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어도 조심하는 사람

2013.06.03 21:28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성왕(聖王)의 길을 보여주려 한 것이지만, 임금이 아니라도 수신하는 사람에게 두루 해당되는 글들을 모으고 주석을 붙인 저작이다. 유학의 수신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과 함께 몸가짐을 단정히 갖는 일이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있기를 마치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라. 발가짐은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은 공손하게 하여야 하니,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蟻封)까지도 (밟지 않고) 돌아서 가라.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 해야 하며,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이하게 함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윤사순 역)

이러한 지침이 강조하는 조심스러움은, 왕조시대의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고리타분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일을 처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없어서 아니 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개미집 두덩도 밟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말을 타고 달려가더라도 개미집을 피해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가진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조심스러운 행동에 대한 가르침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전 청와대 대변인의 행각에 대한 보도와 그에 대한 논란 때문이다. 그러나 성 문제, 부패, 폭력 등 여러 가지로 그와 비슷한 사건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회의 정신 자산의 손상에 따라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들이라 할 것이다.

[김우창칼럼]홀로 있어도 조심하는 사람

국가적인 공공임무를 맡은 사람의 행동이 신중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절차에 따라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의전(儀典) 절차, 프로토콜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정신적 수련을 거쳐서야 믿을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행동의 신중함은 마음을 바르게 갖는 데에 이어져 있고 또 바른 마음의 상태가 있어야 몸을 바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됐다. 앞에 인용한 경재잠(敬齋箴)의 경고에 따르면, 안과 밖에 “틈이 벌어지면, 사욕이 만 가지나 일어나”게 된다. 마음과 행동의 한결같음은 밖으로 또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적인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사사로운 삶에서도, 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목적으로 유지돼야 한다. 유학의 전통에서, 남이 보거나 듣거나 관계없이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신독(愼獨)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보다 세속화된 현대에서 이러한 자세, 경(敬)이라고 부른 자세를 닦아야 한다는 주장이 참으로 옳은 것인가를 물을 수 있다. 그것은 전통 윤리--삼강오륜과 같은 윤리를 익히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자세를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목적은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맞고 사회적 질서에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근본 원리라는 것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적인 관점에서 편협하고 억압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몸을 바르게 하는 주재(主宰)로서 상제를 말한 것 자체가 억압적 질서를 시사한다.

그러나 되풀이하건대, 사람의 일에서 마음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가져야 할 때가 있고 사안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는 거죽은 어떻든 그에 대한 요구는 삶의 심각성에 비추어 불가피한 것으로,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삶의 기저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제의 어전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움직이라는 말은 그것을 표현하는 봉건시대의 비유일 뿐이다. 다른 전통에서도 윤리 사상가나 환경사상가들은 세계에 외경(畏敬)의 질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고 존중하는 것, 또 이해관계를 초월한 상호 신뢰가 성립하는 것은 이러한 기초가 있어서 가능해진다. 그것이 있음으로써 사람의 삶은 살 만한 질서 속에 유지된다.

칸트의 철학에서 실천적 행동 규범, 또는 윤리적 가치의 근거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탐구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에게 윤리 가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일치한다. 그런데 자유를 넘어가는 원리 없이 규범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은 도덕적 또는 정신적이라고 할 수 없는 욕망의 존재이기도 하다. 욕망은 대체로는 감각, 감정, 물질 그리고 그것에서 얻어지는 쾌락에 의해 자극된다. 또 욕망은 개인의 개인됨의 핵심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마음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개인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으로는 사람에게는 욕망과 감각적 쾌락 외에 도덕적 행위에서 얻는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을 위해 사람은 고통을 무릅쓰면서까지 도덕적 행위를 택한다.

그러나 도덕을 선택하는 경우라도 거기에서 얻는 기쁨을 위하여 또는 그것에 몰려서 도덕을 택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충동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다. 자유는 모든 충동의 강요나 밖으로부터 오는 강제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자유로우면서 보편적 원리에 따라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초월적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자유 속에서 도덕적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추상적 명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감정--사안에 따라 일어나고 또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되는 감정에 연결된다.

철학적인 논리를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에게 도덕적 당위성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고, 그로써 자신의 삶이 사물의 큰 진리와 일치하게 되기를 원하는 충동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다만 현실에서 이것은 다른 감각적인 욕망 그리고 욕망의 이기주의와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이기주의의 인정이 근대적 인간 해방의 주요한 내용을 이룬다. 이 관점에서의 자유는 이기적 행복 추구의 자유이다. 이것이 경제적 번영의 기초가 된다. 그런데 그러한 추구들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조정한다고도 하지만, 그것을 일정한 질서 속에 유지하는 것은 법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 질서의 뒷받침 없이는 법은 그 경직성으로 인하여 참다운 인간의 질서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도덕적 질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자유주의는 강압적 도덕을 거부하면서도 도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의 난제 중 하나가 도덕의 문제가 된다.

인문학이 번창한다. 욕망과 소유와 권력 투쟁의 인생에서 무언가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를 찾아보려는 소망이 사회 안에 부유(浮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도 실용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인문학이 번창하는 것은 대체로 대학의 정규과정을 벗어난 강좌와 같은 형식을 통하여서다. 대학 내에서는 실용적 이점의 압박이 너무나 크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문학은 흔히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고 광고나 상품의 디자인에 필요한 기술을 창조하는 데에 유용하다는 수사(修辭)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또는 그것은 처세의 학문으로 간주되어 세상을 헤쳐나가는 요령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으로, 소위 스펙을 쌓는 방법으로, 또는 집단 이념으로 자신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설정한다.

어느 때나 진정한 자유와 그 정신적 바탕을 찾는 일이 쉬울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특히 사회의 정신적 자산은 탕진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을 표방하는 여러 도덕적 수사도 그 진정성을 쉽게 믿기 어렵다. 공적 공간에서 공적 행동의 의전을 뚫고 하락하는 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삶의 정신적 진실에 경외감을 가진--말하자면, 옛날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늘의 의미에서, 지경(持敬)하는 인물이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높은 도덕성을 지닌 인물이 보인다고 하여도 오늘과 같은 전략의 시대에 그러한 인물을 스펙으로 쌓아 이미지를 다듬어 가는 사람으로부터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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