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논란 빚은 ‘기안84 연재 중단 요구’ 둘러싼 쟁점과 비판

2020.08.29 06:00 입력 2020.08.29 13:57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표현의 자유’ 침해 아닌가…책임 안 지는 ‘혐오표현의 자유’는 없다

기안84 작가의 웹툰 <복학왕> 속 여성 비하적 묘사 논란은 작가의 퇴출 요구에 이어 연재 중단 운동에 대한 만화가 원수연의 비난, 웹툰협회의 규탄 성명 발표로 치닫고 있다.

기안84 작가의 웹툰 <복학왕> 속 여성 비하적 묘사 논란은 작가의 퇴출 요구에 이어 연재 중단 운동에 대한 만화가 원수연의 비난, 웹툰협회의 규탄 성명 발표로 치닫고 있다.

엉망진창이다. 지난 8월24일, 사단법인 웹툰협회에선 최근 웹툰 <복학왕>에서 여성 비하적인 묘사로 비판을 받은 기안84 작가에 대한 퇴출 요구에 대해 “빅브러더 사회” “파시스트” 같은 행동이라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웹툰협회 회장이기도 했던 만화가 원수연이 기안84에 대한 연재 중단 운동을 “검열 행위”라 비난한 지 며칠 만이다. 그 때문에 작품의 혐오표현과 이에 대한 작가 및 플랫폼의 책임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의 가능성은 다시 막혀버렸다. 좋은 반론은 논의를 생산적으로 이끌지만, 오직 논의를 방해하기 위한 반론은 몇 개의 그럴듯한 개념을 산탄총처럼 쏘며 논의의 흔적을 누더기로 만든다.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상대방에게 ‘파시스트’ 같은 이름을 붙이는 웹툰협회의 방식이 그러하다. 이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논의를 조금이라도 복구하기 위해, 기안84의 작품 속 혐오표현의 문제와, 연재 중단 요구를 둘러싼 몇 가지 쟁점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작품 속 묘사가 여성혐오적이든 아니든 작품은 작품일 뿐 현실이 아니지 않나

분명 작품과 현실은 다르다. 하지만 바로 그 작품은 현실과의 상호 연관 속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해당 에피소드를 옹호하는 이들조차 그 장면으로부터 현실 속 20대의 취업난에 대한 재현을 읽어낸다. 작품이 정말 작품으로서만 존재하고 해석되기 위해선 현실과 분리될 상당히 많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가령 영화 <검은 사제들>을 우리가 현실과 분리된 오컬트 장르로서 마음 편히 즐기기 위해선, 적어도 구마를 가장한 신도 폭행 같은 범죄가 강력히 제지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미신을 믿지 않아야 한다. <복학왕>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난관을 헤쳐 나가는 우기명과 능력은 없지만 귀여움으로 어필해 정직원이 된 봉지은의 대비가 옳고 그름을 떠나 그저 작품으로만 이해되기 위해서는, 여성은 남성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편견과 취업에서의 차별이 없어야 하며, 여성은 능력이 없어도 섹스어필로 쉽게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남성들의 기존 통념이 잘못됐다는 단단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웹툰협회는 <복학왕>에 대한 청소년 모방 우려가 “청소년들의 정서적 성숙도와 현실인지, 판단력을 폄훼하고 비하”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순수한 십대 남성이 만화를 보고 배우는 게 아니라 이미 커뮤니티를 비롯해 다른 수많은 채널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한 여성혐오를 더 강화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기안84 작가는 현실과 분리된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창작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남성들의 흔한 편견을 그대로 재현한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현실의 여성혐오에 대한 재생산의 효과를 갖는 것이다.

2. 문제가 있다 해도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세 가지 층위를 분리하자. 생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행동의 자유. 당장 생각의 자유는 상대방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방법이 없는 이상 제한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가 히틀러라 해도 그러하다. 행동의 자유는 실제로 종종 제한된다. 우리는 이동의 자유를 누려도 되지만 누군가를 때릴 자유는 행사할 수 없다. 생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 사이에 표현의 자유가 있다. 과연 표현이란 단순히 생각의 자유를 말과 글을 통해 행사한 것에 불과한가, 또 다른 방식의 행동인가. 혐오표현의 제한을 요구하는 이들은, 어떤 표현들은 하나의 실질적 폭력 행위로 기능한다고 본다. 인종차별적 표현이나 특정 성별 혹은 성적지향을 비하하는 표현은 당장 당사자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시민사회에서 그들의 지위를 취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복학왕>의 사례를 보자면, 여성의 능력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여전히 실재하는 사회에서 봉지은에 대한 악의적 묘사는 실제 차별을 겪는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깎아내린다. 이것은 명백한 해악이다. 또한 이처럼 차별을 정당화하는 통념이 반복될수록, 직업 선택의 자유를 비롯해 당사자들이 사회적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들이 제한된다. 기득권의 차별적 언어가 누군가의 실질적 자유를 제한하고 침묵시키는 혐오표현의 자유란 대체 어떤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웹툰협회가 기안84를 옹호하기 위해 나치에 대한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처음 왔을 때’를 인용한 건 그래서 자가당착적인데, 바로 그 나치가 표현의 자유에 기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해온 대표적 혐오표현 집단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표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란, 표현의 자유를 누렸을 때 따라오는 문제에 대해 확실히 책임을 부여할 때만 비로소 평등한 소통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다. 지금 기안84를 비판하는 이들은 바로 그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3.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만 허용한다면 창작 세계는 빈약해지거나 얼어붙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모두 제거한다면 창작의 세계는 올바르지만 ‘노잼’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극단적으로 사고를 이끌어 나가면 우리는 어디서든 디스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다. 한쪽 끝에 사상경찰이 지배하는 무균실의 디스토피아가 있다면, 다른 끝엔 혐오표현이 지배하는 수라도가 있다. 이런 극단적 이미지의 가능성만으로 서로를 비난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실제로 벌어졌던 경험적 맥락을 따져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웹툰 시장에서 문자 그대로의 검열에 가장 근접했던 소비자 운동은 2016년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벌어진 ‘예스컷’ 운동이다. 넥슨 게임 클로저스에 참여했던 김자연 성우가 페이스북 메갈리아4 페이지에서 판매한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 적힌 티셔츠를 구매 후 인증하자 남성 유저들이 회사를 압박해 게임에서 김자연 성우의 작업물이 빠졌고, 이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는 웹툰 작가들 특히 여성 작가들을 타깃으로 작품을 거부한다는 ‘예스컷’ 운동이 벌어졌다. <아메리카노 엑소더스>의 박지은 작가를 비롯한 몇몇 작가는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서 지속적인 사이버 불링을 당했고, 무엇보다 당시 독자와 언쟁한 작가에 대해 웹툰 플랫폼 탑툰은 연재 중단을 결정하기도 했다. 웹툰협회를 비롯한 몇몇 집단의 목소리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페미니즘 사상경찰들이 작가들의 사상을 검열하는 시대가 올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지금껏 없었으며, 실제로는 그 반대에 가까운 일이 벌어졌던 셈이다. 그렇다면 아직 오지 않은 극단적 미래를 상상하고 두려워하기보단, 당장의 눈앞에 벌어진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실천적으로 의미 있지 않을까.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2016년 8월3일 출범한 웹툰협회와 당시 원수연 회장이 2016년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작가들을 괴롭힌 ‘예스컷’ 운동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4. 그래도 청와대 청원을 통해 작가 퇴출을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 아니지 않나

위근우

위근우

당연히 청와대 청원은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공론장과 정치에서의 논의를 통한 합의가 아닌, 국가의 직접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으며 자칫 공론장을 합리성이 아닌 사람 수의 문제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소위 ‘대림동 주취자 난동 사건’ 당시 여성경찰을 줄이자는 청원처럼, 차별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게시하고 과대표하기에도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제도의 의의가 있다면, 여전히 공론장이 흡수하지 못하는 어떤 목소리들을 응집해서 가시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에 직접 기안84에 대한 처리를 청원하는 것은 과도할 수 있다. 하지만 <어벤져스:인피니티 워> 번역이 잘못됐다고 박지훈 번역가 퇴출을 청원하는 것만큼 과도하거나 엉뚱한 건 아니다. 박지훈 퇴출 청원이 그러하듯, 누구도 이 청원대로 국가가 나서서 한 명의 창작자를 날려버릴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동안 <복학왕>에서 반복되던 여성, 장애인, 외국인 비하 표현에 대해, <복학왕> 외의 <외모지상주의> <뷰티풀 군바리> 등의 인기작에서의 여성혐오에 대해 지적하고 또 지적해도 제자리걸음인 상황에서 최대한 목소리를 응집할 필요가 있는 것뿐이다. 청와대 청원을 통한 특정 작가에 대한 압박이 과하게 느껴진다면, 웹툰협회 같은 해당 분야의 중요 집단들이 “기안84 작가뿐만 아니라, 웹툰 범주의 어떤 작가와 작품에라도 독자의 사회 윤리적 눈높이, 정서, 취향, 가치관에 따른 비판과 지적에 여하한 대리 또는 연대적 유감이나 이의를 두지 않는”다며 책임을 회피하기보단 적극적으로 창작의 책임윤리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해결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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