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화장실에 남·여 간판을 뗐다···'우리 모두'를 위해

2022.03.16 16:15 입력 2022.03.17 14:48 수정

성공회대, 대학 최초 성중립화장실 설치

성별·장애 관계없이 누구나 사용 가능

“차별 없는 사회의 주춧돌 되길 기대”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된 16일 학생들이 화장실을 살펴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된 16일 학생들이 화장실을 살펴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의 한 화장실 표지판에는 사람 6명이 그려져 있다. 윗 줄 양 끝에는 치마를 입은 여성과 바지를 입은 남성이 있고, 그 사이에 양쪽의 복장을 반반씩 걸친 사람이 있다. 아래 줄에는 유아를 눕히고 기저귀를 가는 사람, 휠체어를 타고 바퀴를 미는 장애인이 있다.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픽토그램(그림문자)이 표지판에 복작복작한 이 화장실은 학내 새천년관 지하 1층에 마련된 성 중립 화장실 ‘모두의 화장실’이다. 겨울 동안 공사를 거쳐 16일 문을 연 이 화장실에는 남성-여성의 구분이 없다. 남·녀 화장실을 마음 놓고 이용하기 어려운 성소수자는 물론, 이성 보호자와 함께 다니는 유아·장애인·노인 등 약자도 마음 편히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화장실 문을 여니 휠체어도 여유롭게 다닐 만큼 넓은 통로가 나왔다. 변기, 세면대, 기저귀 교환대 곳곳에 휠체어용 손잡이가 달려 있다. 세면대 두 개의 높이는 서로 다르다. 한쪽 세면대 앞에는 거울이 있는데, 누르면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휠체어에 앉은 사람도 쉽게 거울을 볼 수 있다. 점자블럭과 음성인식 시스템, 비상통화장치도 마련했다. 성별이나 장애 유무에 따라 차별받지 않도록 한 ‘배리어 프리’ 장치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으로 평소 학내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우준하씨(국제문화연구학과)는 이날 새천년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그동안 화장실을 이용할 때면 비데가 있는 다른 건물로 눈과 비를 맞아가며 가야 했는데, 이제야 제가 학교 구성원으로 존중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됐다. 성공회대 본부와 37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가 16일 성공회대 강의동으로 쓰이는 새천년관 앞에서 모두의 화장실 준공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됐다. 성공회대 본부와 37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가 16일 성공회대 강의동으로 쓰이는 새천년관 앞에서 모두의 화장실 준공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성 중립 화장실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공공장소에는 꽤 설치돼 있다. 한국도 일부 시민단체 등이 성 중립 화장실을 운영 중이지만 대학에 마련한 건 성공회대가 처음이다. 모두의 화장실 설립을 도운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은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 중심인 화장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배제의 모습을 닮았다”며 “모두의 화장실은 모든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을 만드는 의제”라고 했다.

그러나 인권 의식이 높은 곳으로 꼽히는 성공회대에서도 화장실 설치 과정은 쉽지 않았다. 2017년부터 설치 주장이 나왔지만 준공까지 5년이 걸렸다. 일부 학내 구성원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학교 측도 반대 여론 때문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에서 설치를 추진한 학생회 측과 반대 측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학생회 측은 이 문제를 다수결에 부치는 대신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을 선택했다. 지난해부터 토론회와 강연, 부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캠페인을 통해 안건을 알리고 논의했다. 당시 학생회 비대위원장이었던 이훈씨(25·사회융합자율학부)는 반대 의견을 가진 학생들을 직접 만나가며 설득했다. “어려웠지만, 성소수자도 화장실이 필요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또 화장실을 넘어 성공회대 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죠.”

지난해 10월 총장과 교수·교직원, 학생 등 60여명이 참석한 대토론회가 전환점이었다. 화장실 설치 반대 측은 토론회에서 ‘의견 수렴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 화장실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구성원들은 ‘모두의 화장실 설치 자체에는 우리 모두 찬성한다’는 데 동의했고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11월 대학 처장단은 화장실 설치를 확정했다.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됐다. 성공회대 본부와 37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가 16일 성공회대 강의동으로 쓰이는 새천년관 앞에서 모두의 화장실 준공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됐다. 성공회대 본부와 37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가 16일 성공회대 강의동으로 쓰이는 새천년관 앞에서 모두의 화장실 준공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차별금지법 등 한국 사회의 인권 의제들은 자주 ‘사회적 합의’라는 벽에 부딪힌다. 성공회대 구성원들은 숙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 점에 자부심을 가졌다. 김 총장은 “추진 과정에서 다소 미흡한 점도 있었지만 숙의민주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모두의 화장실을 만들게 된 점을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교정에서 만난 은승채씨(22·사회학과)는 “학생회 측에서 마구잡이로 진행하는 게 아니라 세미나와 행사 등 다양한 과정이 있었고, 학우로서 그런 노력을 긍정적으로 봤다”며 “저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던 점을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은씨는 “화장실 갈 권리는 생존권과 직결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직 화장실의 필요성에 의문이 남는다는 이 학교 학생 A씨(25)도 “저도 따지자면 굳이 필요한가 하는 쪽이지만, 여러 논의를 통해 결정된 이상 존중한다”고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의 화장실이 차별 없는 사회의 주춧돌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훈씨는 “이 공간은 소수자가 화장실을 갈 수 있게 된 점에선 간단하면서도, 대한민국의 인권을 진보시키는 거대한 공간”이라며 “거침없이 사랑하며 있는 힘껏 포용하자는 메시지를 사회에 던진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성계진 비대위 인권국장은 “인권 문제를 남의 것이라고 선을 긋지 않고 나와 연결된 문제라고 생각해야 한다”면서 “나의 친구와 가족, 이웃이 겪는 문제이며 미래의 내가 어떤 정체성으로 이 사회에 존재할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직 한 칸 뿐인 이 화장실이 캠퍼스 구석구석에, 나아가 더 많은 대학과 공공장소로 퍼져나가길 이들은 기원했다.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된 16일 학생들이 화장실을 살펴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장애 유무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모두의 화장실’이 국내 대학 중 성공회대에 처음으로 설치된 16일 학생들이 화장실을 살펴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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