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치인이 개인 SNS에 자신의 정치 행보를 알리면서 “얼룩말 세로처럼 훨훨 활보하겠다”는 말과 함께 세로의 탈주를 패러디한 이미지를 올렸다. 그 이미지 안에서 세로는 인간처럼 두 발로 서서 어깨를 당당히 편 채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걸 본 순간,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물론 인간이 동물에 빗대어 스스로를 설명하는 역사는 유구하다. 특히 의인화된 동물이 등장하는 우화는 인간의 자기 이해와 지혜가 고여 숙성되는 향기로운 술통과도 같은 장르다. 실제로 동물은 인간과 다양한 속성을 공유하므로, 그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우화는 인간이 설정해 온 동물들 간의 위계를 뛰어넘는 동류의식을 품고 있을 때도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소통이 쉽지 않은 동물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그에게 매우 인간적인 서사를 부여한다. 내가 함께 사는 고양이를 묘사할 때 종종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컨대 “가을이 되면 길에서 지낼 때가 생각나는지 많이 울어요” 같은 식이다. (우리 고양이는 길에서 왔다.) 이 문장에서 대체 얼마만큼이 진실인지 나는 영원히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내가 그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 생각한다. 그에게도 나라는 존재를 소화하는 그만의 방식이 있지 않겠냐고. 그러므로 나는 모든 의인화된 동물의 이야기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호주의 에코 페미니스트 발 플럼우드 역시 <악어의 눈>에서 의인화란 동물을 재현함에 있어 “인간의 불순함이 침입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례가 제시하거나 방지하는 통찰, 그리고 그 재현에 담긴 도덕적 질이라는 측면에서 논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플럼우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영화 <꼬마 돼지 베이브>를 비교한다. 전자는 동물의 실존을 지우고 그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강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중심주의에 기여하지만, 후자는 이를 교란하는 의인화를 선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질적인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먹을 쥔 채 두 발로 걸어가는 세로의 뒷모습은 자못 비장해 보이지만, 세상 우스꽝스러운 비유였다. 세로는 도심을 “훨훨 활보”한 것이 아니었다. “세로의 반항” “세로의 봄소풍” “세로의 슬픈 사연” 등 온갖 통속적인 말로 세로에게 인간적인 서사를 부여해 봐야,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 않다. 넓디넓은 대초원에서 뜯겨져 나와 좁은 우리에 홀로 갇혀 있다가, 인간의 관리 부실로 아스팔트 위에 고립되어 있었던 비인간 동물. 팍팍하지만 이 문장이 조금은 더 사실에 가까운 묘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 표현 역시 바로잡아야겠다. 세로의 의인화된 이미지를 한국의 정치적 맥락 안에서 전시하는 건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비유”가 아니라 “뻔뻔하고 고통스러운 도둑질”이다. 비단 그 정치인뿐 아니라 세로를 대상화한 수많은 ‘우리’는 얼룩말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훔친 뒤 지워버리고 인간의 이야기만 살아남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 이야기 도둑질이야말로 ‘이국적’인 동물들을 잡아다 창살 뒤에 가두어 돈을 벌고, 즐기며, 연구 대상으로 삼아 지식을 확장해 온 동물원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기본 조건이다. 정치인은 같은 게시물에서 이런 표현도 썼다. “정부와의 싸움에서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 인간이 동물을 길들여 통제할 때 사용하는 기구인 ‘고삐’만큼은 이 게시물에 딱 어울리는 비유였다.
세로가 동물원으로 돌아간 후, 문제의 해결책으로 암컷 얼룩말과의 합사, 관리 철저, 동물원 폐쇄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가 세로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며칠째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게 뭐가 되었든 세로의 이야기에 씌워놓은 고삐부터 풀어야 할 것 같다. 📝 🔎 경향신문 홈페이지에서 기사 전문을 읽으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