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이웃이 없는, 집 앞엔 인터넷 안테나가 우뚝 선…이 땅이다!

2020.12.25 16:26 입력 2020.12.25 22:56 수정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누사프니다에 집을 짓겠다고 결심한 지 2년 만에 땅 임대 계약을 했다. 집터의 지대가 높아서 바다 건너 발리까지 한눈에 보인다(왼쪽 사진).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땅 주인집 외에는 다른 이웃도 없어 더없이 호젓하다(오른쪽 사진).

누사프니다에 집을 짓겠다고 결심한 지 2년 만에 땅 임대 계약을 했다. 집터의 지대가 높아서 바다 건너 발리까지 한눈에 보인다(왼쪽 사진).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땅 주인집 외에는 다른 이웃도 없어 더없이 호젓하다(오른쪽 사진).

미루고 미룬 땅 계약을 완료했다. 누사프니다에 집을 짓겠다고 결심한 지 2년 만이다. 발리에 산다고 하면 라탄 가구와 열대 식물이 가득한, 개인 수영장 딸린 아름다운 단독 주택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누사프니다는 상황이 다르다. 지역민의 전출·입이 드문 곳이라 가정집 매물이 없고, 관광 붐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방갈로들은 주방이 없다. 내 집처럼 간단한 주방이라도 갖추고 외국인에게 장기 임대를 주는 곳은 이웃과 다닥다닥 붙어서 사생활이 없고 가격도 비싸다. 40㎡(약 13평)짜리 원룸이 보증금, 공과금 없이 월 32만원인데 비싸다는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나도 인도네시아에 오래 살긴 살았나 보다. 적어도 집 짓기를 더 미룰 수 없을 만큼은 오래된 것 같다.

내가 집 짓기를 미룬 것은 인도네시아어가 완전치 않고, 이곳 법도 잘 모르면서 섣불리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손님이 끊기고 시간이 많아지자 지인들이 일제히 집 공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정보를 거저 얻을 수 있었다. 예컨대 롬복 출신 다이빙 강사 위디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현지인답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땅을 보러 다녔다.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땅 안 파세요?” 물어본 거다. 그 결과 마음에 드는 땅을 두 군데 발견했는데, 그중 한 곳은 매수가 가능하고 다른 곳은 장기 임대만 허용되었다. 현지인인 위디아는 당연히 매수 쪽을 택했다. 그가 포기한 땅이 내 차지가 되었다. 물론 외국인도 편법으로 땅을 살 수는 있다. 현지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토지 매매 계약을 하고, 그 대리인에게 내가 대금을 차용해주고 토지를 담보로 잡았다는 내용의 별도 계약서를 써서 공증받는 방식이 많이 쓰인다. 실제로 그렇게 매수한 땅을 되파는 과정까지 치러본 외국인도 주변에 있다. 하지만 나는 겁이 많기 때문에 내 땅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상태에서 편히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연간 비용으로 따지면 더 비쌀지라도 30년 동안 땅을 임차하는 방식을 택했다.

땅은 지도상에서 누사프니다 한가운데 좁은 능선 위에 있다. 문을 열고 나가면 열대의 해변이 펼쳐지는 대신 신선한 산바람이 불어오고 마을과 바다, 멀리 발리가 한눈에 보일 것이다. 이 마을엔 아직 외국인이 한 명도 안 산다. 내 집 주변으로 누군가 집을 짓기도 힘들어 보인다. 그 말을 듣고 친구들이 놀랐다.

“개와 이웃이 없다고? 누사프니다에 그런 곳이 있어?”

누사프니다에서 밤에 개 짖는 소리가 안 들리는 집은 거의 없다. 그것만으로도 매력있는 위치다.

누사프니다 한가운데 능선 위
집 짓기 결심 2년 만에 계약한 땅
도로 하나 두고 땅 주인 집만 있다
개 짖는 소리 없는 매력적 위치
망고처럼 주렁주렁 안테나까지

공사는 아직…예산 작업만
3주째 구조물 따위 가격 알아보고 한숨
‘일단 팍팍 쓰고 일해서 메꿀까’
이러는 날들의 연속이다

땅을 결정하고도 계약까지 한 달 정도 걸렸다. 맨 처음 위디아가 알려준 땅을 보러 갔을 때 주인집 사람들을 얼핏 보았다. 인도네시아어를 잘하는 남자친구를 내세워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그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괜히 찔러 보는 줄 알았나 보다. 사흘 뒤 우리가 다시 나타나 그 땅에서 얼쩡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주인 아저씨가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라고 했다. 매물로 나온 땅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통 방식으로 지어진 주인집은 바다 대신 산을 향해 테라스가 나 있었다. 누사프니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180도 바다 뷰가 나오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들에겐 조망보다 차도에서 올라오는 소음을 막는 일이 더 중요했던 거다. 테라스 정면에는 인터넷 회사의 안테나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반드시 이 땅을 차지해야 한다!’

우기에 들어서면서 이 동네 인터넷 사정은 엉망진창이다. 되는 날보다 안 되는 날이 많다. 현재 내 집에선 와이파이가 끊기면 데이터도 같이 끊긴다. 마감 맞춰서 다 써놓은 원고를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늦게 보내거나, 한밤중에 컴퓨터를 들고 나가서 불 꺼진 다이빙센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모기떼의 습격 속에 마무리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곳이라면, 접시 안테나가 12월 망고처럼 주렁주렁 열린 이 땅에서라면, 더 이상 그런 설움은 없으리라.

주인 가족을 네 번째 만났을 때 마침내 우리는 돈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물론 주인 가족이 제시한 가격이 있었지만 흥정이 가능하다는 단서가 붙은 상태였다. 주인 아저씨는 돈 얘기를 조심스러워하는 점잖은 사람이고, 내 남자친구는 흥정을 어려워하는 유럽 사람이기 때문에 둘은 한 시간 넘게 커피만 마시면서 딴청을 피웠다. 이러니 우붓시장에서도 나 혼자 갈 때와 서양 여자와 갈 때, 남자들과 갈 때 가격이 다 다르다. 특히 서양 중노년 남자들과 우붓시장에 가면 졸지에 가격이 유럽 아트페어 수준이 돼버린다. 결국 내가 나서서 시장에서나 쓸 초보 인도네시아어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고(“할인, 살짝, 선생님?” “가격, 이거, 가능, 선생님?” “부탁, 감사, 매우 감사, 선생님.”), 무례한 조건인가 망설인 시간이 무색하게 주인이 곧장 수락을 했다. 500㎡를 30년 동안 사용하는 데 약 1400만원을 지불하고, 그 기간 안에 자유롭게 전대를 할 수 있으며, 30년 후에는 인근 시세보다 낮게 재계약을 할 수 있다는 조건이다. 땅 주인이 너무나 인심이 좋은 나머지 ‘우리 엄마가 왔으면 반값도 가능했겠는걸?’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 후 만나는 사람마다 가격이 싸다고 하는 걸 보면 나쁜 거래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긴, 당장 내가 사는 삭티 마을만 해도 호텔이 계속 들어서고 있어서 임차 조건이 훨씬 나쁘다. 기간은 15~20년밖에 안 되고, 연간 임차료는 40% 이상 비싸다. 바닷가 땅은 삭티보다도 10배 비싸다. 우리는 계약서를 쓰기 전에 건축가 친구와 함께 드론을 동원해서 자체 측량을 했는데, 그 결과를 지도화해서 보여주자 주인 아저씨는 “땅을 파는 거면 모르는데 빌려주는 거니까 상관없다. 자투리 땅은 다 써도 된다”고도 했다.

어디든 사람은 비슷하다. 여행자들은 발리 사람이 항상 여유롭고 친절한 것에 놀란다. 하지만 막상 살다 보면 그들이 여유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책임을 회피하거나, 그러다 여유가 깨지면 친절 대신 귀찮음, 나아가 방어적 태도로 대응하는 것에 속상할 때가 많다. 세상에 착한 사람만 사는 나라는 없고, 평생 좋은 얼굴로 사는 사람도 없다. 다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먼저 친절하고, 그것이 같은 수준의 친절로 보답받기를 기대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룰을 먼저 깰 염려가 비교적 적어 보이는 사람들을 계약 상대로 맞게 된 것이 기쁘다. 일단은 그렇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내 이웃의 프랑스 은퇴 이민자 파스칼은 땅 주인이 자신에게 공사 발주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짓는다고 시비를 걸어서 골탕을 먹었다. 수영장 공사에 문제가 생겨서 두 번이나 팀을 해고하고, 세 번째 팀이 해결에 나섰는데 이번에는 땅 주인이 나타나서 현장 인부들에게 시비를 거는 바람에 인부들이 겁 먹고 도망을 가버린 거다. 그걸 해결하느라 건축가가 동네 유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하여간 난장판이 벌어졌더랬다. 제발 내가 이런 괴담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주인 가족으로부터 커피 스무 잔, 코코넛 열 개, 망고 다섯 개, 옥수수 한 보따리를 얻어 먹은 후에 마침내 계약서를 쓰는 날이 왔다. 그분들은 우리가 갈 때마다 뭘 자꾸 그렇게 준다. 그러고도 많이 안 가져간다며 서운해하는 거 보면 우리가 땅을 빌리러 온 건지, 고향 집에 휴가를 온 건지 헷갈린다. 계약서를 쓰는 날에도 동사무소 격의 행정기관 직원, 매도자와 매수자 각각의 증인, 그리고 계약 당사자들이 코코넛, 커피, 옥수수, 비스킷을 두고 마주 앉았다. 서로 처음 만나는 현지인들끼리 “너는 어디 사냐, 그럼 학교는 어디 나왔냐, 누구 아냐” 이를테면 ‘족보 확인’을 한참 하더니 계약서를 읽는데, 갑자기 공무원이 심각한 말을 했다. 나는 계약서가 잘못된 줄 알고 걱정했다. 알고 보니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공사가 중단된 곳이 많고, 덩달아 자재 털이범들이 기승을 부려서 우리한테 종종 항의가 들어온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소리였다. 공사장 좀도둑, 민원 예방과 책임 소재에 민감한 공무원…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공사는 아직 준비 중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프리랜스 건축 엔지니어, 프랑스 건축회사 사장, 남자친구의 다이빙센터를 지은 지역 유지 등 세 팀을 만나보고 결국 프랑스 회사로 결정했는데, 어설프게 아는 게 병이라고 예산 작업만 3주째다. 물론 아주 저렴한 방식으로 지을 수도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싱글 여성 T는 60㎡짜리 집을 두 달 안 걸려서, 총 1000만원 남짓으로 지었다. 그런데 지난주, 그러니까 우기가 시작되고 첫 폭우가 쏟아진 날 지붕에서 물이 샜다. T는 새벽에 비를 맞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사방에 양동이를 받치고 벽장에 숨은 고양이를 구출한 다음 건축업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T의 전화를 수신 거부했다.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다. 그럼 돈을 많이 쓰는 방법도 있다. 물론 돈 쓰고 코 베이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1년 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하거나 지켜보면서 성품과 능력을 어느 정도 검증한 사람들과 작업할 예정이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불과 3년 전만 해도 천연 소재를 쓴 발리 하우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땅이 생기면 조글로나 글라닥이라 불리는 전통 조립식 목조 주택을 사고 싶었다. 나무와 벽돌이 섞인 집도 보기엔 좋다. 하지만 여기 살면서 흰개미떼가 야금야금 집을 먹어치우는 걸 몇 년째 보니까 이젠 그냥 지극히 인공적인 건물을 짓고 있다. H빔, PVC 창호, 알루미늄 천장 구조물 따위의 가격을 조사하고, 한숨 쉬고, 그냥 나무로 할까, 아냐 그래도 조금만 더 쓰면 되는데, 어머 조금씩이 모이니까 엄청 큰돈이 돼버리네, 그래도 서울에선 이 돈으로 집은 꿈도 못 꾸는데, 아니 그럴 거면 서울에 살지 여긴 왜 왔어, 일단 돈을 팍팍 쓰고 열심히 일을 해서 메꿀까… 이러는 날들의 연속이다. 엑셀광이자, 4월에 다른 큰 프로젝트가 있는지라 그 전까지 공사를 마치고 싶은 건축업자 유리가 내 휴대폰에 자재를 선택하면 자동으로 예산이 계산되는 애플리케이션을 깔아놓고 매일 수십 가지 시장조사 결과를 입력 중이지만 숫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저 울고 싶다.

오늘 저녁 나는 튼튼한 골조를 선택하고 폴딩 도어 다섯 개와 현관문, 그리고 수영장을 날려버릴 것인가, 아니면 적당히 남들 다 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그것들을 지킬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왜 그냥 모델 하우스에 가서 아파트를 구매하는 삶을 살지 못했나, 자신을 돌아볼 것이다.

▶이숙명

[다른 삶]개와 이웃이 없는, 집 앞엔 인터넷 안테나가 우뚝 선…이 땅이다!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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