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공모자들’

2012.09.10 21:27
정지은 | 문화평론가

“언니야, 혹시 남는 영수증 있어?” 세일기간이라 혼잡한 백화점, 친근하게 말을 붙여온 아줌마는 20만원을 구매해야 주는 1만원 상품권을 받고 싶은데 5만원쯤 모자란다며 남는 영수증을 요구하신다. 일종의 영수증 호객행위다. 연말만 되면 인터넷에서 보이는 ‘스벅 스티커’를 구한다는 광고와 비슷하다. 12개의 스티커를 모으면 1만2000원인 스타벅스의 다이어리를 공짜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인데, 스티커를 모을 수 있는 기간이 짧고, 특정 음료를 3잔 이상 마셔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서로 돕자는 취지다. 너무 합리적이어서 눈물이 다 난다.

[별별시선]소비의 ‘공모자들’

요즘은 20만원을 구매해도 1만원 상품권을 받기 위해서는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 많다. 일단 그 백화점 계열사의 신용카드나 최소한 포인트 카드라도 있어야 한다. 상품권 수령처는 백화점의 후미진 지하, 각종 행사장을 다 지나쳐야 어렵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있다. 그곳까지 내려가다 보면 왜 그리 지치는지, 음료수라도 하나 사서 먹게 되어 있다. 꾸역꾸역 행사장에 도착해 겨우 상품권을 받고 나면 3만원 이상 구매한 영수증 제시 시 선착순 증정한다는 세제, 식용유 등의 사은품이 눈에 들어온다. 20만원 넘게 샀으니 의기양양, 그 줄에 다시 서서 영수증을 내밀면 아르바이트생의 차가운 한마디 “우편으로 받으신 쿠폰 가져오셨나요?” 쿠폰이 없으면 “고객님은 대상이 아니세요”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부터 생일을 알게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e메일이다. 각종 사이트들은 회원가입 시 입력한 생일에 맞춰 축하 메일을 정중하게 보내온다. 문자메시지도 빠지지 않는다. 정확히 자정에 기계적으로 발송된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는 문자 때문에 단잠에서 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찜찜한 기분이 무엇인지 아실 것이다. 이사 등으로 더 이상 갈 일이 없는 가게에서 지속적으로 보내오는 판촉용 메시지는 ‘안습’ 그 자체다.

사실 한 푼이라도 아낀다며 모으는 각종 쿠폰과 마일리지, 포인트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내 구매 이력은 시스템에 차곡차곡 등록되고 있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아이가 있는지, 무슨 커피를 마시는지, 주로 이용하는 매장은 어디인지, 어느 시간대에 가장 많이 이용하는지…. 아예 주문 시마다 매장 포스(POS)에 성별과 나이대, 일행 수를 입력하는 프랜차이즈도 있다. 이는 연령별, 성별, 지역별 구매 패턴을 분석하는 유용한 데이터로 이용될 것이다. 일정 기간 이상 로그인하지 않는 고객에게 ‘부담 없이 신상품 구경하러 들어와달라’고 e메일을 보내는 것은 기본이다. 만약 이 e메일을 클릭한 누군가가 오랜만에 물건을 산다면 쇼핑몰 운영자는 ‘역시 고객관리가 중요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고객의 선택권은 알량하거나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은행이 스마트폰 전용 고금리 예·적금을 출시하면 구형 핸드폰 사용자는 가입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을 이용할 줄 모르는 노인분들은 창구 이용에 높은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 은행은 수수료를 아끼려면 인터넷 뱅킹을 활용하라고 친절히 조언한다. 그러나 인터넷 뱅킹은 컴퓨터 구비 및 인터넷 연결이란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대다수 저소득층 노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선택’일 뿐이다.

우리는 쿠폰과 각종 마일리지에 연결된 보이지 않는 끈에 나 자신의 동선과 구매 내역과 날짜까지 맡겨놓은 꼭두각시들이다. 이 끈은 은행, 신용카드사, 대형마트, 대기업 계열의 각종 프랜차이즈 등등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기왕이면 포인트 적립되는 곳으로 가야 하니까! 차곡차곡 모아 공짜로 먹는 뿌듯함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생일 쿠폰은 쓰라고 준 거니까! 이런저런 조건을 꼼꼼히 따져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택이 아닌 셈이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를 물었던 홍세화의 질문을 던져보면 답은 더욱 분명해진다. 필요한 서비스만 쏙쏙 골라 이용한다는 체리피커는 전용 앱이 나올 정도로 알뜰한 소비자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체리피커는 신용카드 서비스에 자신의 소비욕구와 동선과 일시를 맞춘 것에 불과하다.

과거 구매 내역을 바탕으로 다음달에 구매할 만한 물품의 쿠폰을 맞춤형으로 제공하고, 그 쿠폰을 이용해 싼 가격에 그 물품을 구매한다면 이 소비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쿠폰을 보내준 기업인지, 그 쿠폰을 선택한 나인지 알쏭달쏭하다. 내가 적립받고 아꼈다고 생각하는 그 몇 천원은 정말 절약한 것일까? 골목골목 울려퍼지고 있는 광고와 마케팅의 현란한 피리 가락에 너무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가 ‘현명한 소비자’란 피리 가락에 취해 눈감고 귀 막은 채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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