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국민참여재판’을 흔드나

2013.11.01 21:49 입력 2013.11.02 00:17 수정
박구용 | 전남대 교수·철학

민심은 천심이자 욕심인데 둘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 과거엔 변하지 않고 틀릴 수 없는 진리가 기준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불변하는 진리가 있다는 주장 자체가 허위다.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주장만이 진리의 자격을 갖는 세상이 됐다. 그만큼 진리는 참여와 합의를 필요로 한다. 고도의 논리를 요구하는 재판조차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까닭이다.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제와 참심제로 나뉜다. 배심제는 무작위로 선정된 일반 시민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대배심과 사실 문제를 심리하고 판정하는 소배심으로 나뉜다. 배심제를 시행하는 미국의 경우 배심원이 기소 여부와 유·무죄 여부를 결정하면 그에 따라 법관이 법률을 적용해 형량을 결정한다. 배심원과 법관이 상호 독립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판결하는 것이다. 반면 독일이 시행하는 참심제는 기소 여부나 사실심리만이 아니라 형량을 결정하는 법률 적용까지 참심원과 법관이 함께 논의해 합의를 도출하는 제도다.

[사유와 성찰]누가 ‘국민참여재판’을 흔드나

한국은 2008년부터 소배심을 중심으로 국민참여재판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배심원의 결정이 법관의 판결을 구속하지 못하므로 온전한 의미에서 배심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동안 재판부가 배심원의 판단을 92.5% 이상 수용한 것으로 보아 시민참여를 확장할 기초가 다져진 셈이다. 법률 전문가는 더 이상 법정에서 진리의 문을 열고 닫을 열쇠를 독점해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최근 두 정치적 사건에 대한 배심원의 판단에 불만을 가진 일부 보수세력과 수구언론이 사법민주주의라는 국민참여재판의 정신 자체를 훼손하려 든다.

우리는 지식과 권력의 은밀한 상호 부역이 부패와 부정을 인준해온 어둠의 역사를 수없이 봐왔다. 사회적 강자는 언제나 진리란 무지의 대중이 합의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진리를 신의 세계로 규정하고 그 세계로 가는 길을 소수의 전문가만이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머릿수가 많다고 베토벤보다 더 위대한 심포니를 작곡할 수 없고 아인슈타인처럼 상대성이론을 제안할 수도 없으니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베토벤도, 아인슈타인도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과 탐구공동체에서 새로운 진리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인간, 특히 인간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스로 진리의 기준이 된 인본주의 사회에서 진리를 내세우려는 사람들은 이제 이성의 법정에서 온갖 의문과 취조를 견뎌야 한다. 특히 세 가지 신문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①먼저 자신의 주장이나 이론이 객관적 사실과 일치함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준이 되어야 할 사실이란 모든 이론과 주장으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중립적 사실이 아니라 그것 역시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고 해석된 것이다. 그 때문에 사실과의 대응 여부로 진리를 확정할 순 없다.

그래서 이성의 법정은 ②진리를 주장하는 관점이 사실관계를 떠나 최소한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을 것을 요구한다. 적어도 내적 정합성을 갖춘 주장이라면 잠정적 진리 자격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아귀가 잘 맞는다고 진리 판정을 한다면 지식 사기꾼이 판치는 세상이 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성의 법정은 ③제기된 주장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최적의 토론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로 인준한다. 그렇다고 대중 집단이 전문가보다 더 뛰어난 지성을 가졌다거나 다중이 합의하면 무조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합의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담론에 참여해서 보다 나은 근거를 제시하는 관점을 비강제적으로 수용하는 민주주의 정신이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와 일반인의 구별은 무의미하고, 차별은 부당하다.

국민참여재판은 세 가지 관점, 곧 ①사실과의 대응 여부, ②법리와의 조응 여부, ③합의 가능 여부를 동시에 고려하는 사법제도다. 전문가를 포함해 모든 사람의 의견과 주장을 동등한 무게로 존중하는 민주주의 문화의 꽃인 셈이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가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 토론문화를 충분히 숙성시킨 것은 아니어서 여론재판, 감정재판, 마녀재판의 위험도 있다. 이런 부작용을 극복하려면 토론문화를 활성화해야지 폄하해선 안된다. 더구나 지금 당장 내 편에 유용하지 않다고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의 논리다. 진리가 유용한 것이지, 유용한 것이 진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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