무화된 성교육의 구체적 지침을 담았다. 가이드라인에는 유치원부터 초교 3학년은 젠더 차이를 배우고, 젠더 고정관념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돼 있다. 초교 4~6학년은 자위 등 성적 행위와 성적 감정을 이해하고 토론할 기회를 얻는다. 중학생인 7~8학년은 성적 동의·학대·착취의 개념을 배운다. 중·고교생인 9~12학년은 피임, 청소년(성소수자 청소년 포함)의 건강한 성적 관계에 대해 학습한다. 교육 기간 동안 성적 다양성과 성적 권리를 배우는 게 핵심이다. 중·고교는 각각 한 학기(약 90시간)씩 성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반대자들 “너무 과도하고 일러…성관계·성소수자 부추겨”
일부 성소수자 아이들 아닌 대다수를 위한 교육 해야

지난 5월17일 오후 찾은 오렌지카운티 교육청 앞에서는 성교육 반대 시위가 한창이었다. 시민 100여명이 내리쬐는 봄볕 아래에서 피켓이나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었다. 부모를 따라 나온 아이들도 있었다. 참가자들이 든 피켓에는 ‘성교육을 멈춰라’ ‘너무 과도하고, 너무 이르다’ ‘아이들을 아이들인 채로 놔둬라’ ‘포르노 같은 성교육’ 등이 적혀 있었다.

네 아이를 키우는 데보라 허미러스(40)는 이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성교육에 항의한다는 의미에서다. “성교육은 부모들의 권리를 뺏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렸을 땐 우리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배웠죠. 지금은 포르노예요. 어떻게 성행위를 하는지까지 가르친다니까요.”

두 명의 자녀를 둔 중국계 미국인 사가 조(32)는 지난해 10월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첫딸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남편과 저에게 ‘엄마는 남자가 될 수 있고, 아빠는 여자가 될 수 있어. 나는 두 명의 남자 부모님을 가질 수 있어’라고 말했어요. 충격을 받았죠.” 그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이런 교육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팔레스타인계 무슬림 아웃크레이니가 지난 5월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교육청 앞에서 열린 성교육 반대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계 무슬림 아웃크레이니가 지난 5월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교육청 앞에서 열린 성교육 반대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계 무슬림인 스테라 아웃크레이니(18)도 이날 부모와 함께 시위에 나왔다. 그 역시 종교 때문에 현행 성교육을 반대한다. “이슬람교는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가르쳐요. 성별을 바꾸는 것도 금지돼 있어요. 제 종교에 반하는 교육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성교육 반대 시위를 이끄는 주축은 기독교계 한인이다.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는 크리스틴 백(42)은 자녀 수업을 참관하고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젠더 브래드 맨’이라는 게 있어요. 사람 모양 쿠키인데요. 교사가 이를 꺼내 놓고는 ‘태어날 때 몸과 달리 너희 머릿속에 진짜 너희가 좋아하는 게 있어. 남자가 분홍색을 좋아할 수 있고 여자가 스포츠를 좋아할 수 있어. 이런 아이들이 있으면 따돌리면 안돼’라고 가르치더라고요.” 백씨는 학교 교장을 찾아가 항의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구강 성교, 항문 성교, 자위 행위에 대해서도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주디 김(41)은 “성교육의 초점은 금욕을 가르치거나 아이들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부모님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너희들은 성생활을 하고 성병만 걸리지 말라. 혹시라도 임신하면 낙태는 정부가 해줄 수 있다. 성생활은 너희의 자유’라는 게 골자”라고 했다. 성교육에 반대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성적 다양성과 성적 권리에 대해 배워선 안된다고 봤다. 성관계를 하거나 성소수자인 ‘일부’ 아이들이 아닌 ‘대다수’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성적 다양성과 성적 권리를 가르친다면 아이들이 쉽게 성관계를 하고 성소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성교육, 인권과 실용 관점에서 봐야”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육청 건강교육 담당자 티모시 코르딕이 캘리포니아주 학교들의 성교육 프로그램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육청 건강교육 담당자 티모시 코르딕이 캘리포니아주 학교들의 성교육 프로그램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교육청은 현행 성교육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지난 5월17일 로스앤젤레스 교육청에서 만난 건강교육 담당자 티모시 코르딕(46)은 현행 성교육이 청소년이 배우기에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대해 “교육 내용과 교재는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교재에 체위가 포함됐다는 등 일부 주장은 오해에서 불거진 것”이라고 했다. 미국 연방질병통제예방센터과 연방공중보건협회 등 전문 기관이 입증했다고 했다.

성적 다양성을 담은 교육에 대해서는 “성소수자를 교육 내용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건 ‘건강한 청소년법’에 근거한다”며 “우리는 누구도 차별하거나 무시해선 안된다”고 했다. 이어 “다양한 성 정체성, 피부색 등을 가진 사람들을 학교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미국 법은 이외에도 수십개에 달한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 교육청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 10대와 학부모를 지지한다”며 성교육을 유지할 것이라는 성명도 발표했다. 샌프란시스코 교육청 건강교육 담당자 케빈 고긴(64)은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이 공존하는 사회 일원으로서 “청소년들이 성적 다양성 등 성의 복합적인 면을 배우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의학으로 증명된 내용 가르쳐…‘부적절’ 지적은 오해
다양한 문화·정체성 공존하는 사회…누구도 차별해선 안돼

캘리포니아주 교육 당국이 이런 성교육을 하는 건 피임, 성병 예방 등 실용적 목적 때문이기도 하다. 코르딕은 “로스앤젤레스는 유동인구가 많은 대도시이기 때문에 성병 문제를 겪고 있다. 10대가 성병 확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고 했다. 건강한 성적 행위와 피임법을 교육해 높은 10대 임신율, 도시 성병 발병률 등 사회 문제를 예방하자는 취지에서 교육이 이뤄진다는 얘기다. 코르딕은 “생체 실험, 마약, 성매매, 성폭력과 같은 부분도 성교육에서 필수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했다.

LA, 2005년 미국 최초로 교육과정에 성소수자 등 성적 다양성 내용 담아
2016년부터 중·고교서 의무화…각각 90시간씩 이수
청소년의 성관계 등 성적 권리도 부정하지 않아

캘리포니아주 교육 당국은 대다수 학부모가 성교육을 찬성한다고 본다. 최근 자체 설문조사 결과 미국 학부모의 90%가 공립학교 성교육을 찬성한다고 답했다. 코르딕은 “부모가 직접 자녀에게 성교육을 하는 것은 불편하기에 학교가 대신하기를 바란다. 성교육 반대는 한인을 중심으로 한 일부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자녀의 성교육을 원치 않는 경우 학교에 이를 알리면 수업에서 자녀를 제외시킬 수 있다고 했다.

개방적인 성교육을 도입하면서 갈등을 겪는 캘리포니아주의 모습은 한국 사회가 곧 맞닥뜨려야 할 미래일지 모른다. 한국에서도 성을 둘러싼 담론이 활발해졌고 그 인식 또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전문가들은 성교육 변화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성교육을 ‘인권’과 ‘성 역할(젠더 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코르딕은 말했다. “성소수자를 교육에 포함한다, 안 한다고 분리해서 생각할 게 아닙니다. 성소수자라는 단어로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창의적인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건 어떨까요. 성소수자는 사회적 소수자이기에 포용해야 한다는 인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다양한 성 정체성의 경우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성적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한다는 관점에서 가르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건강한 성적 관계를 위한 ‘동의’를 먼저 가르치는 게 순서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이테크 로스앤젤레스 고교 교장인 매튜 매클레나한(49)이 말했다. “동의라는 건 ‘네 펜을 잠깐 빌려도 될까?’라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거죠. 권위나 힘, 재력과 상관 없이 서로를 동등하게 맞추고 대화하는 거잖아요. 이것부터 시작한다면 성소수자나 청소년의 성적 권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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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취재팀: 노정연·임소정·김찬호·최민지(모바일팀), 이보라(사회부) 기자

■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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