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주민들 끌고와 ‘조폭’ 누명…술값 외상 있던 난 ‘두목’ 몰려

2022.11.17 20:59 입력 2022.11.17 21:00 수정

② 광주 5·18 항쟁 이후 전국에 퍼진 ‘전두환 공포정치’

1980년 5월 경찰에 의해 ‘영남대 살인사건’ 관련 조직폭력배로 몰려 영문도 모른 채 고문을 당했던 김상철씨(왼쪽)와 홍순주씨가 42년이 흐른 뒤인 지난달 25일 대구 수성구 한 식당 뒷마당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1980년 5월 경찰에 의해 ‘영남대 살인사건’ 관련 조직폭력배로 몰려 영문도 모른 채 고문을 당했던 김상철씨(왼쪽)와 홍순주씨가 42년이 흐른 뒤인 지난달 25일 대구 수성구 한 식당 뒷마당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1980년 5월20일 경북 경산군 시골 마을의 골목은 조용했다. 저녁 뉴스에선 북한의 남침 징후가 보여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 동네 술집에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즐기는 홍순주씨(당시 29세)였지만, 거리에 감도는 스산한 느낌에 홍씨는 일찍 귀가했다.

통금 시간이 지난 새벽 2시, 홍씨는 개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연 현관문 앞엔 남자 네 명이 서 있었다. 경산경찰서 소속 형사라고 밝힌 이들은 홍씨가 ‘영남대학교 살인사건’에 연루됐다고 설명했다. 영남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던 홍씨는 자신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듣지 못한 채 차량으로 끌려갔다. 당시 영남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없었다. 자신을 경찰서로 끌고 가려고 지어낸 얘기란 걸 홍씨는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한 4개월 뒤에야 알게 됐다.

홍씨의 친구 김상철씨(당시 31세)의 집에도 형사들이 찾아왔다. 김씨는 지금도 형사의 이름을 기억한다. 이씨는 “예승혜라는 형사였다. 원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문밖에 나가보니 그 형사가 있었다”고 했다. 형사는 김씨에게 A씨의 행방을 물었다. 답을 하지 못하자 형사는 김씨를 경찰차에 태웠다. A씨는 그날 밤 자택에서 자고 있었고, 경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김씨가 알아차린 것 역시 교도소에서 출감한 뒤였다.

홍씨와 김씨는 고문을 받고 ‘고래심줄파’라는 조직폭력배로 몰려 감옥에 수감됐다가 같은 해 9월 공소기각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인생이 망가졌지만 사과도, 설명도 없었다. 같은 상처를 가진 홍씨와 김씨는 지난달 25일 김씨가 운영하는 백반집 뒷마당에 마주 앉았다. 돼지고기 수육과 갖가지 안주가 차려졌지만, 이들은 연거푸 소주만 들이켰다. 경찰관에게 당한 고문 이야기를 할 때는 당시로 돌아간 듯 소주잔조차 잡지 못한 채 먼 곳을 쳐다봤다. 이들은 지난 5월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진실화해위는 조사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지난달 6일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전두환 ‘불량배 청소’에 휩쓸려 누명

1980년 5월20일 시골동네 친구
있지도 않은 살인사건 연루 지목
“네 맞습니다” 나올 때까지 맞아

전두환 신군부, 전국에 계엄 확대
사회 정화 명목 불량배 잡는다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붙잡아

당시 경찰서 대강당에 붙잡혀온 사람은 홍씨와 김씨를 포함해 모두 13명이었다. 모두 친구의 동생, 동네 이웃 주민 등 건너건너 아는 사이였다. 경찰이 홍씨에게 들이민 혐의는 ‘술값 외상’이었다. 술집 주인에게 위해를 가해 술값을 안 내려고 외상을 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경찰은 홍씨가 붙잡혀 온 13명의 두목이며, 이들이 조직폭력배로 활동했다고 우겼다. 홍씨와 김씨는 “그때 술집 주인과도 다 아는 사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리운 사람들에게 왜 그러겠냐”고 말했다. 이들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씨가 부인할 때마다 형사는 몽둥이로 김씨의 머리를 후려쳤다. 폭행은 김씨의 입에서 ‘네 맞습니다’라는 답이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김씨는 폭행을 당하면서도 의아했다. 경찰이 자신과 홍씨를 폭력조직으로 모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학생운동을 하거나 민주화 시위에 나간 적도 없었다. 김씨는 조사를 받던 중 고개를 들어 경찰서 텔레비전을 보고서야 자신이 끌려온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김씨는 “텔레비전에서 전두환이 탱크를 몰고 가는 영상을 봤다”며 “당시 계엄령을 내려서 사회악을 정리한다고 그랬다. 실제로는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잡혀온 사람 중 깡패는 아무도 없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잡혀 들어왔다”고 했다.

홍씨와 김씨가 경찰에게 끌려간 1980년 5월, 정부는 시민의 소요를 수습하느라 분주했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 사망 다음날인 1979년 10월27일 오전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내란, 전쟁 등 비상사태로 국가가 일상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행정부 수반이 군대를 동원해 치안과 사법권을 유지하는 조치다. 계엄령 이후 모든 언론보도는 정부의 검열 대상이 됐다. 항만과 공항의 출입도 제한됐다. 전국의 대학은 일제히 휴교에 들어갔다. 오후 10시 이후 통행도 금지됐다.

계엄령은 같은 해 12월12일 전두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에도 이어졌다. 전두환 군부는 민주화와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우려했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역에서 전국 10만 대학생 총궐기가 열렸다. 같은 날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포함한 개헌안 합의가 이뤄지자 군부의 위기감은 고조됐다. 결국 군부는 5월17일 오후 9시쯤 ‘북한의 남침 가능성 고조’를 이유로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음날 광주에는 군부대가 투입됐다.

계엄 확대 이후 전두환 신군부는 8월 ‘사회 정화’를 내세워 삼청교육대를 군부대 안에 설치했다. 전두환 정부는 ‘불량배 검거’ 명목으로 법원의 구속영장도 없이 삼청교육대에 약 4만명을 수용했다. 이들은 불법 구금과 구타 등 온갖 가혹행위를 당했다. 확인된 사망자 수만 421명에 달한다. 홍씨와 김씨도 삼청교육대 설치에 앞서 불량배 청소를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던 것이다.

■물고문보다 괴로운 건 친구의 비명이었다

끔찍한 고문 자행·사건 날조 후
이웃·친구·동생 13명과 같이
군 벙커에서 군사재판 받게 해

삼청교육대 가기 전 풀려났지만
군검찰에 남아 있는 자료 없어
갑작스러운 ‘공소기각’ 이유 몰라

5월22일 홍씨와 김씨는 경북도경(현 경상북도경찰청)으로 옮겨졌다. 축축한 지하실은 전구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형사는 그곳에서 홍씨 일행을 한 명씩 불렀다. 홍씨가 제일 먼저 불려갔다. 시멘트 바닥 위에 놓인 침대에 홍씨를 눕히고 밧줄로 몸을 묶었다. 홍씨 얼굴에는 수건이 덧씌워졌다. 수건 위로 물이 쏟아졌다. 홍씨는 고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형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홍씨에 이어 한 명씩 차례로 물고문을 받았다. 끌려간 이들은 산발머리에 물을 뚝뚝 흘리면서 돌아왔다. 김씨는 문 너머로 들려온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고 했다. 김씨는 “친구들이 겁에 질려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문을 잡고 버티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도경찰서에서의 경험을 ‘생전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일’로 기억한다. 고문이 끝나자 경찰은 홍씨 일행을 2층 수사과로 올려보냈다. 형사는 이들 앞에 조서를 들이밀었다. ‘술값 외상’을 비롯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홍씨는 어느새 ‘고래심줄파 두목’이 돼 있었다.

다음날 홍씨 일행은 둘로 나뉘어 6명은 대구북부경찰서로, 7명은 대구경찰서로 호송됐다. 그곳에서도 이유 없는 구타는 계속됐다. 일주일쯤 지나 홍씨 일행 13명은 경북지구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군부대 내 벙커에서 진행됐다. 홍씨는 “재판을 받으면서 말도 못하게 억울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버리자는 생각도 했다”고 회상했다.

군 재판은 형식적이었다. 판사는 홍씨 일행 13명을 일렬로 앉혀놓고 죄명을 읊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식의 원님 재판이었다. 선임된 국선변호사는 판사가 제시한 혐의를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 속전속결로 진행된 재판 과정 내내 홍씨와 김씨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홍씨는 재판에 넘겨져 교도소에서 4개월을 살았다. 어느 날 교도소로부터 4주간 삼청교육대 생활을 안내받았다. 삼청교육대로 가기 위해 세면도구와 생활용품을 다 챙겨놨을 때쯤 교도관이 홍씨에게 열외를 알렸다. 영문을 모른 채 기다리고 있던 홍씨에게 누나가 면회를 왔다. 홍씨를 빼내기 위해 수중에 있는 돈을 끌어모아 300만원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소주 한 병의 가격이 100원이었다.

1980년대 초반 삼청교육대에서 훈련조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누워서 목봉을 받쳐들고 있는 수련생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 초반 삼청교육대에서 훈련조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누워서 목봉을 받쳐들고 있는 수련생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씨는 군 재판에서 10년형을 구형받았다. 4개월쯤 복무한 날에 교도관으로부터 집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폭력에서 해방된 날 김씨의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억울함보다 안도감이었다. 삼청교육대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김씨는 “당시 교회 목사님이 진정서를 여러 번 넣어줬다. 아내와 아이도 있으니까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이 풀려난 건 누나의 돈 때문도, 목사의 진정서 때문도 아니었다. 군 재판부가 9월5일 모종의 이유로 공소기각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범죄행위를 증명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해 기각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육군검찰단 등에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출소 후 집안은 풍비박산

“아픈 걸 아프다고 못해 힘들었다
국가와 시스템 문제, 보상 마땅”
진실화해위, 지난달 “조사 개시”

교도소를 나온 뒤에도 삶은 회복되지 않았다. 홍씨는 1979년 고향의 땅을 팔아 마련한 종잣돈으로 식육식당과 다방을 열었지만 1980년 교도소에 가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 홍씨는 교도소를 다녀온 뒤로 “삶이 완전히 풍비박산 났다”고 말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지 6개월이 될 무렵 홍씨의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전과가 남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홍씨는 1987년 공무원에 임용됐다.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도경찰서 지하실에서의 기억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홍씨는 그날의 악몽을 술로 억눌렀다.

삶이 망가진 것은 홍씨만이 아니었다. 교도소에 가기 전 김씨는 어린 아들과 함께 밤에 다른 집의 일을 대신 해주면서 살았다.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잦았다. ‘내가 가난해서 이런 일을 겪었구나’ 하는 생각이 김씨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김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 한쪽이 아린다고 한다. 김씨는 “스스로 치유가 된 것이지 용서한 게 아니다. 그냥 이해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자신을 고문한 경찰을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들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직업에 의해서, 상부의 지시에 의해서 했다고 여겨서다. 김씨는 “어떤 한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국가와 시스템의 문제”라고 했다. 김씨는 “이제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부끄러울 것이 뭐 있나.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해 (진실규명을) 신청하게 됐다”며 “그간 아픈 걸 아프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 힘들었다. 이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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