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되는 곳에도 돈을 쓰는 곳…풍족하지 않아도 글은 풍성해진다

2021.05.21 16:13 입력 2021.05.21 22:30 수정
나승위

나승위의 ‘라곰 배우기’

2014년 겨울, 주스웨덴 한국대사관 문화홍보관의 부탁을 하나 받았다. 당시 스웨덴을 방문 중이던 고 최정례 시인(1955~2021)을 위해 혹시 말뫼에서 시낭송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말뫼 시인단체의 회원을 알아냈고, 살짝 눈발 흩뿌리던 어느 운치 있는 겨울날 저녁, 말뫼 시인들이 모여 아름다운 시를 낭송하는 모임에 최 시인의 참여를 주선할 수 있었다.

노벨상의 나라 스웨덴에 전업 작가가 많은 이유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배려 깊은 혜택 덕분이다. 작가들의 든든한 토양이자 버팀목 역할을 하는 스웨덴 작가 노조 건물.

노벨상의 나라 스웨덴에 전업 작가가 많은 이유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배려 깊은 혜택 덕분이다. 작가들의 든든한 토양이자 버팀목 역할을 하는 스웨덴 작가 노조 건물.

스웨덴 시인들은 뜻밖의 한국 시인의 방문과 참여를 크게 반겼다.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헨릭 닐손은 친절하게도 최 시인의 시를 스웨덴어로 번역해 주었고, 최 시인과 함께 무대 위에서 시를 낭송했다. 스웨덴 땅에서 스웨덴 시들이 낭독되는 사이에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스웨덴어로 낭독되는 한국 시를 듣다니. 너무 멋지고 마음 뿌듯한 일이었다. 참석한 스웨덴 시인들과 비평가들은 최 시인의 독특한 시 세계에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마르틴손이 다닌 학교 등이 작가 숙소로 제공
공공대출보상제와 작가기금의 집필 장려금과 연금, 한림원의 포상까지
작가노조나 정부 기관이 제공하는 혜택만으론 생계 유지는 어렵지만
스웨덴의 관대하고 풍요로운 지원책은 작가들의 언어를 살찌운다

중학생 때, 내 책상 위에는 자주 두툼한 원고지 뭉치가, 방바닥에는 확 구겨서 버린 원고지가 널려 있곤 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고뇌하는 작가의 모습을 연기하며 놀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재미있었는데, 누구에게 들키면 민망하기 짝이 없는 놀이였다. 이렇듯 어렸을 때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소수의 베스트셀러 작가를 제외하고는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없다는 걸 부지불식간 깨달았던 것 아닐까 싶다. 무엇을 하든 먹고사는 건 중요한 문제니까. 스웨덴에 와서 책을 두 권 썼으니, 부족하나마 어렸을 때 꿈이 이루어진 것도 같다. 그런데 책을 쓰고 보니 알겠다. 철이 들면서 부지불식간 깨달았던 ‘글만 써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이 진정 맞는 깨달음이었다는 것을!

말뫼의 시립도서관.

말뫼의 시립도서관.

스웨덴 작가들은 어떨까. 복지 ‘짱짱한’ 나라이니, 생활에 대한 염려 없이 글만 쓰며 살까. 이곳 시인 및 작가 친구들 얘기로는 그들의 삶도 녹록하지 않다고 한다. 돈이 되는 곳에 돈이 몰리는 물질주의 풍조가 전 지구를 덮고 있으니, 스웨덴이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오랜만에 헨릭 닐손을 만났다. 나도 그도 각자의 일이 바빠 한동안 연락하지 못하고 지내던 차에 얼마 전 도시락 가게에 그를 초대했다. 내가 도시락 가게를 해서 좋은 점은 보고 싶은 사람을 가게에 불러 내가 만든 한국음식을 대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시인의 안타까운 부음을 비롯하여 우리는 그간 서로에게 있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 그간의 얘길 나누다 보니,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님을 새삼 느꼈다. 그사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로지 글쓰는 일만을 업으로 삼고 있는 그는 작가 숙소 지원 프로그램에 채택되어 곧 집필을 위해 2주 동안 스웨덴 동남부에 위치한 블레킹에의 숲속 마을에 간다고 했다. 그가 묵을 숙소는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 건물 중 하나로 1844년 문을 연 알티드훌츠 학교이다. 1880년에는 50명까지 학생 수가 늘었다가 점점 줄어 졸업생이 1명이었던 1943년에 폐교됐다. 197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하뤼 마르틴손(1904~1978)이 가난하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1년 동안 다닌 학교이기도 한데, 양쪽에 호수를 끼고 있는 정말 아름다운 숲속에 있다고 한다. 아, 나도 한번 그런 곳에 묵으면서 이슬을 먹고사는 늑대 이야기 한 편 써봤으면.

작가 숙소 지원 프로그램에 뽑힌 헨릭 닐손이 집필을 위해 머물고 있는 알티드훌츠 학교.

작가 숙소 지원 프로그램에 뽑힌 헨릭 닐손이 집필을 위해 머물고 있는 알티드훌츠 학교.

작가들에게 숙소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적지 않아서 헨릭에게 이런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중 최고의 장소는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아리안네 발그렌(1917~1993) 별장이었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영화제작자로도 활발히 활동했던 발그렌이 ‘스웨덴 작가노조’에 기증한 개인 소유 별장인데, 헨릭은 두 번이나 다녀왔다며 얼마나 전망이 좋고 아름다운 곳인지 글을 쓸 생각 대신 놀고 싶다는 욕구만 마음에 가득 차올랐다고 말했다. “아, 그런 기회를 그것도 여러 번 얻다니 정말 탁월한 작가군요!” 부러움 가득한 나의 탄성에 그는 운이 좋았다는 말을 하며 웬만큼 열심히 글을 쓰는 작가라면 이런 기회를 잡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외에도 헨릭은 정부나 기관이 작가에게 제공하는 갖가지 혜택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혜택’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당연하다. 스웨덴의 복지제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어떤 사람이든 일하지 않고 복지혜택만으로는 살기 어렵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내가 듣기에 놀라운 혜택들이 많았다. 창창히 교육시켜야 할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스웨덴에 와서, 말로만 들었던 ‘무상교육’을 처음 경험했던 때와 비슷한 감동을 받았다.

작가들에게 소소한 수입원이긴 하지만,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처럼 스웨덴도 공공대출보상제도를 실시한다. 공공도서관에서 책이 대출되는 횟수에 따라 책 저자에게 보상금이 지급되는 제도인데, 나라마다 제도의 기반은 조금씩 다르지만 1946년 덴마크가 세계 최초로 시행했고 스웨덴은 1954년 도입했으며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현재 35개국이 운영하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공공대출 보상금은 ‘스웨덴 작가기금’이 지급하고 있으며 재원은 국가 예산으로 조달된다.

저자나 번역자에게 직접 전달된다고 하여 이 돈은 특별히 ‘저자에게 주는 돈’이라 불리는데, 놀랍게도, 저자가 사망하면 그 보상이 해당 상속인에게 70년 동안이나 지급된다. 2020년 기준, 1회 대출 시 저자에게 약 260원 정도가 지급되며, 2020년도 총지급액은 17억3000만 크로나, 한화로 약 240억원이었다. 지급대상은 스웨덴어 책, 스웨덴어로 번역된 책, 스웨덴 책이 외국어로 번역된 책, 그리고 언어 상관없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 저자의 책이다. 그러니까 스웨덴에서 오래 살고 있는 나도 한국어로 쓴 내 책을 도서관에 기증하고 대출이 반복되면 ‘저자에게 주는 돈’을 연말에 정산해 받을 수 있다는 거다. 약 3700만원이 지급되는 ‘특별도서대출보상금’도 있는데, 지원자가 많아 최소 10년 이상 전업 작가로 일하고 5권 이상 책을 출간한 사람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

2014년 같은 무대에서 시 낭송을 했던 스웨덴 시인 헨릭 닐손과 고 최정례 시인(오른쪽).

2014년 같은 무대에서 시 낭송을 했던 스웨덴 시인 헨릭 닐손과 고 최정례 시인(오른쪽).

또한 ‘스웨덴 작가기금’은 1년에 두 번, 1년·2년·5년 단위로 집필 장려금을 받을 지원자를 모집한다. 1년짜리 집필 장려금(약 1200만원)을 받으면 장편소설 한 권 쓸 것 같고, 2년짜리(1년에 약 2000만원씩 2회)를 받으면 장편소설 한 권에 단편소설 10편, 5년짜리(1년에 약 2100만원씩 5회)를 받으면 대하소설쯤 쓸 수 있지 않을까? 헨릭은 이런 장려금도 여러 차례 받았다. 이외에 1년에 4차례 해외문화교류를 위한 여행보조금도 신청할 수 있다.

‘스웨덴 작가기금’은 또한 심사를 거쳐 작가에게 ‘연금’도 지급한다. 작가연금은 작가활동이나 작품성도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보다는 노령의 스웨덴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는 최저보장연금 이외에 다른 연금이 있는지 그 여부에 따라 지급이 결정된다.

아무리 복지가 짱짱한 스웨덴이라 해도, 젊었을 때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직장에 다니면서 꾸준히 소득연금이나 프리미엄연금을 부어야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낼 수 있다. 작가연금은 젊어서 글을 쓰느라 직장생활을 하지 못해 최저보장연금만 받는 가난한 작가들 노년의 삶을 지원한다. “뛰어난 작가가 아니라 가난한 작가에게 지급한다”는 작가연금 심사기준은 스웨덴 복지제도의 정신을 잘 반영하는 것 같다.

이런 장려금이나 보조금은 ‘스웨덴 작가기금’뿐 아니라 여러 크고 작은 기관들이나 문화재단들도 다양한 형태로 지급한다. 따라서 작가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면 이런저런 혜택을 받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다.

스웨덴 작가들이 누리는 여러 가지 혜택은 1893년 설립된 ‘작가노조’의 힘이 크다. 헨릭도 노조 회원이다. 노조 회원은 노조가 주선하는 여러 가지 장려금이나 숙소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있고, 출판사와 계약을 맺거나 기타 법률 관련 도움이 필요할 때 노조에 고용된 변호사에게 무료 자문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은 저자 인세가 책 정가의 8%에서 10%로 거의 정해져 있는데, 스웨덴은 인세를 작가와 출판사가 협상한다. 보통 스웨덴의 저자 인세는 책 정가의 25%지만, 작가에 따라 인세 편차가 크고 계약 조건도 매번 달라서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다. 심지어 노조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회원에게 1년에 한 번 120만원가량 보조금을 주는데, 예외적인 경우 200만원까지 지급한다. 스웨덴에 존재하는 노조는 모두 ‘강성노조’이다! 약 23만원의 연회비를 낼 만하다. 헨릭에 따르면, 스웨덴에 거주하는 외국인 작가로 나도 작가노조의 회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강성노조이니 어디 한번 회원이 되어볼까?

‘작가노조’와 전혀 상관없는 기관으로 노벨 문학상을 선정하는 문학계 세계 최고 권위의 ‘스웨덴 한림원’에선 노벨상 말고도 스웨덴 작가들에게 수십 개의 문학상과 장려금을 수여한다. 스웨덴 작가라면 어느 날 우체통에서 ‘스웨덴 한림원’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뜬금없이’ “당신에게 1000만원이 지급될 것입니다”같은 문장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편지를 헨릭도 받았고, 6년 전 겨울 시낭송회를 개최했던 포르투갈 출신 시인인 안젤라 가르시아도 받았다. 신청서를 내지도 않았는데, 한림원 자체에서 심사해서 ‘뜬금없이’ 지급하는 포상금이다. 노벨 문학상을 거부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 포상금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포상금에 세금도 붙지 않는다.

작가로서의 삶이 녹록하지 않다고 토로해도, 스웨덴에는 전업 작가들이 많다. 앞서 언급한 전업 작가에게 주어지는 갖가지 혜택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이 크다면 수입이 적거나 일정치 않은 전업 작가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스웨덴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잘 발달된 복지제도를 기반으로 남녀 모두 일하며 각자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사는 사회라, 큰 부담 없이 자신이 원하는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같다. 사회체제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스웨덴 작가들은 영혼만 자유로운 게 아니라, 가족 부양의 책임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이런 작가들의 자유는 언어를 살찌우고, 정신을 풍요롭게 하며 문화를 융성시킨다. “돈이 되지 않는 곳에 돈을 쓰는” 스웨덴 정부의 관대한 문화지원정책들을 보니,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를 스웨덴 사람들이 읽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다른 삶]돈 안되는 곳에도 돈을 쓰는 곳…풍족하지 않아도 글은 풍성해진다


▶나승위

갑자기 스웨덴에서 일자리를 찾은 남편을 따라 아들 셋을 데리고 남부 도시 말뫼에 왔다. 처음엔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뭘 하며 사나 했는데, 지금은 제법 바쁜 사람으로 통한다. 스웨덴을 한국에 소개하는 책 <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와 <스웨덴 일기>를 썼고, 스웨덴 사람들에게 한국의 맛을 소개하고자 비빔밥을 파는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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