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첫 유죄' 법정에서 웃은 무죄 판사

2021.03.25 15:20 입력 2021.03.25 15:59 수정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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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후 2시 시작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재판장 윤종섭)의 선고는 3시간40분 동안 진행됐다. 이날은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 대법원 법원행정처 관련 법관들에 대한 첫 선고 기일이었다. 이 사건 판결문은 별지 제외하고도 458쪽에 달했다. 판결의 핵심이 되는 요지만 설명한 것임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법행정 사무를 본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이날 판결의 주 대상이었다.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는 이 전 실장과 이 전 위원에 대해 인정되는 사실 관계를 설명하고 관련 법리에 따라 유·무죄 판단을 설명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두 사람에 대해 적용된 혐의 중 일부가 유죄로 인정돼 결국 집행유예형이 선고됐다. 사법농단 사건 중 처음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였다.

이들이 앉은 피고인석 뒷줄에 있던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현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와 심상철 전 서울고등법원장(현 수원지법 성남지원 원로법관)은 유죄가 선고된 두 사람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 했다. 방 부장판사와 심 전 법원장은 자신에 대한 혐의를 재판부가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듣기 위해 피고인석에 앉아 2시간 가량 기다려야 했다. 방 부장판사와 심 전 법원장에 대해선 무죄가 선고됐다.

방 부장판사는 이날 재판정에서 거의 유일하게 웃은 인물이다. 방 부장판사는 재판 시작 10분 전 법정에 들어서 먼저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심 전 법원장에게 웃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굳은 표정으로 법정에 들어서 먼저 앉아 있던 이 전 위원의 팔을 ‘툭’ 치며 인사한 뒤 피고인석에 앉은 이 전 실장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방 부장판사는 2015년 2월 전주지법 부장판사 시절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회 의원들의 행정소송 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부의 재판장을 맡았는데,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총괄심의관에게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심증을 알려 준 혐의(공무상비밀누설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사건 주심인 배석판사가 작성한 판결문을 실질적인 합의도 거치지 않고 법원행정처 입장을 반영해 수정하면서 배석판사인 임모 판사의 독립된 재판권 행사를 방해(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당시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심판 결정 이후 소속 국회의원이나 비례대표 의원들의 자격이 상실되면서 행정소송이 제기되던 시점이었다. 대법원은 헌법재판소가 법적 근거 없이 의원직 상실을 결정한 것은 법원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라고 보고 일련의 통진당 관련 재판을 통해 최종적인 법률 해석 권한이 법원에 있음을 강조할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관련 사건을 맡게 된 방 부장판사에게 법원행정처의 연락이 닿게 된 것이다.

우선 재판부는 “판결을 선고하기도 전에 판사가 법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심증을 누설한 경우 그 판결의 공정성에 관하여 의심을 품게 된다”며 “공정하지 않은 재판은 벌써 재판이라고 할 수 없고 국가의 재판기능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변론종결 이후의 판사의 심증은 아직 선고되지 않은 판결의 결론을 직접적으로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정보”라면서 “피고인이 누설한 자신의 심증은 실질적으로 그것을 비밀로서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라고 했다. 판결을 앞둔 재판장의 심증은 비록 합의에 이르지 않은 잠정적인 것이라도 비밀로 다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방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의 연락을 받고 “공직선거법 제192조 제4항에서 정한 해산에는 강제해산이 포함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하는데, 어려운 문제이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일련의 행정소송에서 법원의 담당 재판부가 헌재의 결정(의원직 상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재판 대상 자체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각하’ 결정이 나올 지 우려하고 있었다. 방 부장판사가 말한 자신의 심증은 ‘각하’ 결정은 하지 않고 본안 판단을 할 것이라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재판 결과를 추측하게 하는 비밀을 누설했다는 뜻이다.

다만 재판부는 방 부장판사에게 공무상비밀누설죄를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봤다. 방 부장판사의 심증이 비록 비밀로 다뤄져야 하나, 법원행정처 총괄심의관에게 말한 심증은 “재판부의 일원으로서 내심에서 자연스레 갖게 된 추상적인 의견에 해당하고, 외부로부터 유래한 구체적 사실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심증은 비밀로 다뤄져야 하나, 그 심증 자체는 법관으로서의 직무집행 중 취득한 ‘사실’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재판부는 방 부장판사의 심증을 전해들은 법원행정처 총괄심의관이 “직무집행상 비밀을 지득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방 부장판사가 배석판사와 제대로 된 합의 없이 판결문 일부를 법원행정처의 의중을 반영해 수정했다는 혐의 역시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행정처의 의견을 전달받은 것과 관계 없이 방 부장판사가 이미 판결문의 부족한 논리를 보강하려 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배석판사가 작성한 판결문을 수정했다면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재판부는 “지방법원 부장판사에게 특정 사건에 관하여 지방법원 배석판사에 대한 폭넓은 지적 및 권고 권한을 인정할 필요성이 있다”며 “(판결문 수정이) 적절하였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 지적과 권고 행위는 그에게 부여된 직권을 남용한 행위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심 전 법원장에 대해선 재판부는 공소사실의 증명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심 전 법원장은 2015년 12월 통합진보당 관련 항소심 사건을 특정 재판부가 맡도록 사건 배당에 개입한 혐의를 받았다. 재판부는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특정 재판부에 사건을 배당하기 위해 심 전 법원장이 “사건 번호 하나 따놓으라”고 했다는 증언은 신빙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재판부는 “다른 항소심 사건과 비교해 볼 때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항소심 사건 배당이 이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정은 인정되나 이러한 사정만으로 위에서 본 공소장 기재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심 전 법원장에 대한 혐의 판단은 다른 피고인들의 혐의와 비교해 순식간에 끝이 났다.

재판부는 방 부장판사와 심 전 법원장에 대해 무죄 취지로 설명한 뒤 다시 이 전 실장과 이 전 위원의 혐의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방 부장판사의 변호인은 무죄 판단이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방 부장판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몇 차례 툭툭 두드렸다. 방 부장판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내쉬었고,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판부가 심 전 법원장에 대한 혐의도 무죄 취지로 판시했다. 심 전 법원장의 변호인은 방 부장판사에게 ‘축하한다’는 듯이 몇 마디 나지막이 말을 건냈다. 방 부장판사는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 너머로도 보일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재판정에 들어설 때처럼 심 전 법원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는 동안에도 재판장의 판결 낭독은 계속됐고 이 전 위원은 여전히 주먹을 움켜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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