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 10주년
‘남들의 삶’ 위해 싸우다 소진된 사회운동가
국가폭력·사회폭력 피해자들 위한 무료 쉼터
서로 비추는 구슬처럼…삶이 삶을 돌보는 곳
험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전북 남원 만행산 자락이 ‘ㄷ’자로 감싸도는 산골짜기에, 네 동짜리 작은 사찰 귀정사는 폭 안겨 묻혀 있다. 세상살이의 소음이 닿지 못하는 산사에는 새 소리, 풀벌레 소리, 절 남쪽 편 대나무숲을 빗질하는 바람의 소리, 비가 와도 흐려지지 않는 1급수 계곡물 흐르는 소리만 골골골 들려온다.
대나무숲 옆으로 난 길을 내려오면, 공양간 뒤쪽을 둘러친 숲 속에 한 칸짜리 소담한 오두막 흙집 8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2013년 개원해 올해로 10살이 된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다. 쉼터는 ‘전선’ ‘투쟁’이 일상인 사회·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 싸우다 몸과 마음이 소진돼버린 활동가들, 국가폭력·사회폭력의 피해자와 가족 등에게 무료로 1인 1실 휴식공간을 내 준다.
지난 23일 오후 찾은 쉼터에서는 하루 내내 내린 비에 흙 젖은 내음이 숲 한 가득 풍기고 있었다. 쉼터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는 활동가 박재성씨(57)는 빈집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불을 지피는 중이었다. “곧 새로 손님이 온다고 해서 미리 아궁이에 불 때놓으려고요.” 비에 장작이 젖어 토치까지 썼는데도 고생 좀 했다며 박씨는 웃었다.
‘세상을 바꾸자’는 꿈, 단단한 만큼 더 아픈
철로 만든 사람처럼 굴어야 했다.
사회·노동운동 활동가들에겐 늘 ‘희생’이라는 꼬릿말이 따라붙었다. 맞서 싸워야 할 부조리는 강고한데 사람은 항상 적었다. 단체들도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투쟁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고된데 노선 갈등이나 인간관계 문제도 종종 불거졌다. 하지만 힘든 티를 내서는 안 됐다. 꾸준히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을 이어간 많은 이들이 소진되고 상처받다가, 소리없이 사라졌다.
연인원 3만명이 참가한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이끈 송경동 시인의 마음도 폐허였다. 20여년간 상근활동비 한 푼 없이 쌍용자동차, 기륭전자 등 굵직한 투쟁현장을 지켜 온 그에게 돌아온 건 수배와 징역, 통장에 남은 7만원이 전부였다. “밖에서는 나를 희망버스 하고 그런 사람인 줄 알지만, 내 속은 다 썩어있었던 거죠.” 2012년, 지인의 소개로 연이 닿은 귀정사에서 그는 숨을 돌렸다.
때마침 사회·노동운동 진영은 희망버스 투쟁을 겪으며 ‘연대의 감각’에 눈뜨고 있었다. “고된 투쟁으로 지친 이들의 쉼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하산을 앞둔 송 시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이끌고 있던 실상사 도법 스님과 수지행 종무실장, 여러 투쟁현장에 의료지원을 보탠 윤성현 순천 들풀한의원 원장, ‘뭇삶들의 쉼터’라는 목적을 두고 귀정사를 관리하는 중묵 처사가 뜻을 모았다.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기륭전자, 콜트콜텍,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료로 흙집을 지었다. 2013년 10월 개소식을 열었다.
산 오르고 풀 따며…구슬처럼 연결되는 마음
쉼 없이 달린 이들에게 쉼을 선물해 온 10년, 매년 150여명이 휴식과 안정을 얻고 갔다. 뇌졸중으로 몸 절반이 마비된 활동가도 건강을 얻어 떠났고, 안면괴사증을 얻은 활동가는 8년을 쉬며 몸을 추슬렀다. “20년 넘게 노동운동을 해 오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는데, 쉼터에서 머문 10일이 가장 평화롭고 편했다”던 윤종광 민주노총 전북본부장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귀정사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를 수목장한 나무는 뒷산에서 귀정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쉼터를 지키는 이들은 활동가들에게 휴식과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안다. 중묵 처사도 젊은 시절 진보적 불교운동인 민중불교운동연합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다. 복학을 앞두고 떨어진 징역형에 “삶이 캄캄한 밤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쉼터지기로 상근하는 장병관 집행위원장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며 감옥을 수차례 드나들었다. 사회·노동운동이 얼마나 ‘쉼’에 인색한지도 뼈저리게 안다. “쉬게 하든 일을 줄이든 해야 하는데 못 그러다가 터지는 거죠. 국가나 조직의 보호가 없으니 그 모든 힘듦은 개인이 책임져야 해요. 세상을 바꾼다며 열심히 활동했는데 남은 게 뭔가 하는 허무와 절망이 큽니다.”
“무서운 말이네요.” 쉼터 10주년 행사를 돕고 있는 이수경씨(23)가 말했다. 경남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던 그는 지친 심신을 회복하려 귀촌했다가 쉼터와 연이 닿았다. “운동이라는 게 함께 할 사람을 모으는 건데, 활동가들이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 다들 ‘활동하면 저렇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겠죠.” 장 집행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휴식을 게으르다고 여기며 쉼 없이 효율적으로 일할 사람을 원하는 게 자본주의 방식인데, 우리는 그런 세상을 거부하자고 말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그렇게 살아온 거죠.”
쉼터는 이용료를 받지 않고 기간 제한도 따로 두지 않는다. 형편이 넉넉치 않은 활동가들의 처지를 잘 알아서다. 절이지만 불교 예식도 강요하지 않는다. “처음 오면 1주일은 (제가) 잘 찾아가지도 않아요. 가장 중요한 건 이 안에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온전히 푹 쉬는 거니까요.” 장 집행위원장의 배려다. 쉬러 온 이들은 명상을 하고 책을 읽거나, 숲길을 산책하거나, 텃밭을 가꾸며 지낸다.
자연 속에서, 상처입은 삶들은 다른 삶을 살피고 살린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온몸에 수포가 난 이와 글을 모르던 이가 쉼터에서 만나 서로를 치유한다. 대립하는 정파에 속해 있던 두 활동가가 처음에는 밥도 같이 먹지 않더니, 막걸리 몇 잔에 친구가 된다.
“나만 고통스러운 줄 알았는데, 주변 얘기를 듣고 서로를 챙기며 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더라고요. 저 사람 밖에 나가면 아궁이에 불 한번 때줄까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형성됩니다.” 쉼터 운영을 총괄하는 중묵 처사의 소감이다. 쉼터의 이름이 ‘인드라망(서로를 비추는 무수한 구슬들의 그물)’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에게서 타인을, 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하며 삶들은 서로 연결된다.
지친 당신 품어줄 뒷배, 한 곳쯤은 있다
쉼터는 산골짜기 바깥 ‘쉼 없는 세상’을 향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운동도 결국 살아남은 자들, 승리한 자들만의 것이 돼버려서는 안 돼요. 새로운 사회를 지향한다는 게 어떤 건지,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운동과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송 시인이 말했다. “어찌 보면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운동 같지만, 실은 아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죠.”
10년 간의 ‘무료 운영’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100여명 후원자가 있지만 재정이 넉넉지는 못하다. 다행히 필요할 때 늘 귀한 마음이 모여들었다. 쉼터가 생긴 뒤로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해고·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그린비네’ 등 여러 공간이 잇따라 생겨났다. “어찌어찌 10년을 왔네요. 지금도 계속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해보기로 했습니다. 망하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장 집행위원장이 말했다. 무사히 열 살이 된 쉼터는 오는 9월2일 10주년 기념 후원 행사를 연다. ‘투사 음유시인’ 가수 정태춘이 기꺼이 공연을 맡았다.
“저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씨가 말했다. “활동했던 시간을 고통스럽고 힘들기만 한 시간으로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계속하든 그만두든 그 시간들을 잘 간직한 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 쉼터의 그런 마음이 세상을 더 낫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뒷배가 돼 주는 거잖아요.” 더 많은 이들이 쉼을 미안해하지 않고, 채찍질로 스스로를 상처입히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그는 바란다.
오는 9월2일에는 10주년을 맞아 ‘사회연대쉼터 후원의 날’(bit.ly/쉼터후원의날)이 열린다. 가수 정태춘의 콘서트를 비롯해 숲길 걷기, 명상, 체험, 전시 등 행사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