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돋보기

‘정바비 불법촬영’ 항소심서 무죄···한 번 동의는 계속 동의?

2023.06.25 17:03 입력 2023.06.25 17:23 수정

정바비. 정바비 페이스북 갈무리

정바비. 정바비 페이스북 갈무리

연인과 성관계 장면을 촬영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있다면 교제 기간 찍힌 모든 불법촬영물에 동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인디밴드 ‘가을방학’ 출신 가수 정바비(본명 정대욱)는 연인과의 성관계를 불법촬영한 혐의로 지난해 12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하지만 항소심을 맡은 서울서부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우인성)는 지난 1일 정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불법촬영 혐의에 대해선 유죄를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하고, 일부 폭행 혐의에 대해서만 벌금형을 선고한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의 이 같은 판단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 유리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형사법의 대원칙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가 촬영에 묵시적으로 동의했다고 진술한 촬영물도 일부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나머지 영상 촬영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피고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 선고를 두고 ‘재판부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불법촬영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항소심 판결문을 살펴보면 재판부가 ‘피해자가 촬영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쪽에 무게를 뒀음이 여러 대목에 나타난다. 재판부는 정씨와 피해자의 관계에 대해 “피해자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던 정씨가 굳이 피해자 모르게 성관계 장면을 촬영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전날의 성관계 동영상 촬영에 피해자가 동의했다면 (다음날 이뤄진) 다른 동영상 촬영에 관하여도 피해자가 반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에 비추어 해당 영상이 피해자 의사에 반하여 촬영된 것인지 의문이 든다”고도 판시했다.

이외에도 재판부는 “피해자는 촬영 알림음을 통해 촬영행위를 인식했음에도 별다른 제지 없이 성관계를 이어나갔을 여지를 배제할 수 없다”고 하거나 “나머지 동영상 중 화면상 피해자가 정씨의 촬영행위를 명백히 인식하고도 제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동의한 다른) 영상과 마찬가지로 촬영에 동의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고도 했다.

정바비가 항소심 판결 이후 지난 2일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한 내용. 정바비 페이스북 갈무리

정바비가 항소심 판결 이후 지난 2일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한 내용. 정바비 페이스북 갈무리

전문가들은 해당 판결문이 친밀한 관계에서 불법촬영이 이뤄졌을 때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범죄가 성립하는 문제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연인 관계 등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절 의사는 미묘하게 드러날 수 있는데, 그러한 맥락을 배제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불법촬영 피해자의 촬영 동의 여부는 맥락을 고려해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례도 있다. 2020년 2월 대법원은 술에 취해 잠든 피해자의 나체 사진을 촬영한 피고인에 대해 “피고인은 이 사건 각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가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에 반한다는 사실을 적어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했다고 봄이 옳다”면서 “이러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가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 거부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동의를 한 것처럼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판단은 위의 대법원 판례에 부합하는 판단이었을까.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변호사는(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만약 촬영물 10건 중 중 5건에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5건에 대한 동의가 추정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이 사건의 피해자는 본인이 명확하게 동의한 것에 대해선 ‘동의했다’, 그렇지 않은 영상에 대해선 ‘처음 본 것’이라고 명확하게 얘기하면서 진술의 신빙성을 높였다. 그럼에도 재판부가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강하게 의심하는 경향이 느껴진다”면서 “‘사귀었기 때문에 동의한 것 아니냐’는 편견 때문에 연인 관계의 피해자들은 불법촬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기 어려워한다”고 했다.

불법촬영 피해자들을 지원해 온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촬영 사실을 아는 것과 동의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데도 촬영물 속 피해자가 거부하는 모습이 없다는 이유로 ‘묵시적으로 동의했다고 보여진다’며 불기소 처분이나 무죄 판결이 나는 사건들이 있다”면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불법촬영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가 당시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곧바로 저항했는지만 봐서는 동의 여부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검찰은 항소심의 무죄 판결에 불복해 지난 8일 상고했다. 사건은 대법원에서 다시 한번 다퉈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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