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묵히면 바보가 된다

2012.09.03 20:58 입력 2012.09.03 23:41 수정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2리에는 500여 사람이 삽니다. 이분들 중에는 50년째 이발소를 운영하는 주인장이 있어요. 외관부터 소품까지 모두 근대 박물관인 이발소를 지키며 강화 토박이로 살아온 67세 이발사는 숨 쉬는 역사 교과서예요. 과묵한 인상과 달리 입만 떼면 강화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지요. 직접 키운 순무와 신선한 야채를 파는 천막 가게의 67세 주인장은 전에 물레 양장점을 오래 해서 동네에선 “물레야~”로 불려요. 쾌활하고 붙임성 좋은 주인장은 도시에서 온 낯선 청년들에게 순무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길가다 훈수 두는 이웃들을 끌어들여 잔치판을 벌이지요. 배우는 청년들보단 사실 이분들이 한 가득씩 순무 김치를 휘리릭 버무리고 끝낸답니다.

[별별시선]사람은 묵히면 바보가 된다

분홍색 지붕집에서 병아리와 닭을 키우며 동네 고양이들 밥상도 같이 차려주는 75세 주인장은 “닭이 크지 않아 걱정”이고 손님들이 오면 “고양이들이 오지 않아 걱정”이라면서도 활달하게 웃으세요. “도라지는 묵히면 약이 되는데 사람은 묵히면 바보가 된다”와 같은 명언을 쏟아놓는 유창한 달변가지요. 불쑥 찾아온 도시 청년들에게 담에 올 땐 떡을 해놓겠다고 약속했어요. 나란히 붙어 있는 은하 미장원과 은하 악기사는 부부가 운영하는데 안쪽엔 늘 대문이 열려 있는 가정집이 있어요. 장사보다는 가게문을 열어둔 채 마실 나가는 게 일이라서 부부가 순무가게나 길에서 만날 때가 더 많다며 수줍게 웃는 은하 미장원의 65세 주인장은 지금도 새댁 같아요.

사는 데는 인천이나 온수리에 정을 붙인 지 10년차인 과일 트럭의 60세 주인장은 파란만장 인생사를 들려주면서도 사진을 찍으면 미소를 날리지요. 전기공사 사업을 하다 IMF로 접은 뒤 옷장사로 떠돌다가 몸이 아파 한 군데서 오래 단골 장사를 하기로 맘먹었는데 그곳이 온수리였대요. 가난해서 공부 대신 일찍 시계 기술을 배워 가족을 건사했고 아들은 서울대 나와 특파원한다며 자랑하는 광명당 주인장은 아직 이름과 나이를 안 알려주었어요. 한창 때는 장사하러 김포를 나가는데 배를 못 타면 맨몸으로 바다를 건넜다면서 이젠 벌이가 안 된대요. 그래도 매일 광명당을 열고 있었더니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의 중심 복덕방이 되었다면서 싫지 않은 표정이에요.

지금까지 소개한 이분들을 다시 소개하지요. 이발소의 유길희 교수님, 순무가게의 김정자 교수님, 분홍색 지붕집의 고정숙 교수님, 은하 미장원의 유영원 교수님, 과일 트럭의 김희규 교수님, 광명당의 ○○○ 교수님입니다. 가르치는 과목은 손수 이발하는 법, 순무 김치 담그는 법, 닭 기르고 고양이 밥 주는 법, 값싸고 튼튼한 시계 사는 법부터 강화에서 이웃되는 법, 전쟁 통에 살아가는 법, 사기당하지 않는 법, 부부로 오래가는 법, 인생을 알아가는 법 등 갈수록 늘어나네요. 그런데 이분들이 자청해 교수님이 된 건 아니에요. 서로를 많이 알지도 않았고 교류가 잦았던 것도 아니고요. 이분들이 줄줄이 교수님이 된 사연에는 작년 8월부터 온수2리 마을을 쏘다닌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20대 후반의 우민정, 우민희 자매. 파주에 사는 이 자매는 작년부터 이곳에 온수리대학을 열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교수가 되고 도시에서 찾아오는 청년과 청소년들이 학생이 되는 이상하고도 재미있는 대학이지요. 올해 8월엔 수도권의 중1 청소년부터 대학생과 30대 청년까지 14명이 2박3일간 온수리대학 캠프에 참여했네요. 이 캠프를 계절별로 열고 월별로 특화해서 온수리대학 교수님들께 지속적인 강사료와 수입을 드리는 것이 우씨 자매의 목표더군요. 온수2리만 봐도 교수님들이 무궁무진하다면서 이분들의 경험과 이야기가 곧 우리 시대의 청년과 청소년에게 긴요한 산지식이자 기술이라면서요. 이 사례를 접하는 순간 한 방에 감이 옵디다.

뭔 감이냐고요? 700만을 웃도는 베이비 부머 은퇴자들과 우리 사회가 함께할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지요. 한국전쟁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에 난 이분들은 온수리대학의 교수님들 세대와 또 다른 지식과 네트워크와 자산이 많지요. 이분들의 경험을 불안에 내몰리는 자영업과 단순 근로가 아닌 제3섹터로 안내하여 적정 노동과 적정 임금의 창의적 생태계로 가꾸는 것, 이것은 이분들의 인생에 녹아든 희로애락의 가치와 쓸모를 재발견하는 정중한 태도와 꼼꼼한 관계 재형성을 통해야만 작동될 겁니다. 그 가능성을 우씨 자매가 세대 간 연대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네요.

고정숙 교수님 말대로 베이비 부머도 청년도 따로 묵혀야 될 이유가 없어요. 같은 부류끼리 무리지어 경계에 갇혀 있으면 더 외로워져서 웰빙에 이어 힐링 상품을 소비하다 끝날 뿐이에요. 그러나 이렇게 세대가 서로 만나면 누구도 바보가 되질 않고 도리어 총기가 살아나며 살맛이 나요. ○○은대학이 번지는 사정도 이거지요. 잉여 바보가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장들끼리 어울려 살아가는 그 희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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