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질병 ‘압도적 1위’ 근골격계질환
‘추정의 원칙’ 도입했지만 적용은 3.7%
까다로운 문턱 탓에 산재 처리기간 늘어
업무상 질병의 산재 보상 처리기간이 지난 9년 사이 2.6배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업무상 질병의 대부분인 근골격계 질환은 처리기간 단축을 위해 ‘추정의 원칙’ 제도가 도입됐는데도 처리기간이 오히려 한 달 가까이 늘었다. 추정의 원칙은 근골격계 질환 중 자주 발생하는 질환과 직종에 대해 업무 관련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일부 조사절차를 생략하는 제도다.
2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이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은 ‘최근 9년(2014~2022) 업무상 질병재해 산재보상 신청·승인 현황’을 보면, 업무상 질병재해 산재보상 신청은 2014년 9221건에서 2022년 2만8796건으로 9년 동안 3.1배 늘었다. 승인건수도 2014년 4391건에서 2022년 1만8043건으로 4.1배 증가했다.
질병재해 절반가량은 근골격계 질환이었다. 근골격계 질환 산재보상 신청은 2014년 5639건에서 2022년 1만2491건으로, 승인은 3228건에서 8695건으로 늘었다.
질병재해 보상 수요 증가에도 보상 처리기간은 계속 길어져 왔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승인 신청이 접수되고 승인 여부가 결정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2014년 평균 80.2일에서 2023년 8월 기준 209.2일로 2.6배 늘었다.
처리기간 장기화는 업무상 질병재해 대다수인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추정의 원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은 탓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처리기간 단축을 위해 지난해 고시를 개정해 근골격계 질환에 대해 추정의 원칙을 도입했다. 근골격계 질환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6개 신체부위(목, 어깨, 팔꿈치, 손·손목, 허리, 무릎)의 8개 상병은 업무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현장조사를 생략할 수 있도록 했다.
회전근개 파열, 요추간판탈출증 등 근골격계 질환은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매우 빈번하게 발생한다. 예를 들어 회전근개 파열은 어깨에 무거운 물건을 짊어지는 작업이 잦은 건설노동자에게 ‘직업병’이다. 이 같은 질환들은 의학적으로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매우 분명하고, 실제로도 99% 이상이 업무 관련성을 인정받는다. 추정의 원칙을 도입한 건 이처럼 업무 관련성이 분명한 질환들의 산재 보상 처리기간을 줄이자는 취지다.
추정의 원칙 도입에도 근골격계 질환 조사기간은 오히려 늘었다. 근골격계 질환 재해 보상 처리기간은 제도 도입 전인 2021년 113.0일에서 2022년 108.2일로 줄었다가, 2023년 8월 137.7일로 전년 대비 29.5일 급증했다. 이 의원은 “근골격계 질환의 산재 신청 규모를 생각하면, 근골격계 질환의 보상처리 지연은 전체 업무상 질병의 처리 지연을 불러오는 핵심 원인”이라고 했다.
노동계는 추정의 원칙 규정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탓에 효과가 거의 없다고 본다. 고시를 개정하면서 돌봄노동과 운전노동이 적용 직종에서 빠진 점, 조사 절차 중 ‘특별진찰’이 생략되지 않은 점 등이 문제로 지목된다. 특별진찰에서 ‘업무 관련성이 매우 높다’는 소견이 나오지 않는 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의 심의를 한번 더 거치게 된다.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근골격계 질환들은 업무와 상관관계가 매우 높다고 인정된 질환들인데 다시 한 번 질판위에서 업무 관련성을 심의받아야 하는 것이다. 추정의 원칙 적용 근골격계 질환들은 질판위에서도 99% 승인된다.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기도 까다롭다. 근골격계 질환은 여러 신체부위에서 발병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6대 부위·8대 상병에 ‘단독’으로 질병이 발생한 경우만 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목에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인 경추간판탈출증이 발병해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다른 근골격계 질환이 동시에 발병했다면 적용에서 제외된다. 그 결과 2022년 근골격계 질환 산재 신청건수 중 3.7%에만 추정의 원칙이 적용됐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추정의 원칙을 현실에 맞게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의원은 “2022년 고시 개정 과정에서 누락된 직종을 포함해 추정의 원칙 적용 직종을 늘리고, 복수 근골격계 질환 발병에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며 “추정의 원칙이 적용된 경우엔 질판위 심의도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체 업무상 질병 처리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2014년부터 2023년 8월까지 질병재해 보상처리기간은 뇌심혈관계 질환이 62.8일에서 123.1일로, 정신질환이 122.5일에서 210.4일로 늘었다.
이 의원은 “진폐 등 일부 질병을 제외하고는 모든 질병을 질판위가 심의하는 현재 시스템을 개혁하지 않으면 처리지연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며 “질판위의 성격을 ‘업무상질병기준위원회’로 바꿔 업무와의 상관관계가 이미 확인된 질병에 대해서는 신속히 재해보상을 실시하고, 그 이외의 경우에 대해 판정역량을 집중시켜 처리기간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