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법치주의

2021.03.22 12:30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사람의 지배, 법에 의한 지배, 법의 지배 순서로 역사는 발전했다. 법에 의한 지배는 한국의 군사정부 시기나 독일의 나치 정권 시절을 가리킨다. 김도균 서울대 교수는 “일제강점기나 1970~1980년대 군사정권 시기에는 고문, 폭력과 법에 의한 통치가 겸용됐다. 이 시기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파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법의 지배(rule of law)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시절 수사기관은 허울뿐인 법을 내세워 시민과 정적을 수사하고 법정에 세웠다. 1990년대 들어서는 미래 권력의 정적인 집권 말기 권력도 처벌했다. 법에 의한 지배라도 폭력을 쓰는 사람의 지배보다는 나았다.

[이범준의 저스티스] 윤석열의 법치주의

우리말로 법이라고 번역되는 독일어는 두 가지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Gesetz)과 정의롭고 올바른 규범(Recht)이다. 뒤의 단어가 법치국가(Rechtsstaat)에 쓰인다. 독일의 법치국가 이념은 영국의 법의 지배와 쌍둥이인데 한국에서는 법치주의로 표현된다. 법치주의가 무엇인지 독일어 단어의 차이를 써서 설명한 대법원 판결이 있다. “법률의 해석은 단순히 존재하는 법률을 인식·발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경우 적극적으로 법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실질적 법치주의의 요청이다. 법원은 ‘법률’이 아닌 ‘법’을 선언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오작동이 법치주의로 치유된다고들 한다. 민주주의 위에 입헌주의가 있고, 입헌주의 전에 법치주의가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법치주의에 관한 생각을 밝히면서 검사 직에서 떠났다. 법치주의를 회복하려 정치권으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군부독재를 문민정부로 바꿔낸 것이 과거의 민주화 운동이었다면, 그 이후의 민주화 운동은 결국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문민정부 이후 검찰의 반부패 활동이 우리 사회 특권을 없애고, 국민들이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검찰과 수사가 민주주의를 실현해왔고, 법치주의가 민주주의에 포함되는 점을 생각하면, 법치주의까지 완성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정치에 뛰어들게 만든 법치주의 파괴로, 그는 검찰 권한을 분산하고 이전하는 국회 법안을 꼽는다. “지금 추진되는 (중대범죄수사청 신설) 입법은 검찰 해체”라면서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법치를 말살하는 것이며, 헌법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다. 허울뿐인 민주주의가 법치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는 그의 얘기는 두 가지 주장과 사실을 전제한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포함한다’는 독특한 주장과, 현재 선출된 권력이 국민의 의사와 무관한 대표라는 사실이다. 이를 뒤집으면 허울뿐인 대표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민주주의가 파괴되면서 법치주의도 말살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법치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검찰의 권한을 그대로 두어야 하고, 이를 위해 그가 정치에 나서는 것이다.

헌법을 개정해야만 권한이 축소되는 기관이 헌법기관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 국회의원, 대법원, 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감사원, 지방자치단체가 그렇다. 검찰은 헌법기관이 아니라고 헌법교과서가 설명한다. 헌법에 영장 신청권자로 검사라는 단어가 한 차례 등장하지만, 그 밖에 검사의 자격과 임명 절차 등은 모두 법률에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영장 신청권자가 일하는 곳이 헌법기관이라면 새로 생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헌법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는 최근 “행정부 내의 법률상 기관에 불과한 수사처와 다른 수사기관 사이에 권한 배분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를 헌법상의 권력분립원칙의 문제로 볼 수는 없고, 입법정책의 문제일 뿐”이라고 했다.

윤 전 총장이 대법원과 헌재의 판단을 뛰어넘어 수사권과 기소권 분산이 법치주의 파괴라고 과감하게 선언하는 배경에는, 이를 추진하는 선출 권력이 범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손수 밝혀왔다는 자신감이 있다. 수많은 선출 권력이 그의 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는 사법 권력까지 그의 손에 발가벗겨졌다. 그러니 민주주의에 법치주의를 뒤섞어 수사기관 아래 두는 듯한 발언도 가능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처벌한 윤 전 총장을 원망하던 태극기 부대들이 어느새 그를 열렬히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문재인 정권을 처벌해달라고 애원한다. 국민의 열망은 여의도가 아닌 서초동으로 향하고 있다. 수사 권력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현신(現身)이 되어가고 있다. 법에 의한 지배가 법의 지배를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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