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장 바뀌자 ‘단전 경고’ 받은 무료급식소 밥퍼, 왜?

2022.11.29 14:35 입력 2022.11.29 15:25 수정

‘불법 증축’ 민원에 동대문구 강경 조치

작년에도 서울시와 시유지 분쟁 끝 화해

밥퍼 이용자들 “지역공동체 파괴 행위”

구청 “실무진이 만났지만 입장 차 커”

지난 28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무료급식소 ‘밥퍼’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세훈기자

지난 28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무료급식소 ‘밥퍼’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세훈기자

지난 28일 오전 9시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무료급식소 ‘밥퍼’에 노인 2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고혈압 관리법’부터 ‘빨래방 이용 후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 시간 전 이곳에 왔다는 김인식씨(88)는 “집에 누워 있으면 머리도 멍하고 허리도 아프다”며 “여기 나와 있으면 아픈 줄 모르기 때문에 일찍 나온다”고 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노인의 수는 50여명으로 늘어났다. 밥퍼 직원 남모씨(39)는 “요즘에는 보통 하루 500여명이 다녀간다”며 “지난 겨울에는 600명 넘게 오는 날도 많았다”고 했다.

34년째 저소득층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밥퍼 활동에 빨간불이 켜졌다. 동대문경찰서가 지난 8월 밥퍼를 운영 중인 최일도 목사를 불법 증축 혐의로 검찰에 송치한 것이다. 기존 건물을 철거한 후 3층 규모의 건물 2동을 신축하기로 한 허가 내용을 지키기 않고 기존 건물에 무단 증축을 한 혐의다. 이후 동대문구청은 10월과 11월 연이어 건물을 원상복구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이에 이용자들은 “구청이 일부 민원인들 말만 듣고 밥퍼를 없애려고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밥퍼를 둘러싼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서울시는 밥퍼가 시유지에 허가 없이 무단 증축을 했다며 경찰에 고발했다. 이후 ‘사회적 약자들이 찾는 무료급식소에 대한 행정처분이 가혹하다’는 여론이 일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직접 최 목사를 만났다. 밥퍼가 증축한 건물을 시에 기부채납하는 방식으로 양자간 합의가 이뤄져 사태가 봉합되는듯 했다. 그러나 한 민원인이 최 목사를 건축법과 공유재산·물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따로 경찰에 고발하면서 검찰에 송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 구청의 대응도 강경하게 바뀌었다. 6·1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필형 동대문구청장은 밥퍼 주변환경 정비, 도시락 배달 활성화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구청은 지난 9월 밥퍼 옆 지하차도에 설치된 홍보 조형물을 기습 철거했다. 이 구청장은 지난 10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밥퍼 논란에 대해 “인근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해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급기야 구청은 지난달 28일 밥퍼 측에 위반건축물 사용중지명령을 내렸다.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전기공급을 중단하겠다는 공문도 함께 보냈다. 이달 15일에도 다음달 9일까지 건물을 원상복구하라는 내용이 담긴 시정지시서를 보냈다. 최 목사는 6차례에 걸쳐 구청장 면담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만나지 못했다.

최 목사는 “전 구청장 때 건축 허가를 받아놨기 때문에 앞으로 2년 내에 건물을 지으면 된다. 당장 건물을 원상복구하라는 것은 너무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구청의 강경 대응 이면에 재개발 문제가 걸려 있다고 주장했다. 최 목사는 “향후 인근에 5000세대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는데 입주민들이 밥퍼로 인해 지역 이미지가 나빠지니 밥퍼를 이전시키라고 구청에 민원을 넣는다고 들었다”며 “34년 동안 밥퍼를 잘 운영해왔는데 몇몇 민원인에 휘둘려 구청이 밥퍼를 ‘혐오시설’로 낙인찍고 있다”고 했다.

김민수씨(76)가 직접 작성한 구청 대응에 대한 항의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세훈기자

김민수씨(76)가 직접 작성한 구청 대응에 대한 항의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세훈기자

이용자들은 밥퍼가 지역공동체 역할을 한다고 입을 모았다. 30년째 밥퍼를 이용 중인 이순자씨(80)는 “주 6일 여기에 와서 5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다”며 “아침에 눈 뜨면 나도 모르게 여기로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밥퍼가 ‘제2의 집’ 같은데 여기를 없앤다면 구청 앞으로 나가서 싸울 것”이라고 했다. 종로구 창신동에서 이곳까지 매일 걸어온다는 김민수씨(76)는 “사람들이 모이면 주로 건강 이야기를 한다. 아픈 곳은 없는지 서로 확인하고 1주일 넘게 안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행방을 알아보기도 한다”며 “구청이 일부 입주민들 의견뿐 아니라 밥퍼 이용자들 목소리도 직접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날도 이용자들은 사탕, 커피, 붕어빵 등을 나눠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동대문구청은 불법 증축 문제는 법대로 처리할 수 밖에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구청 관계자는 “작년 7월부터 밥퍼와 관련된 민원이 다수 들어와 불법 증축에 대해서는 원칙대로 조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며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실무진이 밥퍼 측과 만났으나 입장 차가 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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