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아”…청년세대, 노조에 ‘호감 UP’

2023.02.27 06:01 입력 2023.03.02 15:09 수정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SG길드) 신명재 수석부지회장이 지난 16일 경기 성남시 판교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SG길드) 신명재 수석부지회장이 지난 16일 경기 성남시 판교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노조, 왜 해?” 물으신다면①]“오히려 좋아”…청년세대, 노조에 ‘호감 UP’

“길드원들을 소환 중입니다. NOW LOADING…”

온라인 게임에서 흔히 볼 법한 문구가 무려 ‘노동조합 깃발’에 떡하니 적혀 있다. 경기 성남 판교의 게임회사 스마일게이트 1층에 있는 ‘SG 길드(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노조 사무실에 걸린 깃발이다. 노조 창립멤버이자 수석부지회장인 신명재씨(38)의 책상에는 아이언맨과 게임 ‘스타크래프트’ 유닛 피규어들이 놓여 있다. 사무실 곳곳에 삼삼오오 놓인 2~3㎝ 크기의 고양이 피규어는 행사 때 조합원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기념품이다. “귀여운 건 무조건 옳습니다.” 신씨가 말했다.

스마일게이트노조는 네이버와 넥슨 등을 중심으로 IT업계에 ‘노조 바람’이 불던 2018년 9월 설립됐다. 그전까지 판교에 노조가 생길 거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청년세대가 대부분인 IT 개발자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노조를 싫어할 것이라는 오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판교에서 노조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사무실의 모습. 권도현 기자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사무실의 모습. 권도현 기자

“노조가 있어야겠다는 인식 자체는 널리 있었어요.” 신씨는 당시 IT업계 전반이 장시간 노동에 시름하고 있었다고 했다. 게임업계에서는 프로젝트가 ‘드롭(중단)’되면 담당 직원들을 조용히 ‘권고사직’시키는 관행도 심각했다. 초장시간 야근이 만연했지만 포괄임금제 때문에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했다. 대형 게임사 스마일게이트에서도 직원들의 불안과 불만이 들끓었다. 신씨가 노조를 만들고 싶어하는 직원들의 익명 채팅방에 처음 들어갔을 땐 이미 150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신씨는 차상준 지회장과 함께 노조 설립을 주도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매일 ‘우당탕탕’이었지만, 상급단체나 네이버·넥슨 등 동종업계 노조의 도움을 받아 회사와 교섭까지 진행했다. 노조의 활약으로 스마일게이트에서는 포괄임금제가 사라지고 ‘드롭 권고사직’ 관행도 중단됐다.

신씨는 처음으로 권고사직을 막은 직원이 지금도 회사를 다니고,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걸 보는 게 좋다고 했다. 지난달에는 20대 신입 개발자로부터 “노조가 있어서 스마일게이트에 입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금 스마일게이트노조엔 350명이 넘는 조합원이 가입해 있다. 절반 이상이 20~30대인 조합원들은 “노조가 든든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사무실에 행사 때 조합원들에게 나눠주던 고양이 피규어가 놓여 있다. 권도현 기자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사무실에 행사 때 조합원들에게 나눠주던 고양이 피규어가 놓여 있다. 권도현 기자

“노조 잘 몰랐는데…있고 없고가 진짜 달라요”

[“노조, 왜 해?” 물으신다면①]“오히려 좋아”…청년세대, 노조에 ‘호감 UP’

‘청년 세대는 노조를 싫어한다’는 말은 한국 사회에 퍼진 대표적인 오해다. 청년세대 전체에서 노조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신민주 고려대 기업경영연구원 박사는 2022년 ‘MZ세대의 노동조합에 대한 태도 변화’ 연구에서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을 이용해 2006년 청년(만19세~34세) 임금노동자 1564명과 2019년 청년 임금노동자 1744명의 ‘노조에 대한 태도’를 비교했다.

분석 결과 2019년 청년의 ‘노조 가입 의사’는 4점 만점에 3.29점으로 2006년의 2.88점보다 크게 늘어났다. 노조의 ‘부당대우 보호 효과’와 ‘고용안정 효과’ ‘임금인상 효과’ 등 모든 부분에서 긍정적 인식이 증가했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무노조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조합원 청년’ 응답자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신 박사는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 가능성이 떨어지고 노동시장 내 불안이 커지면서 청년들은 노조의 필요성을 더 크게 느끼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신 박사의 연구는 두 가지 함의를 지닌다. 우선 ‘오늘날 청년들은 개인주의적이라 집단적 노사관계에 무관심하고 노조에도 부정적일 것’이라는 통념이 허구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청년들도 노조를 ‘노동조건 개선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하고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신 박사는 “최근의 청년세대는 가진 역량과 무관하게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노조에 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며 “노조를 통한 편익이 노조 참여의 비용보다 더 크다고 판단하면 청년세대는 노조에 대해 이전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경향신문이 만난 청년 노동자들도 노조가 ‘내 노동환경’을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기대로 노조에 가입했다. 한림대병원 간호사 A씨(29)는 2017년 노조가 생길 때 가입원서에 서명을 했다. 간호학과에서 정신없이 공부와 실습만 하다가 입사한 A씨는 “그전까지 노조라는 게 뭔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고 했다. 그런 A씨를 노조에 가입하게 한 건 “가입하면 우리 삶이 달라진다”는 선배 간호사의 말이었다. 당시 A씨는 지옥 같은 스케줄과 근무환경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병원에 한 몸 바치라는 식이었거든요. 새벽 5시 반에 출근해서 밤 11시쯤 집에 가는데 수당은 일절 없었어요. 병원장 생일 축하 자리나 ‘화상회의’ 준비에도 동원됐어요. 그런 날에 개인적 일정 있으면 혼이 났죠. 사람다운 삶을 못 사는데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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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생기고 나서 병원에서 악폐습 대부분이 사라졌다. 시간외수당이 보장되고, 사적인 행사에 직원을 강제 동원할 수 없게 됐다. A씨는 “아직도 (노조를 둘러싼) 정치적인 이야기들은 잘 모르지만, 현장에서는 결국 내 삶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존재가 중요하다”며 “노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느껴본 사람으로서 노조가 있으면 정말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광주에서 배달기사로 일하는 박창현씨(33)도 한때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노조에 관심이 생겼다. 박씨는 “그전까지 노조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는데, 무급 추가 노동이 너무 싫어서 노조에 가입했다”고 했다. 간호사보다 배달기사가 ‘일과 삶의 균형’을 더 잘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직업을 바꾼 뒤로도 노조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2018년 배달기사 노조 ‘라이더유니온’이 생길 때 가입해 지금은 광주전남지부장을 맡고 있다. 혹서기엔 배달기사들에게 얼음물을 나눠주고, 안전교육 캠페인 등 프로그램도 꾸준히 연다.

개별로 움직이는 배달기사 특성상 조합원을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박씨는 “노조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되면 다들 노조를 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히 최근 가입한 20~30대 조합원 5명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 친구의 소개로 온 그들은 라이더유니온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플랫폼업체의 부당한 처우에는 불만이 컸다. 박씨는 “노조가 바로 개선은 못 해주더라도 (이전과 달리)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라는 걸 다들 알게 됐다”며 “지금은 5명 모두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청년은 노조 싫어한다’는 오해, 누가 왜 퍼트릴까?

노조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청년이 늘고 있는데, ‘청년들이 노조를 싫어한다’는 오해는 왜 계속 확산할까? 청년 노동자들은 정부와 미디어가 노조의 일부 부정적 모습만 확대해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스마일게이트노조의 신씨도 노조를 “빨간 띠를 두르고 파업하거나 폭력 집회를 하는 집단”이라고만 생각했다. 미디어에서 노조의 폭력행위 등 ‘과격한’ 모습이나 극히 일부의 부정적 측면만 주로 보여주는 탓에 생긴 편견이라고 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신명재 수석부지회장이 지난 16일 경기 성남시 판교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신명재 수석부지회장이 지난 16일 경기 성남시 판교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직접 노동환경을 개선하며 노조의 필요성을 느낀 신씨는 책 <노동조합은 처음이라(필명 신광균)>에 “내가 가진 생각이 온전히 내 사유와 판단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막연하게 받아들인 이미지인지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라이더유니온 박씨는 “청년들이 노조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특히 학교에서는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 어떤 권리를 챙길 수 있는지 잘 알려주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청년은 노조에 부정적’이라는 인식을 보수 정부나 기성 언론이 의도적으로 확산시킨다는 분석도 있다. 청년세대는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만들어질 때마다 단골로 소환돼 왔다. 청년이 기존의 노조·노동운동에서 소외되거나 거부감을 느낀다는 식으로 ‘갈라치기’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윤석열 정부도 같은 전략을 쓰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1일 “노조의 기득권은 젊은 사람들의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약탈 행위”라고 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20일 노조 회계자료 공개를 압박하며 “MZ세대의 강력한 요구에 노동부가 본연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고,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5월 이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귀족노조의 기득권 챙기기에 대해 MZ세대는 비판적”이라고 했다.

기존 양대노총(민주노총·한국노총)에 가입하는 청년세대의 비중은 적지 않다. 2019년 9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2017년부터 2019년 4월까지 민주노총에 새로 가입한 노조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조합원 평균 연령이 20~30대인 노조가 60.2%를 차지했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이 2019년 펴낸 ‘청년세대의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과 과제’를 보면, 한국노총 소속 노조 84곳의 2030세대 비중은 평균 42.6%로 나타났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은 “기성 노조의 일부 잘못된 모습이나 관료적 태도, 미디어가 악마화한 이미지를 싫어할 순 있다”며 “이를 노조 자체에 대한 불호로 왜곡해 청년이 노조를 싫어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조직률이 떨어지면 결국 기업들만 이익을 본다”고 했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에서 ‘MZ 사무직 노조’ 협의체인 ‘새로고침노동협의회’ 송시영 부의장(왼쪽 세 번째)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경사노위 제공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에서 ‘MZ 사무직 노조’ 협의체인 ‘새로고침노동협의회’ 송시영 부의장(왼쪽 세 번째)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경사노위 제공

정부와 일부 언론이 ‘MZ 사무직 노조’를 연일 강조하는 데에도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MZ 사무직 노조’ 구성원들은 노동시장 최상층부에 있는 대기업 사무직·정규직인데, 전체 청년세대 중 극히 일부인 이들의 목소리를 ‘모든 청년의 목소리’로 과대대표시킨다는 것이다.

오 실장은 “미래가 보장된 정규직의 길은 굉장히 좁은데, 바늘구멍에 들어갔거나 그 대기열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MZ세대의 목소리로 나오고 있다”며 “당장 돈이 필요해 비정규직으로 일을 시작했거나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젊은층이 더 많은데도 정부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했다.

신민주 박사는 “연구 당시 MZ 사무직 노조 이슈가 있었는데, 전통적 노조를 비판하는 소재로만 사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스펙이 좋은 일부 청년이 아니라 전체 청년이 노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관심이 생겨 연구를 시작했는데, 통념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와 놀라웠다”고 했다.

“더 많은 소통을, 더 너른 포용을”

청년세대를 잘 품기 위해 기성 노조가 성찰해야 하는 점도 있다. 특히 젊은 조합원들은 ‘소통’에 대한 요구가 크다. 2021년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펴낸 ‘금속노조 청년 조합원의 노조참여 활성화 방안’ 연구에서 한 청년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조합원은 ‘왜’가 중요해요. ‘야, 오늘 조끼 입고 근무해’ 하면 안 입어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교섭이 진척되지 않아서 항의하기 위해 조끼를 입는 거다’라고 설명해주면 입어요. 왜 이걸 해야 되는지, 어떤 목적이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청년 조합원이 많은 스마일게이트노조도 소통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상급단체를 꼭 민주노총으로 해야 하느냐”고 질문한 조합원에겐 “만렙(최고 레벨)에 풀템(풀아이템)을 찬 상대(회사)와 단검 하나 들고 PK(다른 플레이어와 싸우는 것)를 뜰 순 없다”며 게임업계 용어로 ‘눈높이 설명’을 했다. 권고사직 문화 개선을 요구한 첫 집회를 열 때는 한 달 전부터 수차례 간담회를 열어 취지를 설명했다. 신씨는 “기성 노조 입장에서는 옳다고 생각하고 익숙한 것들이 있어도, 그게 왜 옳은지 풀어서 알리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신명재 수석부지회장이 지난 16일 경기 성남시 판교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신명재 수석부지회장이 지난 16일 경기 성남시 판교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기존 노조가 청년 조합원의 실제적인 요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민주 박사는 “노조가 현재 청년들이 겪는 노동시장 문제를 외면한다면 갈등과 내부 분열을 겪을 수 있다”며 “청년세대와 관련된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청년 노동자들은 노조 ‘바깥’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게 여겼다. 여전히 많은 청년이 비정규직·중소기업 등 ‘노조를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 판교 IT 대기업 노조들은 ‘IT 위원회’를 꾸려 업계 전반의 장시간 노동과 포괄임금제 이슈에 목소리를 내고, 미조직 사업장의 노조 결성을 돕기도 한다. 신씨는 “판교에서도 노조가 있는 곳은 주로 규모가 있는 기업이지만, 거기서 그치면 점점 격차가 발생하고 업계 전체가 안 좋아진다”며 “남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모두 함께 나아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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