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앞길 창창한데…” 수사 경찰이 가해자 대변하듯 합의 종용

2020.04.24 06:00 입력 2020.04.24 06:03 수정

또 다른 고통 ‘합의’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재판 19명 중 9명 “경험”
생계·피로 등 이유로 수용

현행법상 형 감경 요소에
‘합의’ 없지만 재판엔
반영 안돼도 ‘노력’으로 평가
피해자들 “무섭고 싫었다”

가사도우미 성폭행 혐의를 받은 김준기 전 동부그룹 회장에게 법원은 지난 17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서울 강남 클럽 버닝썬에서 고객 신체를 몰래 촬영해 유포한 클럽 MD에게도 같은 날 같은 형이 선고됐다. 두 사건에서 법원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사유로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점을 감안했다.

성폭력 범죄에서 친고죄 규정은 폐지됐지만 친고죄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 친고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는 범죄다. 고소를 취소시키기 위해 가해자가 합의를 종용하며 2차 피해가 발생한다는 비판을 받고 2013년 폐지됐다. 그러나 합의는 수사기관이 가해자에게 어떤 처분을 할지, 법원이 어느 정도의 형량을 매길지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친다.

합의를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반영하는 게 합당할까. 마녀의 설문조사에 응한 피해자들 답변을 토대로 합의가 성폭력 범죄 수사·재판 과정에서 작동하는 구조와 실태를 살펴봤다.

수사받은 경험이 있는 피해자 15명 중 6명이 수사 과정에서 가해자 또는 가해자의 가족·지인 등으로부터 합의를 종용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재판 경험이 있는 피해자 19명 중 9명도 그러한 합의 종용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수사기관이 나서서 합의를 종용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자 6명이 경찰 또는 검찰이 합의를 종용한 적이 있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이 합의를 언급할 경우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위축감을 느끼고, 공정하게 수사할 것이라는 신뢰도가 떨어졌다. 한 피해자는 “검사님이 형사조정이라는 것을 하겠느냐고, 어차피 서로 고소한 것이니까 조정해서 합의하고 좋게 마무리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며 “결국 조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이 힘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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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어차피 재판으로 가도 벌금형 정도’라며 합의를 종용한 경찰에 민원을 제기하자 경찰이 ‘가해자 말을 전해준 것’이라며 얼버무린 경우가 있었다. 이 피해자는 미성년자였는데, 합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찰 말만 듣고 합의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른 피해자의 말이다. “가해자가 전 남친이고 이제 20대라 ‘앞길이 창창하다’며 경찰이 합의하고 선처를 받게 하자고 했다. 분명히 엄벌을 원한다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그렇게 연락이 와서 항의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경찰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또 다른 피해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진을 합성한 사람이 동창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상태였는데 경찰이 합의 의사를 물어봤다. 어차피 처벌도 원하는 만큼 강하게 내려지지 않을 것인데 돈이라도 챙기라는 것이다.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서 합의를 강요하는 경찰이 너무 싫다.”

피고인이 형량에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합의를 제안해놓고, 합의금을 요구하면 오히려 합의한 피해자에게 ‘꽃뱀’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한다. 수사 과정에서 마녀와 연대한 피해자들은 합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합의하기 위해 연락을 주고받거나 합의에 응할 의사를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피해 사실에 대해 의심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현행 성범죄 양형기준 중 형을 감경해줄 수 있는 요소에 ‘합의’는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처벌불원(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은 감경 요소로 들어 있다. 재판에선 일반적으로 합의가 처벌불원의 의미로 여겨진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처벌불원의 의미를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합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피해에 대한 상당한 보상이 이뤄졌으며, 피해자가 처벌불원의 법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진정한 합의인지 제대로 따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법원 판결 중에는 합의가 되지 않았더라도 피해자와 합의하기 위해 노력한 점이나, 가해자가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한 배경을 가해자 형량에 유리한 요소로 삼은 사례가 다수 있었다.

피해자가 합의에 응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생계가 어려워서, 수사·재판 과정이 지치고 힘들어서, 사건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서, 가해자 측에서 지속적으로 합의를 종용해서 등이다. 합의가 반드시 처벌불원 의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피해자가 민사소송 등 다른 법적 절차를 밟을 경우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수사·재판 과정의 합의로 배상받는 쪽을 택하는 것도 사실이다.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경제적 지원은 부족하다.

절도나 사기·횡령 등 재산 범죄와 달리 성폭력 범죄는 금전으로 배상받는다고 피해가 근본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설문조사에서 수사 과정 중 합의가 피해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답변은 소수였다.

디지털 성범죄는 불법촬영물 삭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합의금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온라인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불법촬영물의 특성상 이 돈으론 부족할 때도 있다. 한 피해자는 “합성 사진과 영상을 지우려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의 도움만으로 안된다. 돈이 많이 들어서 한계가 있다. 합의한다면 그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지 가해자에 대한 선처를 바라서가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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