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 없이 알맹이만 원하는 자, ‘알짜’들의 상점에 가다

2020.07.25 14:57

이주은 알맹상점 대표(왼쪽)가 일일인턴인 기자에게 삼베수세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이주은 알맹상점 대표(왼쪽)가 일일인턴인 기자에게 삼베수세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섬유유연제가 똑 떨어졌다. 빈 플라스틱 통만 남았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문제라는데, 그나마 환경에 덜 해롭다는 리필용 제품을 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집 근처 대형마트에 간다. 쓰던 제품의 리필용이 보인다. 그런데 종이상자 안에 플라스틱 용기 제품과 ‘1+1’로 묶여 있다. 할 수 없이 플라스틱 용기를 집으로 들였다. 따지고 보면 리필용 비닐도 쓰레기다. 사과 한 쪽도 비닐에 싸여 나오는 요즘, ‘쓰레기 없는 소비’는 쉽지 않다.

지난 6월 서울 합정동에 특별한 가게가 문을 열었다. 알맹이만 원하는 자, ‘알짜’ 세 명이 운영하는 ‘알맹상점’이다. 이곳에선 빈 용기를 가져와 세제, 화장품 등을 필요한 만큼만 담고 무게를 달아 값을 낸다. 대나무 칫솔, 도자기 빨대, 자연 분해되는 수세미 등 친환경 생필품도 다양하다. 비닐이나 종이봉투는 없다. 고금숙 대표(42)는 “이곳을 찾는 손님 대부분은 환경운동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라며 “열에 일곱은 집에서 용기를 갖고 올 정도로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가게 풍경이 궁금해졌다. 지난 7월 20일 ‘일일인턴’으로 5시간의 영업에 함께했다.

껍데기는 가라

이날 낮 12시 반쯤 앞치마를 두르자마자 발소리가 들렸다. 망원동에 사는 주부 강혜정씨는 이날 처음 알맹상점을 찾았다. 집 근처 맛집을 검색하다가 상점을 알게 됐다고 한다. “평소에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되도록 음료를 마실 땐 텀블러를 쓰려 하고요. (제로웨이스트 삶을 다룬 책)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도 인상 깊게 읽었어요.” 그는 한참 매장을 돌아보다 자연분해되는 세제 소프넛 열매와 삼베수세미를 집어들었다.

“생각보다 체계적이고 물건 종류가 많아서 재미있어요.” 이규미씨(30)는 인스타그램에서 ‘제로웨이스트’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을 찾아본다고 했다. 이씨는 갈색 플라스틱 용기에 바디워시를 담았다. 그는 “일반 상점에서는 이미 포장이 된 채로 나오니까 플라스틱을 쓰지 않으려도 해도 쉽지 않다”며 “종종 이곳을 찾을 것 같다”고 했다.

빈 병을 가져가면 필요한 만큼 세제·바디워시 등을 살 수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빈 병을 가져가면 필요한 만큼 세제·바디워시 등을 살 수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알맹상점에선 개인 용기를 세척해 가져오면 에탄올을 뿌려 소독한다. 미처 세척하지 못했다면 주방에서 씻어 살균건조기를 이용할 수 있다. 소독한 유리병과 플라스틱병을 500원에 살 수도 있다. 화장품을 적은 분량으로 판매하기 위해 고 대표는 맞춤형 화장품 조제관리사 자격증을 땄다. 액체 상품은 업체에 세척·소독한 대용량 통을 보내 들여온다. 발사믹 식초 같은 식료품도 ‘팝업스토어’ 형식으로 판매 중이다. 각자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고 포장 값이 빠지니 저렴하다.

이날 상점을 지킨 이주은 대표(29)는 손님에게 상점 곳곳을 설명하기 바빴다. “다음에 올 때는 ‘커뮤니티 회수센터’에 재활용품을 기부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커뮤니티 회수센터는 매장 한쪽에 마련한 공간으로, 다양한 소재를 기부받아 재활용한다. 개인이 처리하면 일반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들이 이곳에 많이 모이면 새로 태어날 수 있다. 병뚜껑과 빨대는 치약짜개로, 커피찌꺼기는 화분과 연필, 펜으로 재탄생한다. 우유팩은 화장지가 된다. 이중 일부는 소재를 기부한 손님에게 선물로 건넨다.

알맹상점에선 빈 병을 소독해 상품을 담아가는 용기로 다시 쓰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알맹상점에선 빈 병을 소독해 상품을 담아가는 용기로 다시 쓰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경기 용인에서 온 강현주씨(44)도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비슷한 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강씨는 “직접 와보니 단순히 물건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는 게 아니고 ‘운동’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 대표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저희가 꾸준히 망원시장에서 캠페인을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아무 기반 없이 제로웨이스트숍을 차려서 되는 건 아니에요. 지금도 계속 이곳에 오는 분들에게 왜 이게 재활용이 안 되고, 그래서 우리가 이걸 모아서 이렇게 쓴다고 알리고, 교육하고, 부딪히고 있어요.”

이 대표는 환경운동과는 무관한 삶을 살던 평범한 시민이었다. 지난해 초 신혼집 짐정리를 하며 환경문제에 눈떴다. 쓰레기 신세가 된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해 9월 ‘플라스틱 프리’ 활동가인 고금숙 대표가 망원시장에서 진행하던 ‘알맹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이들은 장바구니를 쓰고 반찬통이나 천바구니에 식재료를 담아 구매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상인회가 운영하는 카페 한쪽에서 세제소분숍도 운영했다. 지난 1월 카페에서 나오게 되면서 프로젝트의 방향을 고민했다. 결론은 ‘알맹상점’이었다.

물건 파는 가게를 넘어

아늑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공간에서도 할 일은 넘쳤다. 이날에는 주로 커뮤니티 회수센터 일을 했다. 우선 색깔별로 분류한 병뚜껑·빨대를 이미 사용한 적 있는 종이상자·봉투로 쌌다. 재활용하는 기관으로 보내기 위해서다. 한 무더기 모인 커피찌꺼기도 같은 방식으로 포장했다. 잔뜩 모은 우유팩은 근처 주민센터로 들고 가 화장지로 교환했다. 종이팩으로 만든 화장지다.

황선옥씨(35)는 병뚜껑과 커피찌꺼기를 모아왔다. 물건에 대한 집착을 끊고 간소한 삶을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니 ‘알맹상점’까지 오게 됐다. 황씨는 “상점의 취지가 좋아 동참하고 싶었다”며 “이런 상점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주에 이어 상점을 찾은 홍초롱씨(27)도 같은 마음이다. 홍씨는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는데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라며 “기업들도 플라스틱을 줄일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알맹상점에서 판매하는 친환경 상품. 우철훈 선임기자

알맹상점에서 판매하는 친환경 상품. 우철훈 선임기자

알맹상점은 제로웨이스트숍을 넘어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복합플랫폼을 꿈꾼다. 8월부터는 샴푸바·삼베수세미 만들기나 깨진 그릇을 수선하는 킨츠키 워크숍을 열 계획이다. 아름다운가게나 생활협동조합같이 전국 곳곳에서 지속가능하게 운영할 수 있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양래교 대표(38)는 “한국에서 생소한 리필 문화를 확산시키고 이런 소비 자체가 가치 있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만큼 이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가려 한다”고 말했다. “꾸준하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같이할 수 있게끔 여건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조금 느릴지라도 바뀌어 갈 것이라고 봅니다.”

고금숙 대표는 알맹상점의 시도를 ‘셀프 그린뉴딜’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아주 작은 수준, 개인의 삶으로 본다면 쓰레기를 줄이는 대안적 활동을 하면서 먹고사는 일도 해결하는 게 그린뉴딜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게를 만들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에게 저희의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고, 쓰레기 걱정 없이 생필품을 쇼핑할 수 있는 공간을 확산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반찬통을 챙겨요

오후 5시가 넘어갈 무렵, 이주은 대표가 반찬통 3개를 에코백에 담아 내밀었다. ‘포장 없이 음식 사오기’ 과제였다. 근처 망원시장 분식집으로 향했다. 통을 건네며 떡볶이·순대·튀김을 주문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뭔 통을 세 개씩이나 갖고 왔대” 하면서도 익숙하다는 듯 음식을 담았다.

영업이 끝나고 이 대표와 떡볶이를 먹었다. 일일인턴 체험의 마무리 코스였다. 대화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쓰레기 없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향한 ‘유난 떤다’는 시선이었다. 이 대표는 어느 가족 손님을 상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가 무거운 빈 병을 들고 와서 이것저것 담으니까 남편이 제게 ‘이렇게 하는 게 뭐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설명드렸어요. 나중에 아이가 뛰놀 바다에 생물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이 떠다니는 걸 바라느냐고요. 우리는 그 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이려 한다고 했죠. 그러니까 아내에게 가서 ‘내가 돕겠다’고 하더라고요. 나 하나 변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냐고들 하지만 ‘나조차 바뀌지 않는다면?’이라고 뒤집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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