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접종 도와준 동포들·지구를 구하려는 친구…여행은 소통과 성장이다

2021.05.28 16:20 입력 2021.05.28 23:16 수정
이숙명

이숙명의 ‘유유자적’

지난 금요일 발리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았다. 나는 단기체류비자가 있기는 하나 회사에 소속된 상태도 아니고 여행업 종사자도 아니기 때문에 접종 순위가 한참 뒤일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발리 한인회와 한국 대사관 분관의 도움으로 일찍 접종할 수 있었다.

발리 한인회와 주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관 분관의 도움으로 일찍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수 있었다. 접종 행사장에서 만난 한인회 관계자들과 문영주 한국 대사관 분관장(가운데).

발리 한인회와 주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관 분관의 도움으로 일찍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수 있었다. 접종 행사장에서 만난 한인회 관계자들과 문영주 한국 대사관 분관장(가운데).

코로나19 이전 발리에는 연평균 20만명 이상의 한국 여행객이 방문했다. 이에 지난해 한국 대사관 분관이 발리에 문을 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올해 6월로 개관이 연기되었다. 그사이 분관과 덴파사르시 측의 만남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교민들의 백신 우선 접종 요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발리 한인회와 한국 대사관 분관의 도움으로 백신 우선 접종
본국의 위상과 먼저 온 이민자들이 현지에서 일궈온 신뢰
나중 온 이주민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유산이 된다

환경 인턴십으로 발리에 온 풍력발전 엔지니어 휴고는
해양환경으로 관심을 돌려 다이빙을 배우며 바다를 지킨다
이렇게 경험하고 배우고 현실을 함께 감각하는 것이 여행이다

덴파사르시는 이번 행사를 이용해 한국과의 우호 관계를 홍보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날 접종 장소에는 한복을 입고 사진 촬영에 응하는 한인회 관계자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외국에 자주 다녀도 주로 여행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교민 사회와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위급한 시기에 도움을 받고 보니 내가 은연중에 빚지고 있는 배경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본국의 위상, 먼저 온 이민자들이 현지에서 일궈온 신뢰 같은 것들은 이주민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유산이다.

다행히 나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고도 큰 증상을 겪지 않았다. 두통과 열감이 있긴 했으나 마치 몸살 끝에 독한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통각이 흐릿해서 아픔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삶]백신 접종 도와준 동포들·지구를 구하려는 친구…여행은 소통과 성장이다

해양단체 인턴십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누사프니다에 온 모나코 출신 엔지니어 휴고.

해양단체 인턴십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누사프니다에 온 모나코 출신 엔지니어 휴고.

누사프니다의 여행업계 친구들과 로컬들은 발리까지 가지 않고 섬 안에서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시노백을 맞았다. 시노백은 당초 국가마다 예방률 데이터가 다르고 전반적으로 백신 효능 수치가 높지 않아 우려를 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시노백 2차 접종을 마친 의료진의 경우 감염예방 효과가 94% 수준으로, 임상에서보다 월등히 높았다고 홍보 중이다. 어쨌든 맞아서 손해 볼 건 없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적극 접종에 응하고 있다. 특히 내가 사는 삭티 마을은 방문자가 부쩍 늘어난 터라 접종을 미룰 수 없다.

삭티 마을의 경기가 살아난 것은 환경단체 ‘인도 오션 프로젝트(Indo Ocean Project, 이하 IOP)’의 활약 덕분이다. IOP는 코로나19와 국경 봉쇄로 인해 중단되었던 환경 인턴십 코스를 올해 초 재개했다. 지금까지 20명가량의 인턴이 섬을 찾았다. 동네 호텔, 식당이 그들로 인해 다시 문을 열었다.

인턴십 코스는 참가자의 레벨에 따라 2~3개월 정도 걸린다. 해양환경 보호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면서 스쿠버다이빙 마스터 자격증도 따야 한다. 기왕에 자격증을 따야 하니 겸사겸사 환경 코스를 수강하는 사람도 있고, 관련 분야를 전공한 뒤 실습차 온 사람도 있다. 본업을 쉬는 동안 뭔가를 배우고 싶다거나 의미 있는 여행을 하고 싶어서 온 사람도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모나코에서 온 IOP 인턴 휴고 시보니가 프로그램 수료 기념으로 해변파티를 열었다. 그는 유럽의 풍력발전 회사에서 엔지니어이자 토목기사,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1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여행하기로 했다. 그 시작이 환경 인턴십이었다. 내가 그와 말을 튼 것은 누사프니다의 버려진 발전소 때문이었다.

누사프니다 한복판, 가장 지대가 높고 전망이 좋은 ‘푼첵 문디’에 풍력발전기 아홉 대가 있다. 인도네시아 재생에너지 사업 초창기인 2005년에서 2007년 사이 건설된 이 기기들은 현재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나는 멀쩡한 발전소를 세워놓고 가동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서 몇날 며칠 인터넷을 뒤진 적이 있는데, 어떤 문서를 보아도 ‘기술적 문제’라고 간단히 언급된 게 전부였다. 누사프니다는 여전히 디젤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나는 휴고가 휴일에 푼첵 문디를 둘러보았다기에 그 발전소가 다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너무 낡아서 불가능할 것 같다고 답했다. 내친김에 그는 누사프니다가 가진 훌륭한 재생에너지 자원들, 인도네시아 같은 섬 나라에 적합한 지역발전 방식, 재생에너지 산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간단한 강의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는데, 내가 “어딜 가서 이런 사람을 만나 이런 얘길 듣겠어. 여기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라고 하자 그는 씩 웃으면서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지”라고 대답했다.

나는 휴고가 왜 본업과 무관한 다이빙과 환경을 배우러 왔는지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지구를 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거든. 그래서 재생에너지에도 관심을 갖게 된 거고. 나는 10년 동안 지상풍력발전 분야에서 일했는데 미래는 해상풍력발전에 있다는 걸 깨닫고 회사를 옮기기로 했어. 그사이에 1년을 쉴 수 있게 되었는데 마냥 노는 건 적성에 안 맞아서 인턴십을 하기로 했고. 나는 해양국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바다에도 관심이 많아. 해양 환경 인턴십이 딱이었지.”

그가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타입이란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휴고는 인턴 기간에도 휴일이면 발리에 나가서 친구를 사귀고, 고아원 자원봉사나 해변청소 이벤트에 참여했다. 한 번은 발리에서 스노클링 손님 24명을 데려와 다이빙센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자네, 여행 에이전시를 차려보지 않겠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인싸’란 표현은 이런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 아닐까. 그는 IOP 인턴십과 스쿠버다이빙 마스터 코스를 끝내자마자 프리다이빙을 배우러 달려가기도 했다. 이번주에는 발리에서 사귄 친구들과 인도네시아 동부 여행을 떠났는데, 한 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직할 분야와 관련된 온라인 강좌를 수강할 계획이다.

“한창 일 때문에 바쁠 때는 ‘그만두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매일 바닷가에서 빈둥거리고 싶다!’ 그러지만 막상 휴가를 가서 며칠 잘 쉬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뭐 할 거 없나?’ 두리번거리게 되잖아. 인간은 보람, 긍지, 자기효용감 같은 게 필요하니까.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누사프니다에서 보낸 시간은 대만족이야. 저마다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문화적으로 더 풍요로워진 기분이 들어. 인턴십 프로그램도 재미있었는데 시험이 없어서 더 좋았어.”

휴고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시험이 없어서 좋다는 대목이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학업과 점수를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배움의 즐거움을 더 만끽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나는 중간까지 보고 덮어둔 인도네시아어 교재가 떠올라서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역시 한국인은 시험이 없으면 동기부여가 안 된다니까”라고 핑계를 대던 순간도.

휴고와 얘기를 나눈 후 며칠 동안 나는 여행의 다양한 의미와 방법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문화적으로 더 풍요로워진다는 건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고 정신이 성장한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만 떠나면, 책만 읽으면, 문화생활에 시간과 돈을 쏟아부으면 자동으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질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세계를 경험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타인과 교류하고 현실을 감각하려는 의지 없이 돌아다니는 여행은 휴양은 될지언정 자아의 성장에 거름이 되진 않는다. 물론 휴양은 휴양대로 좋다. 다만 나는 휴양객을 자주 보니까 가끔은 이렇게 능동적으로 뭔가를 경험하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겁고, 삶에 자극도 된다.

휴고가 한 달간의 동부 여행을 떠나기 전날 주최한 해변파티에는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사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섬에 도착한 지 석 달 만에 파티 호스트가 될 생각을 하진 않는다. 역시 여행 에이전트로 대성할 재목이다. 다시 누구나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이런 여행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른 삶]백신 접종 도와준 동포들·지구를 구하려는 친구…여행은 소통과 성장이다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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